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는 삶을 살아갑니다 / 2. 두려움 없이 망설임없이

2. 두려움 없이 망설임 없이 쓰는 삶을 살아갑니다

by 김희경 작가



이 책은 저자의 실제 삶에서 비롯된 기억과 감정, 그리고 그로부터 얻은 심리적 통찰을 바탕으로 구성된 에세이입니다. 등장하는 인물은 모두 사생활 보호를 위해 가명으로 처리되었으며, 실제 인물과는 일치하지 않습니다.


저자는 이 글을 통해 과거를 고발하려는 것이 아니라, 비슷한 경험을 한 이들에게 공감과 위로를 건네고자 합니다. 본문의 내용은 저자의 주관적 시각에 따른 해석이며, 법적 사실을 단정하거나 특정 인물을 지칭하기 위한 것이 아님을 밝힙니다.


이 책은 특정 인물이나 집단을 비방하거나 공격하려는 목적이 아닌, 개인의 성장과 회복의 여정을 기록하고, 유사한 경험을 한 이들에게 위로와 통찰을 제공하기 위한 진솔한 성찰의 기록입니다.


이 기록이 비슷한 경험을 가진 누군가에게 살아갈 수 있는 용기와 희망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2. 두려움 없이 망설임 없이 쓰는 삶을 살아 갑니다




나를 구하지 못했던 시간들, 인정 욕구의 시작


언제부터였을까. 나는 뭐든지 과하게 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누군가 도와달라는 말보다 먼저 손이 나갔고, 필요하다는 신호가 오기 전 먼저 마음을 내어주었다. 어쩌면 내 삶 전체가 누군가를 돕기 위한 구조요청 같았다. 그리고 정작, 나를 구하는 일엔 익숙하지 않았다.


언젠가 읽었던 글 중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홍수가 난 마을에 신앙심 깊은 남자가 있었다. 물이 무릎까지 차올랐을 때, 이웃이 차를 몰고 와 말했다. “어서 타요! 위험해요.” 남자는 대답했다. “괜찮아요, 하나님이 절 구해주실 거예요.” 조금 후 구조대가 보트를 타고 왔다. “지금 타셔야 해요!” 남자는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 “하나님이 구해주실 거예요.” 결국 그는 지붕까지 올라갔고, 마지막엔 헬리콥터가 도착했다. 하지만 그는 손을 뻗지 않았다. “하나님이 직접 오실 거예요.” 그는 익사했고, 천국에서 하나님께 항의했다. “왜 절 구해주시지 않았나요?” 하나님이 조용히 대답하셨다. “내가 차도 보내고, 보트도 보내고, 헬리콥터까지 보냈는데, 넌 그 어떤 것도 붙잡지 않았잖니.”

("The Drowning Man Parable", 구전 우화, 기독교 설교 및 자기계발 예화로 널리 인용됨)



이 우화를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이상할 정도로 오래 그 이야기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돌아보면, 나 역시 늘 누군가의 구조 요청엔 달려가면서 정작 내게 다가온 손길은 외면한 채 살아왔기 때문이다. 어릴 적 나는 늘 가난에 시달렸기 때문에 공부를 못한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하나님은 분명히 많은 손길을 내게 보내셨다. 문제는 그 손길을 한 번도 나 자신에게 허락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나는 내 삶을 살지 못했다. 누군가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시간을 썼고, 돕지 않아도 되는 사람에게조차 "하나님의 뜻"이라는 이유로 내 것을 내주었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 나는 다시 바닥으로 돌아갔다. 자발적인 소진, 익숙한 희생. 나는 무의식적으로 '가난한 자리'를 내 위치로 정해두고 있었다. 도움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믿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어야만 사랑받을 수 있다고 믿으며 살아왔다. 그리고 그 위치와 모습 그대로 시어머니와 관계 속에서 다시 과거가 반복됐다.


