비행기에서 내려 수하물을 찾아 마지막 세관과 보안검색을 지나 드디어 입국장을 빠져나와 미리 예약했던 택시를 잡았다. 비행기에 올라탈 때 가방 개수가 5개였는데 택시에 짐을 싣는데 세어보니 4개뿐, 아차! 1개가 모자랐다.
수화물을 찾았을 때 배낭 하나를 등에 고 있었는데, 마지막 세관 보안검색을 지나면서 배낭을 챙기지 않고도 눈에 보이는 가방의 개수가 4개가 맞았기 때문에 안심하고 그 배낭을 챙기지 않고 입국장으로 빠져나왔던 거다.
예약한 택시이니 기다리려 주길 부탁하고 다시 입국장으로 들어가 '수소문' 끝에 100미터나 떨어진 수화물 서비스 사무실을 찾아가서 문의하면 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곳에는 이미 5명의 여행객이 각자의 수화물을 찾기 위해 줄을 서 있었다. 그런데, 데스크에는 아무도 없었다. 어쨌든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니, 나도 기다릴 수밖에.
한 15분이 지나니 데스크에 직원이 나타났고, 맨 앞에 기다리던 사람에게 그 사람이 잃어버렸던 것으로 보이는 가방을 전달해주었다. 그리고 는 두 번째 사람과 5분 정도 잃어버린 가방에 대해 얘기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그 직원은 다시 작은 문으로 사라졌다. 가방의 인상착의와 잃어버렸을 대략적인 위치를 듣고는 그 가방을 찾으러 가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또 10여 분 후에 가방을 들고 나타났다.
그런 식으로 거의 1시간 가까이를 기다려 나의 차례가 되었고, 내가 비행기에 타기 전 찍어두었던 가방 사진을 보여주며 가방의 인상착의를 설명했다. 물론, 어디서 탔고, 언제 도착했는지도 알려주었다.
마지막으로 그 직원은 마지막 본 곳이 어디냐고 물었다.
"마지막 입국장 들어오기 바로 전 세관 보안검색대에 두고 나왔어요".
그 수화물 서비스 직원은 나에게 말한다.
"입국장으로 다시 가보세요. 입국장 들어오는 입구 옆에 작은 창문이 있는데, 거기에 벨을 누르면 세관검색대 근처에서 잃어버린 가방을 금방 가져다줄 거예요. 아마 1분이면 꺼내 줄 겁니다."
' 허걱 @@ '
뉴질랜드의 상당수 공항직원이나 공무원들과 같은 기관업무에는 원주민 마오리족의 후손들이 많이 자리 잡고 있다. 그들은 뉴질랜드가 영국의 식민지가 된 이후 서양인과 피가 섞이고, 영어를 사용하며, 서양문화에 동화되었기 때문에 전통적인 마오리의 사고방식을 가진다기보다, 서양인의 사고방식에 더 가깝게 생각한다.
공항의 체크인 데스크나, 슈퍼의 계산대에 줄 서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앵글로 색슨족의 후손들이 손님이다. 5분이면 끝났을 일을 한 시간이나 기다리게 만든 것은 서양의 직선적이고 순차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그런 손님이 만든 문화 때문이다.
그 수화물 서비스 데스크의 직원 관점에서는 각각의 손님은 풀어야 할 각각의 문제들이고 그런 문제들은 차례로 하나씩 순차적으로 풀어야 한다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하면 아직 자기 앞에 다가오지 않은 문제는 처리해야 할 문제가 아니며, 하나의 문제를 지나야 만 다음 문제를 풀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한 사람씩 응대를 할 게 아니라, 손님들을 먼저 가능한 대응방식별로 분류하고, 공항 내 수색으로 대응해야 하는 경우 가방 하나씩을 찾으러 가는 게 아니라 여러 사람의 가방에 대한 정보를 한꺼번에 가지고 공항 내부를 한 번에 돌아본다면 훨씬 시간이 단축되었을 것이다.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디폴트로 장착하고 있는 프로세스에 대한 사고방식인데, 서양인들은 그렇지 않다.
이들은 시간 순서에 따른 사고방식을 가지며, 한 번에 하나의 정보만을 처리한다.
