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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상 Dec 12. 2023

무엇으로부터의 독립

응원하고 싶은 것

우리나라에서 어떤 문화에 독립이라는 말을 붙이는 것은 책과 영화밖에는 없는 듯하다. 해외에서는 Independant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음악은 언더그라운드 혹은 ~ 씬이라고 산업 구조를 분리하고, 패션도 패스트패션과 정통 브랜드, 혹은 럭셔리 시장 같은 용어를 사용한다.

그런데 왜 책은 독립출판, 독립서점이고 영화는 독립영화일까? 도대체 무엇으로부터 독립했기에? 자본으로부터의 독립이라고 하기에도 어색한 면이 있다. 독립출판까지야 어떻게 자본으로부터 독립한다고 하지만, 독립서점이나 독립영화는 자본에 종속돼 있다. 수익을 내지 않으면 존재할 수가 (거의) 없다. 수익을 고민하고 운영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자본으로부터의 독립이라는 말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으로부터의 독립이기에 굳이 ‘독립’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일까. 

아마도 처음에는 배급망으로부터의 독립이었을 것이다. 영화와 책은 초기 산업 구조가 거의 유사했다.

출판사에서 책을 만들면 일부 직거래 서점에 책을 배본하고, 지방은 거의 ‘총판’이 배본을 담당했다. 그래서 예전에는 총판의 힘이 아주 셌다. 모든 서점과 직거래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총판이 우리 책을 잘 봐줘야 지방 서점에 잘 배본도 되고, 더 중요하게는 수금도 할 수 있는 구조였다. 서점도 총판을 통해 책을 받으니, 잘 팔리는 책을 먼저 받으려면 총판에 사정을 해야 했고, 베스트셀러인 경우 선금으로 책을 받아오기도 했다. 

똑같은 말을 반복해야 하지만 다시 정리하자면 영화도 마찬가지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영화사에서 직접 관리할 수 있는 곳은 소위 ‘개봉관’뿐이었다. 서울의 몇 개 개봉관에 직배를 하고 나면 재개봉관과 지방 극장은 나름의 배급업자가 따로 있어서 이들의 요구를 잘 들어줘야, 제대로 영화가 배급되고, 다시 한번 더 중요하게 수금을 할 수 있었다. 지방 극장도 마찬가지다. 배급업자에게 잘 보여야 영화를 받을 수 있고(당시에는 영화 필름을 복사할 수 있는 양이 정해져 있어서, 상영하고 싶다고 다 상영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수급도 적당히 잘 해줄 수 있었다.

이런 구조에서 벗어나, 영화를 만들고 책을 만들고, 영화를 상영하고 책을 팔고 싶은 사람들이 ‘독립’을 외치고 어려운 길로 뛰어들었을 것이다. 

이제 세월이 지나 배급 구조가 완전히 바뀌었다. 영화는 완전 전산망 시스템이 되었고, 디지털화된 덕분에 전국 수백 개 극장에서 동시에 상영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지방배급업자가 사라졌음은 말할 것도 없다. 도서는 상황은 다르지만 양상은 비슷하다. 총판의 힘이 거의 사라졌다. 이제 누구라도 총판 배급망에 올라타지 않아도 책을 낼 수 있고, 책을 팔 수 있다.

그러면 이제 독립이라는 타이틀을 떼도 될까? 아니, 전혀 그렇지 않다. 표면적으로는 배급망으로부터 자유를 얻었지만, 기저에 깔려 있는 더 거대한 자본주의적 논리에 지배를 받고 있다. 전국 극장 체인을 지배하는 CGV, 메가박스, 롯데시네마에 올라타지 못하면, 영화는 개봉할 수도 없다. 그런데 이들 극장은 ‘돈이 되는’ 그것도 ‘아무 많이 되는’ 영화만 상영한다. 

책은 대형서점과 온라인 서점의 베스트에 끼지 못하면 발견할 수도 없다. 그런데 베스트에 끼려면 엄청난 마케팅을 하든지, 탄탄한 마케팅 라인이 깔려 있는 대형출판사에서 출간해야 한다. 한 5000명 정도가 만족할 만한 컨텐츠라면, 시장에서 찾아볼 수도 없으니, 5000명은커녕 500명 손에도 닿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아직도 ‘독립’이 더 필요하다. ‘독립’이라고 이름 붙인 이들을 지켜봐줘야 한다. 앞에 독립이라고 붙이지는 않았으나, 독립을 추구하는 이들도 지켜봐줘야 한다. 그래야 그안에서 생각지도 못한 보석과 대리석과 가끔은 한두 명의 마음속에 쏙 드는 작은 돌멩이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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