나는 늘 ‘안전기지’를 찾아 헤맸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의 가족과도 함께 웃고 싶은 상상을 했다. 함께 밥을 먹고, 명절을 보내고, 이름 없는 애정을 나누는 그런 소소한 장면들을 꿈꾸며 나의 가족을 기다렸다. 그건 나에겐 평범한 미래가 아니라, 오랫동안 꿈꿔온 회복의 장면이었다. 사랑받는 며느리, 따뜻한 딸. 그렇게 불리는 것이 내 유일한 자격증처럼 느껴졌기 때문에, 관계가 시작되면 조심스럽게 그의 가족과도 교류를 시작하곤 했다. 그러다 여러 번 연애에서 실패하고 지금의 남편을 만났고, 이번만큼은 서두르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대학원 1학년이던 어느 날, 남편의 부모님이 나를 보고 싶다고 하셨다. 당황했지만, “나를 소중하게 생각해주시는구나.” 싶어 만남에 응했다. 그 만남이 오늘의 나를 만들게 될 줄은, 그땐 정말 몰랐다. 나는 아직 ‘여자친구’였지만 이미 ‘며느리 역할’을 감당하기 시작했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원해서가 아니라 어머니의 반복적인 호출 때문에 시작됐다. 김장철이 다가오면, 몇 달 전부터 매일같이 전화와 문자가 이어졌다. 처음엔 잘해주셔서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해 주셨구나.” 싶어, 기쁘고 감사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알았다. 하나님이 어머니를 통해, 어린 시절의 미해결 과제를 다시 마주하게 하셨다는 것을. 어머니는 내 어린 시절 어머니와 너무도 비슷했다. 잘해주실 땐 혼이 빠질 정도로 따뜻했고, 기분이 나쁘실 땐 차가운 말들과 고성으로 나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온탕과 냉탕을 오가는 그 관계 안에서, 나는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가 있었다.


심리학에서는 이런 관계를 ‘불안정한 애착’이라고 부른다. 사랑이 예측되지 않을 때, 사람은 오히려 그 불확실성에 중독되기도 한다. “언젠가는 괜찮아질 거야.” “이번엔 다를지도 몰라.” 그 희망 하나로, 나는 다시 그 자리에 남았다. 좋았던 기억이 있어서일까.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죄책감이 밀려온다. 어머니의 웃는 얼굴, 따뜻한 밥상, 다정한 말들이 불쑥 떠오르고, ‘그래도 좋은 분이셨는데’ 하는 마음이 고개를 든다. 하지만 나는 이제 안다. 좋은 순간이 있었다는 사실이 나의 고통을 지우는 면죄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 감정이 정리되지 않은 채 이 글을 쓰는 건 여전히 어렵다. 그리고 지나온 시간들을 되짚는 일은, 마치 뾰족한 돌을 맨발로 밟으며 걷는 것처럼 아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나처럼 자기 자신을 구조하지 못한 채 살아온 누군가에게 이 이야기가 작은 빛이 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사랑의 조건, 역할의 대가

― 안전 기지를 갈망했던 나, 그리고 반복된 인정의 덫


어머니는 김장철이 되거나 내 도움이 필요할 때가 되면 언제든지 불러 사용할 수 있는 도우미처럼, 무료로 나를 사용하셨다. ‘아들의 여자 친구니까 미리 시부모님께 잘 보여야 하지 않겠냐’는 생각에서였는데, 실제로 어머니는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친구들이 그러더라. 결혼 전부터 잘 잡아야 한다고. 결혼 후엔 달라질 수도 있잖아. 그러니까 미리서 봐야지.”


어머니는 그렇게, 자신의 행동을 ‘친구들’의 조언으로 정당화하셨다. 그리고 나를 정서적, 언어적으로 학대하실 때마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그 ‘친구 분들’을 자주 언급하셨다. 그래서 나는 오늘날에도 어머니의 친구 분들을 매우 싫어한다. 진짜 문제는 어머니의 필요가 너무 많았고, 그것이 점점 더 잦아졌다는 것이다. 게다가 어머니와 함께 있으면, 몇 시간에 한 번씩 기분이 달라지셔서 마음이 매우 불안했다. 그럼에도 나는 그 느낌이 너무 익숙하고 편안해서(당연해서) 참고 견디면서, 어머니께서 다시 기분이 좋아지시길 간절히 바라며 기다렸다.