그래서 그런지, 이들은 자기 순서가 된 이후는 뒷사람을 신경 쓰지 않는다. 우리 같으면 뒤통수가 따가워 뒷사람 눈치를 볼 것이고, 직원들도 짬을 내어 다음 차례에 오랫동안 기다리는 뒷사람에게 어떤 용건인지부터 먼저 물어볼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 절대로 지금 순서인 사람의 일이 끝나기 전에는 뒷사람 얘기를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실제로 쳐다보지도 않는다. 서양의 식당에서 가능한 웨어터가 테이블로 찾아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현재 처리 중인 일을 끝내기 전에는 중간에 당신의 얘기를 듣고 두 가지의 일을 동시에 처리할 수 있는 프로세스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서양 외국인과 대화할 때는 눈을 쳐다보고 말하라고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들은 당신이 자기와 얘기하는데, 당신이 자기 눈을 쳐다보지 않고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다면 주의가 산만하다거나 자기의 얘기에 관심이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아마도 당신이 그 사람과 대화 중에 당신 친구가 당신에게 얘기하려 다가왔다면, 그 사람 당신 친구에게 즉각 눈길을 주지는 않을 것이다. 당신과의 얘기가 진행되고 있고, 그것이 끝나기 전에는 다른 사람을 알아차리거나, 알아차리더라도 눈빛으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멀티채널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는 직선적 세계관에서 비롯되어서, 전체를 동시에 바라보는 동양적 사고를 가지고 있고 시간을 초단위로 나누어 살아가는 한국 사람들에게는 비효율의 극치인 것이다. 사실은 우리가 좀 피곤하게 살고 있긴 하다. 우리는 어떤 한순간에도, 현재만을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지금'에 해당하는 시간의 폭은 상당히 넓다. 그리고 '이곳'이라는 공간의 폭 또한 넓다. 우리에게 일본과의 '과거사'란 나의 현재와 연결된 시간이고 아직 끝나지 않은 일이지만, 서양인에게는 현재 시간과는 분리된 과거의 또 다른 시간일 뿐이다. 그러니, 한국 사람들이 왜 그렇게 과거에 이미 끝난 일본의 식민통치 시 범행을 아직까지 사죄하라, 배상하라 얘기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직선적, 시간 순서적 사고를 가진 이유는 무엇일까?
중국을 비롯한 동, 남 아시아에서는 평야와 온화한 날씨 덕에 농업이 발달했고, 기후가 좋지 않고 산림과 산악지형이 많은 서양은 상대적으로 사냥과 채집이 더 중요했던 것에 원인이 있을 것으로 가설을 세워본다.
사슴을 사냥하기 위해서는 사슴 한 마리를 끝까지 쫓아야 한다. 중간에 토끼가 나타났다고, 토끼에게 눈길을 주고 토끼까지 잡으려고 해서는 안된다. 그들은 양을 키웠는데, 양은 농사에 쓰기 위함이 아니나, 양 자체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제공하는 자원이다. 양을 키우기 위해서는 무리를 벗어나는 양 한 마리를 쫓아 무리로 돌려보내야 한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갈 때도 양들을 모두 집으로 돌려보내고 나서야 다른 일을 할 수 있다.
사냥을 하기 위해서는 먹을 것인 동물 자체에 집중해야 하지만, 농사를 짓게 되면 보다 폭넓은 시야를 가져야 한다. 한 번에 넓은 지역에 대한 정보를 해석해야 하며 지금 보다는 작년 이맘때 어땠는지, 올해 비가 올지 안 올지 예측해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할아버지가 수 십 년 동안 수집한 날씨와 병충해 정보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동시에 곡식뿐 아니라 채소 농사나 채집도 동시에 해야 한다. 해야 할 일이 순차적이지 않고 날씨변화에 미리 대처해야 하고 집단적인 노동력에도 의지해야 하는 좀 더 복잡한 전략이 필요하다.
이런 가설이 얼마나 맞을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결론적으로 이런 사고 프로세스를 가진 사람들과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중요하다. 어차피 수천 년간 만들어진 그들의 사고방식을 바꾸는 건 불가능하니.
