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사는 이야기
리처도 도킨슨은 신은 만들어진 것이라고 했다.
나는 무신론자는 아니다. 그렇다고 유신론자나 불가지론자 또한 아니다. 그냥 평범한, 기도도 하고 점도 재미로 보고 MBIT도 추종하는 보통 사람이다.
종로거리에서 젊은이가 도를 물어오면 그것이 궁금해 실제 따라가 본 적도 있는 호기심 많은 사람이다. 또한 현재 종교에 관련된 기업일을 하고 있다 보니 종교에 속한 사람들의 심리에 대해 한 단계 더 생각해 보게 되었다.
하지만, 종교에서 얘기하는 신이라는 것을 눈으로 확인한 적은 없다. 대신, 교통사고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것을 계기로 신을 믿게 된 한 친구를 통해 사람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살 수도 죽을 수도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긴 했다.
우리가 신에게 하는 기도는 사람 위에 존재하면서 우리가 그것에 대해 다 알 수 없는 초자연적인 것에 대해 나 자신이 의지로 할 수 없는 무엇을 요구하는 행동이다. 그 기도의 대상은 누군가에 의해 임의로 만들어진 이름과 신화로 또는 존재했던 누군가에 덧 씌워져서 다양한 종교에서 얘기하는 신이 된다.
아무도 신의 본모습을 본 적은 없지만,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게 좀 더 편할 것이다. 사람 모습이 아니라 계단이나 문어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면 아마도 기도할 맛이 좀 안 날 것 같긴 하다.
아마도 물리학자는 일반 상대성이론과 불확정성의 원리에게 기도 할지도 모른다. 그들이야 말로 어떤 형상이 아닌 정말로 세상을 움직이는 원리, 즉 개념에 기도를 할 것이다. '과학'이 종교와 다른 특이한 점은 그 믿음의 대상이 하나로 고정 되어 있지 않고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에서부터 보이지 않는, 그 속에, 또 그 속에 존재하는 원리로 진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종교에서의 신이건, 과학에서의 신이건, 신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한 번쯤 우리가 신에 대해 생각해봐야 할 것들이 있다.
신은 사람의 삶과 죽음에 관여하지 않는다.
신이 사람의 삶과 죽음에 좋은 의도로 관여한다면 지금까지 사고로 목숨을 잃은 그 수많은 사람들은 뭐란 말인가?. 더군다나 우리는 언젠가 모두 죽게 되어 있다. 따라서 적어도 삶과 죽음은 개인의 선의(善意) 또는 악의(惡意)와는 상관없다. 혹여나 신이 그래도 사람의 삶과 죽음에 관여한다면, 아무런 이유 없이 또는 어떤 다른 이유로 인간의 수명을 초기 설정해 놓고 업데이트하는 것을 잊었거나 지구가 인구폭발로 황폐해지지 않도록 지구차원에서의 선을 베풀기 위해 인간 적절한 수명을 정해 놓았을 수는 있다.
신은 선하거나 악하거나 하지 않다.
선과 악은 '도덕적 동물'에서 논한 것처럼 진화론으로도 충분히 설명되는 세속적인 것이다. 적어도 우주를 관장하는 신이라면 선과 악을 모두 포용할 수 있는 존재여야 한다. 우주의 아주 먼지 티끌만 한 지구의 동물들이 보이는 생존본능에서 나온 일관된 규칙도 없는 '선'이라는 개념에 하찮게 신경 쓸 정도로 한가하지는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에게 도덕적이라고 보이는 것들이 신에게는 도덕적이지 않을 수 있고, 그 반대일 수도 있으며, 신에게는 도덕이라는 개념이 필요 없을 수 도 있다. 더 강하고 현명한 존재가 약하고 우매한 존재를 돌봐야 한다는 도덕적 개념은 공동체에서만 생존하도록 진화된 인간이 인간들에게 써먹을 수 있는 생존전략일 뿐이다. 일종의 호혜의 법칙인 것이다.
신은 스스로 자신이 전지전능하다는 것을 증명하지 않는다.