어머니께서 내게 무엇인가를 요구하시는 때는 늘 학교 중간고사, 기말고사, 혹은 모의고사 기간이었다. 내가 다녔던 대학원은 2개월에 한 번씩 모의고사를 치르기 때문에, 성적과 미래를 생각하면 외부 활동은 반드시 내려놔야 했다. 학교 수업도 들어야 하고, 외부 강의도 들어야 하며, 실제 시험 전까지 모의고사를 세 번은 봐야 하는 일정 속에서 시간과 체력이 늘 부족했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마치 이미 내가 변호사가 된 사람처럼 혹은 내가 변호사가 되든 말든 상관없이 “일단 아들의 여자 친구이기 때문에” 내가 모든 것을 다 해드려야 한다고 여기셨던 것 같다. 지금 돌아보면, 내가 어머니를 멀리하려고 할 때마다 어머니는 맛있는 음식을 해주셨다. 정서적 학대를 한 직후에도 울며 집을 나선 내게 직접 만든 닭죽을 들고 학교까지 찾아오셨다.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후버링(Hoovering)’이라고 부른다. 후버링은 관계에서 통제력을 잃을까 두려운 사람이 상대방의 죄책감이나 애착을 자극해 다시 관계로 끌어들이는 조작적 행동이다. 진공청소기처럼 상대를 빨아들이려는 이 심리적 조작은 단절과 회복을 반복하면서 상대를 더욱 약화시킨다. 어머니는 그렇게, 감정의 고리를 움켜쥔 채 내가 ‘다시 돌아오게끔’ 만드는 방식으로 나를 붙들었다. 그리고 어머니는 내가 자신을 잘 보필하면 그것이 곧 가정교육을 잘 받은 증거처럼 느껴지게 하셨다. 나도 모르게 그 마음에 들기 위해, 나는 어느 순간부터 나 자신을 완전히 내려놓고 있었다. 그 시기 내게는 어머니 말고도 각자 자기만의 기준으로 나에게 특정한 역할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많았기에 정말 버거웠다. 지금 생각해도 어떻게 사람들이 그렇게까지 할 수 있을까 싶다. 그리고 그들에게 ‘착하다’는 말이 곧 이용하기 쉬운 사람이라는 뜻이라는 걸 그때는 몰랐다.


어머니께서 요구하시는 역할을 하고 나면, 어머니는 정말 따뜻하게 나를 환대해 주셨다. 따뜻한 밥, 웃음, “네 덕분에 살았네.” “사람들이 네가 해준 것들 보면 내가 복을 많이 받았다며 부러워한다.” 그런 말들을 들을 때면 나는 마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만능감, 인정, 기쁨들이 마음 안에 휘몰아쳐서 황홀했다. 그 시절의 나에겐 그 말들이 큰 위로였고, 커다란 보상처럼 다가왔다. 하지만 문제는 내가 그 역할을 하지 않았을 때 벌어졌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내게 차갑고 아픈 말들을 골라서 하셨다. 그 말들이 지금도 마음 깊은 곳을 찌른다. 가령, “안할 거면 아들이랑 헤어져.” 같은 말들이다. 그 말을 들은 순간, 마치 시험에 낙제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 낙제생이 되었고, 그래서 곧바로 철회, 제거당할 판이었다. 그 사랑은 내가 무엇을 해줄 때에만 주어지는, 조건이 달린 사랑이었다. 그리고 가끔씩 보여주시는 따뜻함은 대가를 치른 후에야 받을 수 있는 보상이었다. 그 보상을 받기 위해 나는 어머니께서 원하는 것들을 감당해야 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나는 왜 그렇게까지 역할을 감당하려 했을까. 김장을 돕느라 내 시험공부를 포기하고, 누군가의 부탁을 들어주느라 내 감정을 미뤘던 것들이 지금도 의아하게 느껴진다. 그건 아마도 내가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일 때만 사랑받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존재 그 자체로는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고, 어린 시절 주변의 어른들로부터 말과 행동으로 그렇게 배웠기 때문에 나는 사랑과 인정을 받기 위해 끝없이 무언가를 해야만 했다. 도움이 되는 사람, 유용한 사람, 착한 사람 사람이 되어야만 존재가치가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잘했다.”, “고맙다.”, “사랑한다.”는 말을 들으려고 그렇게 애를 쓰던 그 마음이 성인이 된 이후 지금까지도 여전히 나를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나도 모르게 ‘나는 무언가를 해내야만 사랑받을 수 있다.’는 메시지를 내면화했다. 그냥 있는 그대로의 나는 어딘가 미안하고, 부족하고, 가치 없는 존재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자꾸만 누군가의 기대에 나를 맞추고, 내 감정과 필요는 미뤄두고, “이 정도는 괜찮아”라고 넘기며 버티는 사람이 되어갔다. 그럴수록 이상하게 나는 늘 비슷한 상황과 관계 속으로 되돌아갔다. 조건부로만 사랑이 허락되는 자리, 기대를 충족시켜야만 환대받는 관계로 돌아가 스스로를 처참한 상황에 처하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반복적인 행동은 어린 시절의 익숙한 감정을 다시 재현함으로써 “이번에는 달라질 수 있을지도 몰라.”라는 헛된 희망을 붙잡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심리학에서는 이런 패턴을 ‘반복강박(compulsion to repeat)’이라 부른다. 상처받은 감정의 장면을 반복해서 다시 살아냄으로써 무의식적으로 그 고통을 해결하려는 시도다. 하지만 나의 시도는 언제나 실패로 돌아왔다. 왜냐하면 그 감정을 이해받지 못한 채 반복하는 한, 그 안에서의 나는 늘 ‘그때의 나’로 멈춰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의 나는 머리로는 괜찮다고 말했지만, 몸은 매번 아프고 지쳐서 자리에 눕기를 반복했다. 너무 힘이 들 땐 힘이 날 때까지 모든 것을 회피하며 그저 잠만 자기도 했다. 감정의 무게를 몸이 대신 감당하던 시절이었다. 나는 또 다시 나를 소모해가며, 안전기지가 되어 줄 거라 믿었던 사람들에게조차 나의 가치를 증명하려 했다. 나는 도움을 받는 걸 두려워했고, 대신 나를 통해 누군가가 살아나면 그게 곧 나의 존재 가치라고 믿어왔다. 그런데 결국 그 구조 속에서 나는 나를 구하지 못했다. 언제부터 내가 뭐든지 과하게 하는 사람이 되었는지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그건 어쩌면 내가 나를 구하지 못했던 오랜 시간들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들을 구하느라 정작 내게 다가온 헬리콥터는 쳐다보지도 못한 채 저기 어딘가에서 신의 손길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이제는 안다. 내가 기다리던 구원은 그저 누군가의 손길이 아니라, 내가 내게 뻗는 손길이었다는 걸. 그래서 나는 스스로에게 가장 안전한 기지가 되어주기로 마음 먹었다. 두려움 없이, 망설임 없이, 내게 내려온 동아줄을 이번엔 반드시 붙잡기로 했다. 그리고 나를 내가 구하기로 했다.






