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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버스?

세상 모든 가설

by 스페이스댕


운전하다가 보면 도로 위에 그려진 글자를 자주 본다.

버스전용, 양보운전, 우선멈춤 등등.


'버스전용'이라는 네 글자를 모두 좌우로 배열하여 차선을 꽉 채우는 경우도 많긴 하지만 '버스'와 '전용' 이렇게 두 단어로 나누어 앞뒤로 배치하기도 한다. 차를 운전하는 나로부터 먼 쪽에 '버스', 그다음 가까운 쪽에 '전용'이라고 써 놓는다.


당연히 '전용'이란 단어를 먼저 마주치겠지만 우리는 아무렇지 않게 시선으로부터 먼 쪽인 '버스'를 먼저 읽고 다음 가까이 있는 '전용'을 읽는다. 시속 100킬로미터로 달리면서도 말이다. 전체 글씨의 길이가 5미터 정도라고 보면 시속 100Km로 달리는 차에서 그 글씨는 0.2초 보다 짧은 시간에 지나간다.


'버스전용'이란 단어를 영어로 바꾸면 'BUS ONLY'인데, 뉴질랜드의 도로 위 글씨는 'ONLY' 다음에 'BUS'가 오는 순서로 되어 있다. 물론 뉴질랜드 뿐 아니라 영어를 사용하는 나라는 마찬가지 일 것이다. 'ONLY BUS'순으로 읽어도 묘하게 말이 되긴 하지만 영어를 사용하는 이들은 이것을 'BUS ONLY' 읽는다.


가까운 쪽이 'BUS', 그리고 먼 쪽이 'ONLY'이고 가까운 쪽부터 먼저 읽는 것이 이들의 방식이다. 하지만 나는 늘 익숙한 순서인 시선의 위쪽, 차에서 먼 쪽인 'ONLY'를 읽고 나서 'BUS'를 읽는다. 그러고 나서 뭔가 어색함을 직감하고 머릿속에서 다시 'BUS ONLY'로 조합하곤 한다. 다른 글자로는 'GIVE WAY'가 있는데, 역시나 나는 'WAY'를 읽고 나서 'GIVE'를 읽게 된다. 'WAY'가 더 멀리 있는 것임에도. 'PED XING AHEAD'도 있다. 전방에 보행자가 건너는 곳이 있다는 뜻인데 나는 상당히 멀리 떨어진 단어 'AHEAD'부터 읽고 다음 'XING', 그리고 'PED'를 읽었다. 그러고는 'AHEAD XING PED?' '이게 무슨 뜻이지?'라고 몇 초간 생각한 적이 있다.


그 짧은 순간에도 유럽인의 자기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 자신에게 가까운 쪽에서부터 먼 쪽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현실이 이런 데서 나타난다. 자기중심에서부터 세상을 바라보고 미래가 아닌 현재에 관심을 가지는 이 특성이 이렇게 짧은 순간, 작은 공간에서도 일어난다니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천동설이 괜히 나온 게 아니었나 보다.


극동아시아에서 자라난 나는 멀리 있는 것, 미래의 모습과 전체의 목표에서부터 시작하여 현재에 해야 할 일을 계획해 나가는데 익숙하다. 그리고 어떤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주변 또는 전체의 정황을 이해하고 나서 본 대상을 판단하는데 익숙하다. 굉장히 포괄적이고 관계적인 인식 방법이다.


직장에서도 누가 질문을 해오면 그가 몰라서 묻지 않았을 다른 것까지 알려준다. 누가 발표자료를 보여주면 각 챕터와 항목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부터 알아야 내용을 이해하기 쉽다. 가게나 병원에 줄을 서면 전체줄을 빨리 짧게 하기 위해 앞사람이 카드를 찾는 동안 내 용건을 미리 물어보고, 자동차를 주차할 때 편하기보다 주차장에서 나갈 때 편한 방향으로 주차하고, 팀원이 아파서 일을 못했으면 내가 주말에 특근으로 일을 메꿔주는 이런 나의 모습을 서양유럽의 사람들을 만나기 전까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그게 당연한 방식이 아니라는 것을.


유럽인은 미래가 존재한다기보다는 당면 문제를 해결해 나가면서 미래가 만들어져 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어떤 상황은 그 대상으로부터 기인한 것이지 그 주변이나 정황의 영향이 그 원인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전체와 미래를 보는 눈 보다 현재 보이는 것을 분리하고 분석하는 것이 우선이다. 그리고, 전체의 목표보다 나의 목표가 우선이고 내 옆도, 나의 뒤도 아닌 내 눈앞에 있는 것이 우선이다.


아무튼 정말로 그들이 도로 위 글씨를 그런 순서로 읽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한번 물어봐야겠다.

버스전용선.png

물어보려니 그것도 이상하다. 그것은 마치 서양인이 우리에게 한국도로 위 버스전용 표시를 '전용'-'버스' 순으로 읽지 않는 이유를 물어보는 것과 같을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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