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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 날 생일입니다

2023년 11월 16일을 사는 나에게

by 은빛영글

오늘은 제 생일이에요.

일기를 쓸 때 '오늘은' 이라고 쓰지 말라던데, 생일이니까 한 번 봐주세요.


나이 먹어 갈 수록 생일에 의미를 부여하진 않지만, 오늘은 좀 기록하고 싶었어요.

국민학교 때였던가 생일날 등굣길에 첫눈이 내렸어요. 손바닥에 닿으면 바로 녹아버려 쌓일 새도 없이 사라졌지만 하늘에서 반짝이는 선물을 받은 것 같아 설레었던 기억이 나요. 30년 정도 지난 오늘은 오후부터 내린다던 비가 아침부터 쏟아지고 있네요. 시험장에 자녀들을 들여보낸 부모님들이 비는 제대로 피하고 계실지 괜스레 걱정이 돼요. 수능 한파라고 했었는데 최근에는 날이 많이 따뜻해져 그런지 눈 대신 비가 내리고 있어요. 지구 온난화 때문일까요? 신발이 젖는 건 싫지만 그때 내리던 눈이 비로 내리고 있는 것 같아 오래된 친구를 만난 듯 반가운 마음도 조금 있어요.




머리가 조금 굵어지고 나서는 이 즈음이 수능이라 삼 남매가 자라던 집이었기에 몇 년은 미역국을 못 먹었어요. 심지어 고3 때는 생일 다음 날이 수능이었어요. 그다지 미역국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라 속상하진 않았지만 뭔가 아쉬운 마음이 들긴 했어요. 하지 못하게 하면 더 하고 싶은 간사한 마음이었나 봐요. 앞으로 최소 몇 년은 가뿐하게 미역국을 먹을 수 있겠지만 생일 미역국을 볼 때면 수능 생각이 나요.

어제 저녁 퇴근 후 남편이 미역국을 끓여 줬어요. 결혼 12년 만에 처음 받는 선물이에요. 비비고 미역국이라도 한 번 끓여줘 봐라 했었는데 블로그 보고 유튜브 보며 끓여 주는 모습이 고마웠어요. 무려 한우를 넣은 미역국이라고 생색을 내더라고요. 저는 참치 캔 까서 끓여줬었 거든요. 모처럼 꽃다발도 사서 꽂아 놨어요. 웬 꽃이냐고 묻길래 남편이 사줬다고 했어요. 꽃다발 받고 싶다고 몇 년을 말하는데 한 번을 안 사주더라고요. 그래서 남편 카드로 꽃다발을 사다 꽂았어요. 누가 사 오면 어때요, 결제만 남편이 해주면 남편이 사 준거죠. 남편이 멋쩍어하네요. 미역국을 데워 아침 상을 차리는데 라디오에 온통 수능 보러 가는 자녀를 둔 부모님들의 사연이 가득했어요. 응원하고 미안해하고 오열하며 보냈다는 사연들 속에 그중에 오늘 생일인 아이도 있겠지 싶어 내적 동질감이 느껴졌어요. 아침은 안 먹거나 간단하게 먹는 편이라 흰 쌀 밥에 미역국 하나만 내놓고 너희들도 시험 끝나고 따뜻한 미역국 맛있게 먹으라고 응원했어요.


남편 찬스 아침 이에요


저희 엄마가 저를 낳던 시절에는 통금이 있었나 봐요. 새벽에 진통이 왔는데 통금이 풀리기 전이랬나 직후랬던가 무튼 길거리에 사람도 없고 구급차도 올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부풀어 오른 배를 움켜쥐고 무작정 밖으로 나갔댔어요. 마침 지나가던 야채 트럭이 있어 부탁을 해 병원 문을 두들길 수 있었대요. 하마터면 야채 트럭에서 너를 낳을 뻔했다고 40년 넘게 매년 말씀하세요. 차에서 진통을 겪은 적 있어서 이제야 그 마음 알 것 같아요. 출산은 두 번째였지만 어린 첫 째는 자고 있었을 테고 얼마나 무서웠을지 조급했을지 매 년 하는 이야기라고 대충 듣던 지난 생일날이 미안해지네요. 태어 날 아기의 성별을 미리 알고 있었는지 그런 건 잘 모르겠어요. 남편을 쏙 빼닮은 둘째 딸을 품에 안고 안도했을 엄마를 상상해 봤어요. 고마워.




아이를 낳고 보니 미역국은 나를 위한 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어요. 좋아하지 않던 미역국은 이제는 아주 맛있게 먹을 수 있게 됐고요. 심지어 출산 후에는 몇 달 먹어도 질리지도 않더라고요. 저 사실 미역국 좋아했었나 봐요.

생일이라고 친구들과 약속을 잡기보다는 출근을 하고 육아를 하며 일상을 살아 가요. 언젠가 병원이나 쇼핑몰 같은 곳에 기록해 둔 인적사항 덕분에 축하 문자가 많이 와요. 외롭지 않네요.

매 년 많은 것이 바뀌지만, 생일날 아침마다 엄마 아빠가 보내주는 문자라든가 전화는 바뀌지 않아요. 소녀 감성인 엄마랑 살고 계셔 그런지 오늘은 단톡방에 아빠가 감성 한 스푼 담아 메시지를 보내 주셨어요. 낯 간지럽게 엄마 이름까지 적어서 보내셨어요. 엄마도 질세라 축하 메시지를 덧붙여 주셨어요. 성의 없이 이모티콘으로 대답한 무뚝뚝한 딸이지만 한결같은 두 분 덕에 춥지 않아요.



수능이 끝날 시간 즈음엔 비가 그쳤으면 좋겠어요. 집에 돌아가는 그들의 모든 길이 따뜻하길 바라는 마음이 들어요.

퇴근길에 맥주를 사들고 침대에 누워 마시다 널부러져 잠들어야겠어요. 4캔에 만원 짜리 말고 1캔에 4천 원 넘는, 묶음 할인 안 되는 걸로 골라 사치 좀 부려 볼게요. 그거면 충분해요.



(대문 이미지 출처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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