사랑받기 위한 삶에서, 나를 돌보는 삶으로 가는 여정


이 이야기를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건, 심리 공부를 하면서부터다. 내겐 잃을 수 없는, 잃고 싶지 않은 소중한 남편이 있다. 그 시절, 남편은 조용히 내 말을 들어주고 진심으로 나를 아껴주었다. 그래서 내가 쓰는 글들이 남편을 아프게 할까 봐 조심, 또 조심해서 쓰곤 했다. 내가 입을 열면, 그 안에 쌓인 감정이 누군가를 다치게 할까 봐. 그래서 한없이 삼켰고, 결국은 나조차 내 마음을 읽지 못하게 되었다. 문제는 그러다 보니 내 마음을 명확히 볼 수 없었다는 점이다. 게다가 나처럼 조심하는 사람들이 많다 보니 내가 참고할 만한 글들이 나와 있지 않아, 내가 써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됐다. 지금 이 순간에도 참 조심스럽고, 마음이 아프다.


어머니를 처음 만났을 때 어머니는 50대 초반 나이였다. 그때 생각했을 땐 50대면 정말 많은 나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오늘부터 10년 후면 내가 바로 그 나이가 된다. 그러니 오십이라는 나이가 얼마나 어린 나이이고, 모든 걸 할 수 있는 나이인지 이제야 실감이 된다. 처음 만난 어머니는 정말 곱고 아름다우셨다. 하고 계시는 일들은 얼마나 많고, 친구도 얼마나 많은지 나와는 다른 어머니를 보면서 많이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달에 세 네 번은 국내 여행을 꼭 가고, 친구들과 각종 모임을 운영하며, 교회에서는 권사님을 이끄는 직분을 맡고, 각종 이름 있는 대외 활동에도 참석하고, 해외여행도 1, 2년에 한 번씩은 꼭 챙겨 가실 만큼 어머니의 삶은 눈코 뜰 새 없이 흘러갔다.


