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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빛영글 Aug 23. 2024

여름휴가 낮술 주의보

두근두근 움직이는 혈관의 속도는 1분 동안 50~100회가 정상 범위라고 한다. 50 이상 100이하라 면 그 범위가 상당하지만 채 미치지 못하거나 한참 뛰어넘는 경우가 제법 많기도 하다. 50과 100 사이, 그 어딘가에 나는 존재한다.

속도의 차이만 있을 뿐, 멈추지 않고 바지런히 움직이며 온몸 구석구석을 돌아다닌다. 그 성실함을 알아주는 이가 없어도 괜찮다. 묵묵히 제 할 일을 할 뿐이다.
평소답지 않게 달리기라도 하는 날엔 요란하게 존재감을 뽐내며 거친 숨을 토해낸다. 복날의 똥개처럼 헉헉대는 소리에 새삼 살아있음이 느껴지고, 심장이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느낌에 벅찬 희열을 느끼기도 한다. 이런 순간엔 어쩌면 나의 심박수는 100을 넘어섰을까? 반면 고요한 밤의 무게를 온몸으로 느끼며 현실에서 벗어나있는 순간은 곁에 잠들어있는 아이의 느릿한 쌕쌕 소리에 맞춰 종일 팽팽하게 당겨져있던 긴장의 끈을 풀어본다. 느릿느릿 움직이는 아랫배의 꿈틀거림과 온몸으로 퍼지는 여유로움을 느낀다. 어쩌면 그러는 동안에는 50 이하로 떨어졌는지도 모르겠다.
무엇이든 나였다. 같은 공간을 공유하고 있는 이들의 숨소리를 들으며 그들의 심박수를 가늠해 본다. 별다른 의미 같은 건 없다. 그저 그들의 숨소리에 내 숨소리를 맞춰가며 함께라는 느낌을 가져보는 것뿐이다. 혼자가 아님을 느낀다.


@언스플래시


유난히 뜨겁던 올여름, 온몸에 크고 작은 구멍에서 온통 땀을 토해내며 하루 종일 갈증을 느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만들어내던 얼음은 오도독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고, 주방에 서있는 것만으로 숨쉬기 힘들 정도로 괴로운 날씨였다. 땀을 잘 흘리지 않는 편이었음에도 허벅지까지 축축해진 기분은 꽤나 불쾌했다.  차가운 달이 하늘을 채우고 있는 동안에도 종일 달궈져 있던 공기는 도대체 식을 줄 모른다. 손이 닿는 모든 것을 익혀버리겠다는 듯이 밤새 뜨거울 뿐이었다.
하루 종일 에어컨 바람이 닿는 공간을 찾아 돌아야 했다. 뒷골이 당길 것 같은 청량함이 간절하다. 아직 갱년기가 아님에도 수십 번씩 끓어오르는 화기를 잠재워야 했다. 아니 어쩌면 다른 열감으로 그것들을 누르려 했는지도 모르겠다. 당장, 지금 당장.
 



특히 여름휴가 동안에는 아침부터 시작이다. 사실, 갈증은 핑계고 '휴가'라는 단어가 주는 여유로움을 느끼고 싶은 욕심이다. 고작 한 모금인데, 싶지만 한 모금의 위력은 굉장했다.  도화선 끝이 타들어가기 시작하면 속도를 걷잡을 수 없는 것처럼, 온몸이 녹아내릴 것 같은 뜨거운 날씨에 알코올을 한 방울이 내 안에 스며들면 그때부터는 멈출 수 없다. 한낮의 피의 움직임은 밤의 그것보다 빠른 속도를 내는 것 같다. 마치 절절하게 끓어오르던 청춘의 속도처럼.


@언스플래시


꿀꺽. 한 모금이 넘어가면 먼저 손발의 긴장이 풀리는 게 느껴진다. 요란한 알람 소리에 눈을 뜬 순간부터 티격태격 시끄러운 잠자리에서 이성의 끈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한결같았던 긴장감은 손발이 통통해지는 듯한 저릿함과 함께 느슨해진다. 시끄러운 자동차 경적소리 대신 졸졸졸 흐르는 물소리와 새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 한껏 게을러진 눈을 게슴츠레하게 뜬다. 노느라 정신없는 아이들 덕분에 바쁘게 식사를 준비할 것도, 영양소를 고민할 것도 없이 대충 간단하게 먹는 둥 마는 둥, 그저 순간을 즐길 뿐이다.
꿀꺽. 목젖이 한 번 더 흔들렸다. 손발의 긴장감이 풀리면 단단하게 뭉쳐져있던 어깨도 촉촉함에 자신의 무게를 털썩 내려놓는다. 핸드폰에 쌓여있는 읽지 않은 메시지의 숫자는 점점 커지지만, 그런 것쯤 잠시 미뤄둬도 괜찮으니까. 척추가 삐뚤어지면 좀 어때, 한껏 널브러진 자세로 살랑대는 머리카락의 춤사위를 느낀다. 이마가 간질거린다. 도시의 에어컨 바람과 다른 공기의 냄새를 깊게 들이 마시면 그걸로 충분하다.
꿀꺽. 온몸을 구석구석 돌았는지 머리끝이 쭈뼛거린다. 복잡한 고민들, 자기 비하, 플래너 가득 채워져있는 자음과 모음 따위 잊으라는 듯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준다. 괜찮아, 괜찮아. 잠시 잊어도 돼. 귓가에 속삭이고 다시 한번 머리카락을 토닥여준다. 게을러진 눈꺼풀이 천천히 감긴다. 모든 것들을 차단이라도 하겠다는 듯이 묵직한 움직임이다. 조금만 이러고 있자.


또르르. 가득했던 냉기는 차가운 물방울만 남기고 허공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여전히 곁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라도 하고 싶었는지 자신의 몸에 물방울을 남겨 두었다. 너도 곧 사라지겠지, 하는 찰나 또르르 또 하나의 물방울이 몸을 타고 내려온다. 툭. 무심하게 허벅지로 떨어지고, 금세 내 몸 안으로 스며 들었다. 그렇게 우리는 하나가 된다.




공중에 떠있는 기분이 나쁘지 않다. 어둠 속에서 은밀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조금씩 달궈지던 얼굴을 손으로 식히는 노력 따위 필요하지 않았다. 빨개질 테면 빨개지라지. 첫사랑과 마주한 소녀의 볼처럼 사랑스럽지는 않더라도 빨갛게 달아오르는 속도는 그녀의 속도 못지않다.  발가락 사이를 오가는 계곡의 차가운 물줄기는 체온을 올리려는  꽁무니를 잡아 식혀주었다. 따뜻하고 시원하다. 맑지만 몽롱하다.

"이게 바로 휴가지."

매미의 울음소리가 커지면 아이들의 재잘거림도 커진다. 마치 이제는 정신 차리라는 듯이.
꿀꺽. 어느새 빈 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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