난 이런 사람들과 대화할 때 눈을 맞추고자 의도적으로 노력한다. 물론 불편하다. 하지만 우리가 느끼는 그 불편함은 상대가 불편하게 느낄 것이라는 것이 전제가 되어 있는데, 나를 그냥 관찰자 입장으로 바꾸면 좀 쉬워진다. 인사이드아웃에 나오는 그 감정들처럼, '두뇌'라는 지휘센터 안에 내가 앉아있고 '눈'이라는 창밖으로 상대를 관찰한다고 생각하면 좀 더 쉬워진다. 내가 그렇게 쳐다본다고 그들이 그렇게 불편하게 느끼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의도적으로 주변시야를 차단하는 훈련을 한다. 그렇다고 선글라스를 쓴다거나 가림막을 한다는 게 아니라, 공공장소에서 마치 남들이 없는 것처럼 나의 생각과 내가 있는 자리만 집중한다. 한국에서는 버스의 자리가 모두 한쪽을 바라보고 있다. 그렇게 해놓지 않으면 주변에 항상 신경을 쓰고 있는 한국인들에게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신경이 쓰이고 여간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유럽이나 뉴질랜드의 버스를 보면 옆으로, 앞으로, 뒤로, 마주 보고 않는 자리 등, 사람들의 시선 방향에 그리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동선과 공간의 효율만을 생각한다. 그게 가능한 것은 그들은 어떻게 자리의 방향을 배치해도 현재 자기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 이외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가게나 관공서에서 일을 볼 때 절대 일이 끝나는 시간을 정확히 정해 놓고 다음 일정을 잡지 않는다. 일단 시작만 있고 끝은 '모른다'가 정답이다. 심지어 회사에서 프로젝트를 해도 최종 날짜가 없다. 항상 변수가 있고 누가 휴가를 가면 그 일은 그 사람이 돌아올 때까지 진행이 되지 않는다. 이들은 너무나 당당히 휴가를 내고 사라지기 때문에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얼마 전에 부엌 리노베이션 작업을 프로젝트 매니저에게 맡겨 진행했다. 그런데 그 프로젝트 매니저는 절대 공사 일정을 만들어서 보낸 적이 없었다. 항상 다음날 작업에 대해서만 얘기했지, 언제 어떤 순서로 공사가 진행되는지에 대한 작업내역을 작성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언제 프로젝트를 끝내겠다고 장담해서는 안된다. 특히 혼자 하는 일이 아니고서는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력서에 5년 전, 10년 전의 이력은 그리 쓸모가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화려한 학력과 경력은 아무짝에 쓸모가 없다. 그냥 지난해, 올해 뭐 했느냐가 중요하다. 그러니, 큰 계획을 가지고 폭넓게 공부하고, 경력을 쌓아봐야 그것을 제대로 사용할 수가 없다. 당장 써먹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이며, 바로 다음에 무엇을 할지를 고민해야 한다. 그래서 그런지 이 사람들은 심지어 동일한 기술임에도 그 사람이 어떤 툴을 사용하여 그 기술을 써먹었는지에 신경 쓴다. 데이터베이스 기술을 가진 친구가 있었는데. 그는 아마존 클라우드 환경에서 일했기 때문에 마이크로소프트환경을 가진 회사에 취직하기가 너무나 어려웠다. 일정 수준을 넘어가면 그가 가진 지식과 프로세스가 중요하지 환경이나 툴이 중요하지는 않는데도 말이다.
유럽인들이 공공장소에서 줄을 잘 선다고 우리는 들었다. 실제로 그랬다. 이제야 알겠다 왜 그런지. 그들은 많은 사람들이 랜덤으로 배치된 버스정류장에서 동시에 여러 사람의 위치와, 버스의 위치, 그들의 움직임을 동시에 파악하고 예측하면서 자신이 어떻게 하면 빨리 버스에 오를 수 있을지 생각하는 것이 너무 어려운 것이다. 그냥 앞에 몇 사람이 있던, 바로 앞사람 이 버스에 오른 후에 자신이 버스에 오르는 것이 쉽다. 순서만 정해져 있다면 그게 얼마가 걸리던 인지적 부하가 적게 걸리기 때문이다.
이런 그들 속에 사는 나도 역시 그렇게 행동해야 덜 피곤하다. 아마 우리는 이런 것을 '성숙한 시민의식'이라고 포장을 한다. 맞다. 성숙한 시민 의식이란 약자를 보호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민첩하고 시야가 넓고 판단이 빠른 것이 아니다. 이제까지의 한국에서는 민첩하고 시야가 넓고 빠른 판단을 해야 생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젠 느리고, 시야가 좁고, 한 번에 하나씩만 판단할 수 있는 사람들도 물리적 사회서비스를 제대로 이용하게 해주어야 한다. 그러려면, 모두 다 조금 느리게 움직여줘야 한다. 기다려 줘야 하고, 그러니 순서를 지키자 좀 답답하더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