문제는, 평생 동안 돈 버는 일을 해본 적이 없으셔서 항상 돈이 부족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어머니는 집에 오면 부자인 친구들과 부자 집 며느리를 맞고, 부자와 결혼한 친구들과 자신을 자주 비교하시곤 했다. 이 일로 아버지와의 다툼도 잦아졌고, 그 덕분에 집안 공기는 뜨거워졌다가 냉해졌다가를 반복했다. 정말 어린 시절 내가 자라온 환경과 너무 비슷해서 모든 면에서 이상하리만치 편안함을 느낄 정도였다. 그때는 몰랐지만 익숙하다고 해서 안전한 건 아니었다. 편안함이라고 착각했던 그 감정은 사실 내가 오래도록 감당해왔던 불안정함의 또 다른 얼굴이었다. 나는 그걸 ‘정상’이라고 느끼고 있었고, ‘이 정도는 괜찮다.’고 여기며 받아들였다. 그러면서도 내 마음 어딘가에서 이상하다고, 불편하다고, 무섭다고 느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지금 돌아보면, 그 모든 감정들이 삼켜진 말들과 조용한 회피들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때 말하지 못한 것들, 그때 봐야 했지만 외면했던 것들을 이제야 그런 감정 하나하나를 나의 언어로, 나의 글로 천천히 펼쳐보는 중이다.


어쩌면 나는 어머니 안에서 어린 날의 내 가족을 다시 만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익숙함은 곧 편안함처럼 느껴졌고, 그 감각은 종종 나로 하여금 위험 신호를 무시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더 조심하지 못했고, 그 안에 내 자리를 무의식적으로 허락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익숙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는 경계를 늦췄다. 그리고 그 느슨한 틈 안으로 다시금 내가 감당하지 않아도 될 짐들이 스며들었다. 모든 면에서 부족한 것이 없어 보이셨던 어머니는 친구들과 만나기 전이면 언제나 철저히 준비하셨다. 새로운 옷과 신발을 사고, 어울리는 악세서리와 핀까지 갖춰야 비로소 마음을 놓으셨다. 어떤 모임에서도 늘 주목을 받으셨던 어머니는 어린 시절부터 자기보다 앞서 있는 친구가 있으면 달리기를 하다 머리끄댕이를 잡아서라도 1등을 했다고 자랑스레 말씀하시곤 했다. 그런 이야기들을 들을 때마다 나는 도무지 뭐라고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그게 용기인지, 위협인지, 자기 보호인지 헷갈렸다.


어머니는 부잣집 막내딸로 자라셨고, 결혼 전까지는 자신이 모든 선택의 중심에 있는 사람처럼 살아오신 듯했다. 시아버지를 만났을 때는 부자 아버지를 둔 사람이라고 믿고 결혼했지만 막상 만나보니 “깡통이었다.”며, 결혼을 후회한다고 나와 함께한 10년 동안 반복적으로 이야기하셨다. 그 말을 듣고 있던 시아버지의 표정이 내 눈엔 무척 슬퍼 보였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아무도 시키지 않았지만, 시아버지의 일들을 내가 조금은 덜어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건 내 역할도 아니고, 내가 감당할 책임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지금 돌아보면, 그건 구원자 콤플렉스였다. 슬퍼 보이는 사람을 구하고 싶은 그 마음은 그 사람을 향한 사랑이 아니라, 내가 과거에 도와줄 수 없었던 나 자신의 어린 시절을 구하고 싶은 욕구였는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부터 나는 늘 누군가를 구해야 내 존재가 정당화된다고 느껴왔다. 그래서 계속해서 타인의 감정을 짊어지고, 나를 지웠다. 시부모님들이 자신들의 돈을 어디에 쓰든 그건 내가 판단할 부분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문제성을 제기하는 이유는 어머니는 나와 남편, 시누이가 아직 공부 중이라는 이유로 자신의 삶이 어렵다고 말씀하시며 통제와 조정의 언어로 접근하셨기 때문이다.


“너네 때문에 돈도 못 쓰고, 남들은 자식들이 해외여행도 보내주고, 집 리모델링도 해준다더라.”


