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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 오는 날, 갈 길 잃은 우산

by 은빛영글

갑자기

그렇죠, 첫눈은 본디 갑자기 내리는 거죠.

네, 갑자기 눈이 내렸어요. 그러고 보니 아침 라디오에서 첫눈 이야기를 들은 것 같아요. 출근길 스쳐 지나가던 꼬맹이들도 눈 이야기를 했던 것 같아요. 이제야 생각나네요. 첫눈 이야기에 카톡방이 바쁘게 울려대요. 나이를 먹어가도 첫눈은 반가운 소식 같아요. 물론 하늘에서 쓰레기가 내린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지만요. 그게 뭐가 중요한가요. 눈이 내렸어요.




사무실 창문을 열어보니 얼핏 봐도 꽤 많은 눈이 내리고 있었어요. 다행인 건지 바닥에 쌓이지는 않았지만 등굣길에 모자 없는 잠바를 입고 나갔던 아이의 뒷모습이 생각나 조금 걱정이 됐어요. 우산도 없는데 안경이 얼룩지면 불편하겠다 싶었어요. 10살도 안되던 나이부터 안경을 써왔기에 그 불편함을 너무 잘 알고 있거든요. 다시 보니 바람도 제법 불었어요. 바람에 날리는 눈발을 보니 점점 초조해졌어요.

퍼뜩 사무실이 아이 학교와 가까우니 우산을 가져다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점심시간을 쪼개 다녀와야 하는 거라 살짝 내적 갈등이 있었지만 우산을 들고 찾아갔어요. 엄마라면 고민 따위 없이 움직였어야 했을까요? 우산이 있어도 눈 맞는다고 안 쓸 것 같은 아이를 둔 배고픈 K 직장인이라 내적갈등 조금 했어요. 가는 길에 눈이 비로 조금씩 바뀌길래 아이들은 아쉬워하겠지만 우산을 가져오길 잘했다 싶었어요. 비록 손은 많이 시렸지만 셀프 칭찬 하며 마음 따뜻하게 학교로 향했어요. 그런데 비가 점점 가늘어지고 줄어드네요? 뭔가 불안했어요.


몇몇 아이들이 이미 비가 되어버린 눈의 흔적을 좇으며 젖은 운동장에서 뛰어다니고 있었어요. 알록달록한 패딩을 입은 초등 1학년 삐약이들이 하교 준비를 하고 있었어요. 혹시 낯익은 얼굴이 있을까 싶어 열심히 두리번거렸지만 찾을 수 없었어요. 우산이 없어도 되겠다 싶어 민망한 마음을 우산과 함께 접어 교문을 빠져나왔어요. 사무실에 돌아가야 하니까요.



1학년 아이들의 패딩처럼 알록달록한 간판의 타코 집이 눈에 띄었어요.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가 사무실에서 먹으려고 타코 하나를 주문했어요. 사실 부쩍 살이 붙어 점심을 좀 덜 먹어야 하기도 하고 밥때를 놓쳐 출출함이 가셨지만 알 수 없는 허탈함을 채워주고 싶었어요. 기다리는 동안 옆에 놓인 우산을 보니 뭔가 그 모습이 저를 닮은 것 같았어요. 점심을 못 먹은 건 타코로 채울 거고 우산을 안 써도 되는 건 아이가 젖지 않은 거니까 이 정도면 나쁘지 않다 생각했어요.


사무실에서 꺼내 본 타코의 모습은 사라다빵 같기도 하고 양배추가 가득한 것이 덜 찔 것 같은 위안도 생겼어요. 예전에는 타코에서 암내 같은 향이 나서 별로였는데 요즘엔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없는 게 아쉬울 정도로 종종 생각났었거든요. 입맛은 계속 바뀌니까요.

그래, 다이어트는 원래 내일부터지! 뜨거운 커피를 타서 우아하게 먹고 싶었는데 한 손으로 드는 순간 양배추가 와르르 바닥에 쏟아져 내렸어요. 허겁지겁 닦아 내고 입에 잔뜩 욱여넣었어요. 이렇게 추잡스럽게 먹어야 하는 음식이었나 의문스러웠어요. 그래도 맛은 괜찮았어요. 양이 많지 않아 보였는데 다 먹고 나니 기분 나쁘게 배가 불렀어요. 맛있는 걸 먹고 기분 나쁜 배부름이라니.



아이에게 전화가 왔어요. 아이 친구들의 행복한 비명 소리가 먼저 들려 왔어요. 눈이 내리고 있대요. 아니, 비도 섞여 내리고 있대요.

어떡하죠?




(대문이미지 출처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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