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에 밀려 쓸려가듯 아이들이 하나씩 교실로 사라지면 다소 소란했던 로비가 한순간 조용해진다. 정적은 잠시일 뿐 창문 너머로 각자의 아이를 확인 한 부모들은 그제야 안심하고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자리를 잡는다. 북적댔던 대기실은 엄마들의 사랑방으로 탈바꿈한다. 그 분위기가 어색한 몇몇의 아빠들은 주차장으로 나가거나 구석에 앉아 스마트폰을 꺼내 보던 드라마를 마저 보기도 한다.
"그 얘기 들었어?"로 시작되는 목소리에 무슨 재미있는 이야기인지 귀가 쫑긋 선다. 학교 앞에 불량 학생들이 돌아다닌다는데 워킹맘이라 아이 혼자 다녀야 한다고 걱정이 한가득이다. 같은 워킹맘으로 그 맘 이해도 된다 싶어 소리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옆 집 아저씨가 만취 상태로 귀가하다 택시에 핸드폰을 놓고 내려 쌩 돈을 날렸다고 한다. 밤새 부부 싸움 하는 통에 잠을 설쳤다고 얼굴도 모르는 옆 집 부부 흉을 본다. 제정신에도 싸우기 힘든데 만취 상태인 남편과 싸우다니 굉장하네 싶었다. 우리 고향에서는 김치 안 먹는데 김장 때마다 간을 못 맞춰 혼난다고 억울한 마음을 토해내는 목소리도 들린다. 그러고 보니 저 엄마 몽골 사람인데 김치 맛 모르는 게 당연하지. 우리는 김장이 언제더라? 일정을 확인해 본다. 둘째 논술 학원 상담을 받았다는 소리가 들려오자 쫑긋 대던 레이더가 반대쪽으로 돌아간다. 그 학원이 어디냐고 묻고 싶다. 레벨 테스트를 받았는데 턱걸이로 들어갈 수 있게 됐다고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큰 애 옷이 작아져 옷을 사야 된다고 중얼대며 중고 판매 앱을 뒤지느라 손가락이 바쁜 엄마에게는 작아진 옷 물려줄 수 있냐고 하고 싶다. 주말에 같이 나들이 가면 어떻겠냐고 장소를 정하더니 도시락 메뉴를 정한다. 어떻게든 바깥세상으로 나가고 싶지만 장소만 바뀐 육아라는 걸 너무 잘 알기에 쓴웃음이 지어진다. 혹여 신랑 일찍 들어오면 엄마들끼리만 시원하게 맥주 마시러 가자고 약속 잡는 이들도 있다. 그렇지, 맥주는 언제나 옳아. 갈증이 나 마른침을 꿀꺽 삼켜 본다.
언니의 수업 시간은 어린 동생들에게는 나의 기다림보다 더 길게 느껴지겠지. 동생의 보챔에 아이의 엄마는 대화가 끊길세라 급하게 스마트폰을 쥐어준다. 작은 손에 쥐어진 그것은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바닥에 떨어진다. 난리 난 티라노 엄마의 모습 앞에 주눅 든 생쥐 같은 아이에게 가방 속 뽀로로 비타민이라도 몰래 쥐어줄까 멈칫했던 손은 갈 길을 잃은 길고양이처럼 허공을 매만진다. 엄마가 아직 도착하지 못해 혼자 기다리다 옷에 우유를 쏟은 아이에게 휴지를 꺼내줄까 싶던 찰나 후다닥 화장실 휴지를 뜯어와 깔끔하게 뒤처리를 하는 아이의 재빠름에 감탄한다. 나의 오지랖은 그다지 용기 있지 못하다.
오늘 일이 많았어서 피곤하다는 핑계로 슬며시 눈을 감아 본다. 쉬는 시간 운동장 아이들의 외침처럼 가득 채운 소리들이 아득해진다. 아이들 교육 정보, 학교 소식부터 시시콜콜한 저녁 식사 메뉴, 그네들의 집안 이야기까지 들려오는 이곳은 우리의 사랑방이고 빨래터다.
소란함에 생기가 가득해 즐겁기까지 하다.
날 때부터 내향성 인간이었는지 때로는 이런 소란스러움이 나를 잡아먹는 것 같아 지치기도 한다. 괜스레 말을 보탰다가 실수라도 했나 밤 새 뒤척인 적도 많았다. 친구가 없어 고민이라는 둘째에게 친구를 만들어 주려면 엄마인 내가 더 적극적이어야 할 것 같지만 애써 모른척한 채 네 앞길은 네가 알아서 헤쳐나가라고 응원만 하는 현실이다. 일하는 엄마라는 핑계로 다른 엄마들과 소통이나 정보력이 부족해 이럴 때 인사도 하고 맞장구만 쳐줘도 될 텐데 그냥 그들의 해소하는 시간을 존중만 해주기로 한다.
불편한 소란함이다.
부지런히 준비해 아이를 데려왔지만 주차장에서 일부러 꾸물대다 천천히 들여보낸다. 빈자리가 없네 라는 핑계로 끼어 앉자는 그들의 엉덩이를, 편하게 앉으라는 말과 함께 다시 펼쳐 준다. 어쩌다 한 마디 씩 참견할 수 있는 딱 그만큼 떨어 곳에 겉옷을 내려놓고 책을 꺼낸다. 스마트폰이 아닌 책을 꺼내는 모습에 낯섦이 비친 엄마들의 눈빛은 바쁘게 하던 이야기로 금세 돌아간다. 빨래터 끝 자락에 앉아 가끔 한 마디씩 거들며 조용히 방망이를 두들겨대듯 그들의 호흡에 한 번씩 걸쳐준다. 가끔 책이 안 읽히거나 눈물 흘리며 웃어대는 그들의 이야기가 궁금해지면 책을 덮고 슬며시 다가가기도 한다. 소머즈의 귀가 되어 레이더를 돌리고 적당한 타이밍을 노리지만 보통은 그냥 혼자 있기로 했다.
친구관계에서 적극적이지 않은 둘째의 모습은 어쩌면 이런 나의 모습인 것 같아 미안한 생각이 든다.
책도 읽냐고 놀라던 엄마가 어느 날 가을 낙엽 떨어지 듯 내 옆에 앉아 책을 꺼내 보여준다.
"저도 책 빌렸어요."
반가운 마음에 가방을 몸 쪽으로 끌어당겨 자리를 만들어 준다.
왕따에게도 친구가 생겼다.
(이미지 출처 : 픽사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