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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긋한 신작가의 봄날 같은 가을날

2028년 11월 10일 금요일 모처럼 따뜻한 날을 꿈꾸며

by 은빛영글

몇 달이 지났지만 새벽 반 수영 강습은 여전히 힘들다. 어찌어찌 일어나서 다녀오긴 하는데 에너지를 쏟아붓고 나면 더 피곤하고 배고파져 침대로 기어 들어가 쓰러지기 바쁘다. 어째 더 약해지고 게을러지는 것 같은 기분도 든다. 글쓰기를 시작했던 5년 전 브런치스토리 작가가 되고 새벽반 글쓰기를 시작하면서 체력이 달렸는지 틈만 나면 고꾸라지던 게 힘들어 글쓰기 위해 시작한 운동인데 아직까지 맞는 운동을 못 찾았다. 이제 50대가 코앞이니 뭘 해도 힘든 게 당연할 수도 있겠다고 정신승리를 해본다.

아침부터 불태웠던지라 그 핑계로 전기장판의 따뜻한 품 안에서 한참을 더 누워 있었다. 수영도 좋고 글쓰기도 좋지만 따뜻한 침대에 이불을 돌돌 말고 혼자 누워있는 것만큼 행복한 것도 없다. 이사 오면서 네 식구 각자 방을 갖기로 한 건 지금 생각해도 참 기특한 생각이다. 애들도 각자 방으로 떠나고 남편도 독립시키고 나도 밤늦게까지 책 보고 글 쓰고 해도 옆 자리 누워있는 사람 눈치 안 봐도 돼서 좋고, 무엇보다 코골이 소리에서 벗어나서 가장 좋다! 그때의 나 참 잘했어! 대견해!



화장실에 가고 싶지만 참을 수 있는 만큼 참고 방광 터지기 직전에 일어났다. 아직 온기를 더 느끼고 싶지만 일상을 살아가야 하니 주섬주섬 변기 레버를 내리고 머리에 빗질을 했다. 수경에 눌린 자국이 채 사라지지 않은 얼굴을 두꺼운 뿔테 안경으로 덮어썼다. 작가는 모름지기 뿔테 안경이지. 절대 노안이라 그런 건 아니다.

따뜻한 커피를 내려 식빵 봉지와 딸기 잼 뚜껑이 열려있는 난장판 같은 식탁에 앉았다. 열넷, 열일곱. 사춘기 절정인지라 알아서 일어날 테니 깨우지 마라 아침도 안 먹는다 살찐다 난리다. 빵은 안 찌나. 그래. 빵은 안 찌지. 잼을 가득 발라 입에 꽉 채워 넣고 씹고 있으니 이 여유로움이 새삼스러웠다. 비단 5년 전만 해도 자는 애들 깨워 입에 주먹밥이라도 하나 넣어주면서 출근 준비하고 틈나는 대로 걷기라도 하고 책 읽고 글도 쓰고 참 열심히도 살았네 싶어 지금의 여유로운 아침이 감사했다.




양치를 하며 드레스룸을 열어 아끼는 옷을 몇 벌 훑어봤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 가장 아끼는 옷과 구두를 눈으로 골라 샵으로 갔다.

"작가님, 오늘은 어떻게 해드릴까요?"

"음, 부드러운 카리스마? 될까요? 오늘 큰 애 학교에 강연 가야 해서 좀 긴장되는데 예쁘게 부탁드려요."

브런치스토리에 꾸준히 연재를 하다 보면 출판사에서 연락 오기도 한다는 얘기를 듣긴 했었는데 줄줄이 계약을 하던 동기님들을 부러워하던 내게도 2년 전 기회가 왔다. 운이 좋았는지 첫 소설이 너무 잘되어 그 후에 강연도 가끔씩 나가고 글도 꾸준히 쓰고 있다. 출판사나 강연회장에 오고 가며 동기님들 얼굴을 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적당히 따뜻한 공기, 얼굴을 쓰다듬어 주는 브러시와 손가락은 간지럽기도 하고 부드럽기도 한 것이 강연 전에 느끼는 긴장감을 달래 주곤 했다. 수차례 강연을 다녔지만 아직도 좀 부끄럽고 긴장이 된다. 나는 트리플 대문자 I니까.

"마음에 드세요?"

"네, 너무 좋아요!"

반짝이는 조명이 예쁘게 달려있는 거울 안에는 뿔테 안경을 쓰고 식빵을 먹던 내가 아닌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풍기는 작가가 웃고 있었다.



왜 언덕 위에 학교를 지어 둔 걸까. 강연하는 강사로 가지만 이 학교 학생 학부모 이기도 하니 기사님은 대동하지 않고 사무실 직원들과 함께 걸어가기로 했는데 언덕이라는 걸 잠시 잊고 있었다. 헉헉 거리는 직원들에게 "그러니까 운동을 해야지! 은경쌤도 글쓰기 위해 운동을 하라고 하셨잖아!"라며 함께 헉헉댔다. 무용과 애들도 있는데 예고를 언덕 위에 지어 놓으면 애들 다리 말근육 되는 건 아닐까 잠시 생각해 봤다.

문예창작과 학생들에게 강연을 해달라 연락이 왔는데 하필 우리 큰 애가 다니고 있는 예고 심지어 아이의 담임 선생님이었다니 거절할 수가 있나. 사춘기가 진행 중인 아이는 분명 절대 오지 말라고 했을 게 뻔해 학교 측에 강사 이름을 밝히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었다. 합을 맞추는 악기 소리와 소란스러운 아이들의 소리가 교실 사이사이로 빠져나왔다.

시간에 맞춰 도착한 강연장에 숨을 고르고 모습을 드러냈다. 학생들의 환호 속에 익숙한 얼굴들이 보인다. 치킨을 시켜주면 다리만 쏙쏙 빼먹던 J. 글 쓰는 사람이라 손 다치면 안 된다고 엄마라 부르며 살갑게 간식거리를 대신 옮겨주던 S. 초등학교 때부터 M과 만화책방을 그렇게 들락거리더니 문창과까지 함께 진한학 K. 그 사이로 이제는 올려다봐야 할 눈높이로 훌쩍 자란 나와 남편의 첫사랑 M. 그 어떤 강연보다 긴장되고 짜릿했다. S의 쌍따봉 옆에 나는 봤다. 어깨와 함께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있던 M의 입꼬리를.





메이크업받은 게 아깝지만 속눈썹도 떼고 꼼꼼하게 지웠다. 따뜻한 차를 마시며 작은 캐리어에 꼭 필요한 물건들을 담았다. 나머지는 하와이에 가서 사지 뭐. 은경쌤의 전용기를 빌려 동기들과 하와이에 가기로 했다. 출판 작가가 된 이들도 있고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지만 우리는 꾸준히 글을 쓰고 있다. 각자의 색을 뽐내느라 바빠 소홀했던 단톡방이 브런치작가 데뷔 후 그때처럼 모처럼 활기차다. 늦지 않게 도착하려면 지금은 출발해야 한다.

아차차, 노트북을 빼먹을 뻔했다!




(이미지출처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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