증명은 약자가 하는 것이니까. 전지전능한신이 굳이 약자인 인간에게 자신의 전지전능함을 증명해야 하나? 인간은 신에 비하면 너무 하찮아서 신에게 어떤 해도 끼칠 수 없다. 우주의 시간으로는 찰나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인간들에게 쓸데없는 에너지 낭비를 할 필요는 없으니. 어떤 이유에서건 신에게 인간이 필요하다면 적어도 인간들은 그런 신의 전지전능함을 경험하지 않고도 인간 스스로 신의 전지전능함을 믿어주고 있는데 뭣하러. 물론, 일부는 그런 걸 꼭 증명해야 믿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신에게 기도하는 것은 유의미하다고 생각한다. (사실 우리가 신에게 할 수 있는 행동 중에 기도 외에 달리 할 수 있는 것도 없다)
신이라는 개념의 존재가 우리의 기술로는 백만광년 안에 도달할 수 도 없는 거리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고 하자. 그와 커뮤니케이션하기 가장 좋은 방법은 양자 얽힘을 이용하는 것이다. 텔레파시가 아마도 그 양자 얽힘 때문에 생길 수 있을 것 같은데, 텔레파시와 가장 유사한 행동은 기도이다. 또는 신은 4차원적 존재라서 우리 눈에는 안 보이지만 같은 공간에 어디에서나 존재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적어도 기도하는 모습과 소리를 들을 수 있지 않을까?
신이 전지전능한 데다 악하기까지 하다고 치자,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신이 나쁜 마음먹고 지구를 반으로 갈라놓지 않기를 기도하는 것 밖에 없다. 혹시나 천당이 없고 신이 존재하지 않거나 정의롭지 않더라도, 기도 때문에 신이 우리를 지옥으로 보낼 확률이 더 높아지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에 기도는 여전히 유의미하다.
천국이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지만, 혹시나 천당이 있을 경우 그리고 그 전지전능한 신이 정의롭기까지 하다면 우리의 선한 기도를 들어주거나 우리를 천당으로 보내 줄 가능성이 상당히 높아지니 기도를 하는 게 오히려 유리하다.
신이 악하지도 선하지도 않으며, 어딘가에 물리적으로 (입자는 물론 파동의 형태도 포함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원리 (마치 동양의 음양과 같은)라고 하자. 사람은 현상을 통해 원리를 파악해 온 존재 이므로 기도 (믿음의 행위)가 그 원리를 파악하는데 힘을 실어줄 것이다. 일종의 가설 실험과 같은 것으로 '한 가지 변수(기도)를 입력했더니 예상했던 결과(소원이룸, 기적)가 나왔으니 가설(신이 존재)이 부분적으로 증명되었다'라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신이 존재하고 그것에 기도하는 것으로 손해 볼 것은 하나도 없다고 생각된다. 비용과 시간이 그렇게 들지 않는 것이니 기도를 해보는 것을 어떨까? 여기서 '신'은 특정 종교의 신을 얘기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 신이 사람의 모습일 필요도 없다.
나는 '선'과 '악'의 그 근본이 인간의 기준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인간이 스스로 그것을 어기는 것을 막기 위해 제삼자인 '신'을 들여왔다고 생각하는 게 더 논리적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자신들에 이익이 되는 '선'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공동체를 만들어 그 '선'을 보호하기 위해 보편적인 이념 또는 신념으로서 그 선과 악을 포장한 것이 '종교'의 형태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종교가 먼저인지, 신이 먼저인지, 기도가 먼저인지를 굳지 따지 자면 기도가 먼저 생겨난 것이 아닐까? 원시인간세계에서도 원하는 이상향이 있었을 것이고, 그것이 선이며, 선이 이루어지길 바라는 행동이 기도가 되었고 그 기도의 대상인 신이 필요해졌다. -신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그리고 기도의 목적인 선이 보편성을 지녀야 나의 생존에 유리해지므로 종교의 형태로 포장되었고 기록되었다고 생각된다. - 또한 기록된 내용 사실인지 지어낸 것인지와 상관없이-
확률적으로 신이라는 존재가 (그것이 원리이건, 물질이건, 파장의 형태이건) 있을 가능성은 여전해 배제할 수 없고 오히려 있을 가능성이 훨씬 크다고 생각된다. 신이 있고 없고 상관없이 믿음은 감정을 컨트롤할 수 있고 감정은 자신과 타인의 행동을 바꾸는 원동력이다. 거기에 그 방향성을 모을 수 있는 신까지 있다면 그 힘이 커지지 않을까?
로또 '1등 당첨'을 믿는다면, 보다 유용하고 보편적이고, 그 믿음의 결과를 경험할 확률이 높은 '신'을 믿어 봄이 어떨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