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창작과 입학 실기 시험에서 ‘화면을 보며 통화할 수 있는 전화기가 생긴다면 어떻게 광고할 것인지 작성하시오’라고 쓰여있는 문제를 받아본 적 있다. 삐삐나 PCS가 고작이었던 즈음이라 획기적이고 낯선 문제에 무슨 만화책에서나 볼법한 이야기냐며 코웃음을 쳤었다.
집 전화나 공중전화로만 소통하던 때가 있었다. 짝사랑하는 친구 집에 전화해 부모님이 받으면 뜨거운 불에 손을 덴 듯 화들짝 놀라 끊고 그가 받으면 수줍게 인사를 건네었을 것이다. 공중전화에 산더미처럼 쌓아놓았던 동전을 바쁘게 밀어 넣으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겠지. 그런 이들을 은밀하게 연결해 줄 전서구가 생겼으니 허리춤에 달린 작은 삐삐에 진동이 오면 음성 메시지를 확인하려 공중전화를 찾아 길게 줄을 서는 이들이 많아졌다. 주머니 속 동전은 짤랑대지만 길게 늘어서 있는 줄에 뒤통수가 따갑고 마음이 초조했을 테다. 덕분에 공중전화 근처에서만 사용 가능했던 시티폰이 만들어졌다. (이거 알면 옛날 사람) 근거리에서만 사용 가능하고 통화품질이 좋지 않았기에 이동 중에도 사용 가능한 PCS폰이 만들어졌고, 일명 벽돌폰이라고 불렸던 그것은 생긴 것 마저도 군대에서 사용되던 무전기처럼 크고 투박해 무겁기까지 했지만 부의 상징처럼 느껴졌다. 통신사들마다 각자 휴대폰을 내놓기 시작하고 보급화되니 부의 상징은 무식한 크기와 덜떨어진 기능에 외면받기 시작했다. 휴대성을 살리고자 점점 크기는 작아졌지만 반면 그 안에서의 기능은 증폭됐다. 전화를 걸거나 받기만 가능하고 문자 메시지 보낼 때도 상대방의 번호를 직접 입력해야만 하는 수고스러움이 있었다. 텍스트 양을 조절해야만 전송이 가능했던 초창기와 달리 지금은 여러 명에게 한꺼번에 심지어 이미지까지 첨부한 장문의 메시지도 전송이 가능하다. 지하에서는 안테나 수신이 되지 않아 연락이 안 된다고 애인에게 걱정을 사고 나를 못 믿냐며 싸우는 경우가 왕왕 있었을 텐데 이제는 와이파이가 잡히지 않으면 무선데이터로 통화는 물론 인터넷까지 사용 가능하니 더 이상 상대방을 기만하는 방법은 통하지 않았다. 글을 쓰고 말을 배우는 것보다 스마트폰 작동에 더 빨리 눈을 뜬 요즘 아이들의 “엄마 아빠는 기와집에 살았어, 초가집에 살았어?”라는 질문에 “아파트에 살았는데”라고 대답을 하면 그때도 아파트가 있었냐고 경악을 한다. 이런 반응이 이상하지 않을 만큼 정성스럽게 누군가와 소통하고자 했던 불과 십여 년 전의 사람들은 근현대사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세상을 살았다.
빗자루로 청소를 하고 손걸레가 마무리를 지었지만 청소기가 나타나 무릎을 구부리지 않아도 온 집을 깨끗하게 청소해 준다. 물론 아무리 그래도 걸레질은 손걸레가 깨끗하게 닦인다는 어른들의 말씀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바쁜 세상 내가 직접 하지 않아도 시간 되면 로봇청소기가 돌아다니며 먼지도 빨아들여주고 걸레질도 해 준다는데 마다할 필요 있을까? 세탁기에 엉킨 빨래들 마저 알아서 말려 준다는데 문명의 혜택을 즐기지 않을 이유가 없다.
