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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 청소와 글쓰기의 상관관계

그 숭고함과 쓸쓸함에 대하여

by 은빛영글

빨래. 청소기, 걸레질, 설거지 다 싫지만 단연코 최악은 화장실 청소

미룰 수 있는 만큼 미루다 변기 옆에 잔뜩 튄 노란 얼룩이 끈적이고 비 오는 날 한층 짙어진 분홍 물 때의 냄새가 견디기 힘들어지면 겨우 몸을 일으켜 화장실 문을 연다. 공간 가득 널려있는 물건들을 세숫대야에 차곡차곡 담는다. 가족들의 칫솔을 양치컵에 한가득 눌러 넣고 몸이 빠져나온 이불처럼 잔뜩 엉켜있는 머리카락을 하수구 구멍에서 건져 올린다. 세숫대야가 제법 무거워지면 중요한 수술이라도 하듯 사뭇 진지하게 고무장갑에 손을 쑤셔 넣는다.


찬바람에 지퍼를 턱 밑까지 채워 올리게 될수록 이불속 포근함은 강렬해진다. 요란하게 울려 대는 알람에 내 가슴팍에 다리를 올리고 자고 있는 아이가 깰까 서둘러 종료 버튼을 누른다. 한참의 내적 갈등 끝에 조용히 새벽반 글쓰기 모임에 고개를 들어 본다. 책상 위 가득한 물건들을 힘껏 밀어 놓고 멀티탭을 꺼내 전원을 연결한다. 부팅이 되는 동안 까만 모니터에 비친 얼굴을 차마 보기 힘들어 후다닥 뜨거운 물에 커피를 타 본다. 차갑게 식은 몸에 퍼지는 카페인의 뜨거움이 엉겨있는 잠을 녹여 내린다. 일상을 소재로 채워 넣는 요즘 노트북이 제법 풍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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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 온 날 봤던 것과 같은 날 것 그대로의 화장실에 물을 뿌리고 락스를 잔뜩 뿌린다.

그렇게 잠시 기다린다.


마우스에 조심히 손을 올려 워드 파일을 열어 놓는다. 하얀 화면을 보며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신다.

잠시 멈춘다.



분홍 물 때가 낀 타일과 거뭇한 곰팡이가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줄눈을 있는 힘껏 문질러 본다. 어제 내게 못된 말을 했던 사람을 생각하며 손에 힘을 잔뜩 준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방치했나 싶어 스스로 반성하지만 내일의 나는 또 미루겠지. 단순 노동은 생각을 비우기 좋다는데 바닥과 벽을 솔질하는 동안 생각이 더 많아진다. 문지를수록 일어나는 거품처럼 잔뜩 채워진다.


머릿속에 가득 찬 생각들을 빠르게 때로는 느리게 움직이는 손가락의 박자에 맞춰 꺼내어 본다. 모니터 안으로 옮겨 썼다 지웠다 움직였다 멈추기를 반복한다. 깊은 곳에 있던 기억을 끄집어 내 담고 싶지만 너무 흐릿해 그저 의미 없는 몸부림일 뿐이다. 일기라도 열심히 쓸 걸, 사진으로 남겨 놓을 걸. 발전 없는 후회로 화면을 채워진다.



시원하게 물줄기를 뿌린다. 뿌리고 문지르고 구석구석 닿지 않는 곳이 없게 꼼꼼하게 물기를 닦아낸다. 오늘의 노동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퇴고 퇴고 퇴고 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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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의 마무리는 담아 두었던 물건들을 꺼내 제 자리에 두는 것이다. 누구 하나 대신 해주지도 않고 알아주지도 않지만 나름의 숭고한 작업. 마저 자리를 채우면 환풍기 버튼을 눌러 마무리를 한다.


길고양이 마냥 누가 볼 새라 후다닥 사무실 프린터로 글을 출력해 작은 소리로 읽어 본다. 읽는 이 기다리는 이가 없기에 조금은 쓸쓸한 수도 있겠다. 발행 버튼을 눌러 마무리를 한다.


이 정도면 괜찮다.


오늘도 화장실 청소를 하고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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