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맘대로 리뷰
제목은 ‘괴물 보는 법’이라고 해놨지만, 사실 영화를 보는 방법이 따로 있는 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괴물을 보는 법을 말하는 이유는 나는 재미있게 본 이 영화를 같이 간 동료는 아무 재미를 못 느꼈고, 심지어 영화관에서 자기까지 했기 때문이다.
누가 옳다는 게 아니라, 재미를 놓친 게 아까워서 이렇게 보는 법이라는 거창한 제목의 글을 남기게 됐다.
괴물을 보는 방법은 다름 아닌, 이 영화가 ‘고레에다 히로카즈’ 영화라는 것을 알고 보는 것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는 내러티브가 강하지 않다. 스토리가 흘러가는 것을 그냥 지켜보는 듯, 흘러간다.
그리고 인생이란 그렇듯이, 누가 옳고 그르다고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 영화도 결론이 내려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럼에도 그 안에 인생과 아픔 그리고 소소한 기쁨을 담고 있다.
그 부분과 공감이 되었을 때는 눈물이 되어 흐르는 이상한 경험을 할 수 있다. 그래서 난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를 기대감을 가지고 본다.
내 눈에 눈물이 흐르기를 바라며….
또 그의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은 마치 우주가 무너지는 듯한 변화를 겪는다.
특히 동양인이 가장 큰 가치를 둔다는 가족이 무너지는 변화를 겪는다. 그 무너진 세계 속에서 어떻게든 생존하려는 분투를 감정적으로 그려낸다.
그러나 영화는 한 발 떨어져서 그들의 분투를 보여준다. 마치 “너희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세상은 그대로야”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래서 난 오히려 그의 영화를 볼 때면 더 세세하게 개인을 들여다보게 된다.
괴물은 세 가지 시점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첫 번째 시점은 혼자 아들 미나토를 키우는 엄마 사오리의 시점이다.
아들 미나토가 어느 날부터 ‘머릿속에 돼지 뇌가 들어 있다’느니 말을 늘어놓다가, 신발을 잃어버리고, 상처가 나서 돌아오기도 한다.
미나토에 의하면 학교 선생님인 호리가 미나토를 괴롭히고 있는 것이다.
사오리는 항의를 하러 학교를 찾아갔지만, 다들 어떻게든 사건을 덮으려고만 한다.
호리는 미나토에 미안해하는 마음이 하나도 없다.
사오리에게 괴물을 호리다.
두 번째 시점은 호리다.
호리는 학교에서 아이들을 잘 가르치고 싶은 평범한 교사다.
그런데 미나토는 덩치가 작은 동급생 요리를 괴롭히고 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주의를 줬지만, 모두 허사였다.
호리는 미나토를 폭행했다는 오해를 받고, 학교는 물론 사회에서도 쫓겨날 위기에 처한다.
호리에게 괴물을 미나토다.
세 번째 시점은 미타토 그리고 요리의 시점이다.
요리는 덩치가 작고 여성스러워서 남자아이들에게 왕따를 당한다. 미나토는 그런 요리를 도와주려 하지만, 요리를 도와주면 자신도 왕따를 당할 것 같아서 학교에서는 아는 척을 하지 않는다. 대신 요리가 당할 것 같은 일이 있으면 자신이 먼저 사고를 쳐서 주의를 돌리는 식으로 도와준다.
학교 밖에서 미나토와 요리는 둘도 없는 친구다.
요리는 학교는 물론 가정에서도 폭행을 당하고 있다. 미나토는 요리를 좋아하지만 좋아한다는 것을 들킬 수 없어서, 거짓말을 하게 된다.
미나토와 요리에게 괴물은 자신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세상이다. 그래서 그들은 특정 누군가를 미워하기보다, 세상이 무너지고 다시 시작하기만 바랄 뿐이다.
미나토와 요리의 관계는 우정과 애정 그 사이다. 아직 성정체성이 확립되지 않은 초등학생 남자아이들이라 그 느낌을 정의하지 못한다.
그저 서로를 좋아할 뿐인데, 세상은 그걸 조금도 이해하지 못한다.
동성애적 코드가 조금 엿보이는 이 부분을 불편해하는 사람이 많이 있었다. 나도 살짝 그랬었고.
그런데 다른 누군가를 순수하게 좋아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 나와 관객 모두, 혹시 괴물이 아닐까?
눈물이 나지는 않았지만, 서두에 말했듯이 재미있었다.
고레에다가 고레에다 했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