집안일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실수 없이 매뉴얼대로 치킨을 튀겨주는 로봇이 만들어져 동시다발적으로 마구마구 치킨을 튀겨낸다. 로봇 사용에 드는 초기 비용은 치킨 튀기는 직원의 몇 달 치 월급 정도면 커버가 된다고 하니 업주 입장에서는 불만 많은 아르바이트생을 쓰는 것보다 로봇을 사용하는 편이 더 이득일 수도 있겠다. 지도에 미처 표시가 안된 길에 들어섰다 길을 잃을 일도 없고 잘못된 길에 들어갔다고 화를 낼 필요도 없다. 앞 쪽에 사고가 발생했으니 우회하라고 방금 일어난 일까지 빠르게 알려주는 친절한 목소리의 내비게이션은 호젓한 국도에서 맛집 추천까지 해준다. 자율주행 자동차가 졸음운전 예방도 해주고 주차 보조까지 해준다니 나 같은 사람에게는 두 손 두 발 다 들고 환영할 일이다. 키오스크 주문방식이나 서빙로봇은 이제는 너무 흔해 익숙하기까지 하다.
개인적으로 번거롭고 수고스러운데 만족감까지 떨어져 요리라는 행위를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요리보다 설거지는 더 싫어한다. 손에 묻는 미끌미끌한 음식 찌꺼기들과 불쾌하고 딱딱하게 굳어 들러붙은 밥풀은 신발 바닥에 붙은 껌을 떼어내는 것만큼 쉽지 않다. 결제까지 많은 고민을 했지만 집에 불이 나면 식기세척기를 들고 뛰어내려 갈 거라고 우스갯소리를 할 정도로 만족감이 높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식기세척기에 음식물 분쇄기능까지 있어서 한 번에 다 해결해줬으면 하는 욕심이 있는데 빨리 개발해줬으면 한다.
인간의 삶을 통제하는 시스템은 빠르고 편하게 진화하고 있고, 반면 인간은 퇴화하는 것 같다. 분명 그 문명을 진화시키는 것은 인간인데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언젠가 봤던 SF 영화 속 세상처럼 멀지 않은 미래에는 인공지능들이 인간에게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까 하는 상상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손바닥만 한 스마트폰을 떨어뜨려 액정 화면이 깜깜해지기만 해도 눈뜬장님 마냥 바보가 되어 버린다. 당장 출근길 날씨 검색에 버스 배차 시간 정보까지 불편한 일 투성이다. 은행 업무라도 봐야 할 게 있었다면 수고스럽게 번호표를 뽑고 은행에 틀어놓은 지루한 뉴스만 멍하니 바라봐야 함에 서비스센터에 빨리 가고 싶어 진다.
인간이 게을러질수록 문명은 발달한다고 하던데 아무래도 그 문명을 발달시키는 인간은 문명이 발달하는 만큼 스스로 바보가 되어가는 길을 택한 것도 같다. 스스로 생각하기를 멈추고 알고리즘의 열일에 노예가 되어 내가 생각하는 세상보다 알고리즘이 만들어 준 세상에 깊게 빠져들어 간다. 가끔은 그가 보여주는 세상이 ‘나’인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해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을 구매할 때도 있다. 이런 흐름을 거스르며 자연인이 되겠다고 산속으로 들어가는 일 따위는 하고 싶지 않다. 핸드폰으로 손가락만 몇 번 움직이면 밤늦게라도 음식이 배달되고 다음 날 필요한 물건들을 출근 전까지 배달해 주는 세상을 마다할 이유는 없다. AI가 말도 걸어주고 대답도 해주는 데다 티비도 틀어주는 세상이지만 그럼에도 인간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세돌과 인공지능의 바둑 시합에 많은 사람들이 집중했던 것도 누가 우위에 설 수 있을까 싶은 인간의 자존심을 건 대결이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감히 추측해 본다. 입력된 매뉴얼대로 행동하고 소프트웨어 업데이트가 고작이겠지만 지치지 않는 그들을 위해, 고작 기름칠이나 해주는 게 전부인 사람으로만 살아가고만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랬군요’, ‘잘 모르겠어요’ 따위의 앵무새 같은 반복된 주절거림이 아니라 상대방의 마음을 읽고 헤아려줄 수 있는 소소한 차이를 잡아 끌어낼 수 있는 내면의 힘을 키우는 게 생산적인 인간일 것이다.
쓰다 보니 생각보다 거창해져 식기세척기에서 꺼낸 냄비에 기름이 덜 닦여져 쓰기 시작한 글이라고는 말 못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