그런 말들을 들을 때마다 마음 한구석에서 검은 마음이 불쑥 올라오곤 했다. ‘남의 집 부모님은 집도 사주고, 유학도 보내주던데...’ 말하지 않았지만 그런 말이라도 한 번 해볼까 싶을 때가 있었다. 그 순간 나는, 또다시 누군가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내 감정을 눌러 삼키고, 내 자리를 포기하려는 나를 발견했다. 게다가 어머니께 친구분들의 자녀처럼 해드리지 못해 죄송하다는 죄책감까지 느꼈다. 도대체, 내 감정을 누가 조정하고 있었는가. 지금 와서 돌아보면 어머니의 언어는 단순한 푸념이 아니었다. 그건 내가 죄책감을 느끼도록 만드는 교묘하고 은밀한 심리적 조정의 메시지였다. ‘너희들 때문에’라는 말은 책임의 화살을 우리에게 돌리는 동시에 그분의 불만과 고통을 내가 감당해야 하는 것으로 바꾸고 있었다.


이런 식의 감정 조정은 삼각화(triangulation)의 전형적인 형태로, 자기 불만을 직접 표현하지 않고 제3자인 때로는 자녀, 때로는 배우자를 통해 우회적으로 해소하려는 관계 전략이다. 그리고 나는 그 관계 안에서 늘 ‘균형을 맞추는 사람’이 되어갔다. 부모와 자식 사이, 배우자와 부모 사이, 그 사이를 채우고 메우고, 갈등을 막는 역할을 하면서 나는 ‘사이의 사람’이 되어갔다. 덕분에 내 감정은 뒷전으로 버려두고, 갈등 없는 평화를 위해 감정을 눌렀다. 하지만 정작 그 안에서 사라지고 있었던 사람은 잃어버리면 안 되는 나 자신이었다.


누구도 시키지 않았지만 누구도 나서지 않기에 내가 나서야 한다고 믿었고, 나서야만 사랑받는다고 착각했다. 이것이 바로 가족 내 역할 고착(role fixation)이다. 어린 시절 형성된 이 무의식적 역할은 자라서도 내가 그 자리에 있어야만 모든 것이 무너지지 않을 거라는 착각을 만들었다. 어떤 순간에도 내 감정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상황을 부드럽게 넘기고 어른의 마음을 달래고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역할에 계속 머물다 보면 가장 큰 것을 잃게 된다. 스스로의 욕구와 목소리를 내려놓고, 타인의 감정에 나를 내맡긴 채 자기(Self)를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삶의 방향타가 내게 있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된다. 내가 느끼는 감정도, 결정하는 방식도, 경계의 기준도 모두 타인의 필요와 기분에 따라 흔들리기 시작한다.


더 이상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 일이 불가능해질 만큼 나는 다른 사람의 감정을 대신 살아내는 사람이 되어 가고 있었다. 과거의 나는 시아버지께 항상 돈이 부족한 걸 감안해, 질이 좋고 가격도 좋은 제품을 구입해 어머니께 선물해 드리기도 하고, 어머니의 모임을 위해 화장을 해드리고, 미용실에 가지 않으시도록 머리를 해드리고, 옷을 골라드렸다. 내가 며느리가 아니라 시녀가 된 것이 언제부터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는 어느새 어머니의 모임과 여행 일정을 빠삭하게 알고 있고 준비하는 시녀가 되어있는 나를 인지하지 못했다. 어머니의 모든 일정을 알고 있는 그 이유 중 하나도 그때는 어머니께서 날마다 내게 전화를 하던 때라, 거의 하루 반에 한 번씩 얼굴을 조우할 정도였다. 어머니는 나를 만날 때마다 달에 가는 여행 일정이 외워질 정도로 반복해 이야기하셨다. 그래서 나는 어머니와 만나지 않는 순간에도 어머니가 그 일정에 뭘 입고 가실지, 뭘 신고 가실지 걱정하고 고민했다. 그렇게 어머니의 시녀가 되어 일하다 보니 공부할 시간도, 스스로를 돌볼 시간도 부족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거울을 보며 이런 생각을 했다. ‘나는 누구를 위해 살고 있지? 그리고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 걸까?’ 그 순간 처음으로 내가 내 인생에서 가장 돌보지 못한 사람이 나라는 것을 깨달았다. 늘 누군가의 외모, 기분, 체면, 인정, 일정을 먼저 챙기며 살아왔지만 정작 내 시험, 내 건강, 내 감정은 항상 뒤로 밀려 있었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내가 그렇게까지 애쓰며 도와야 했던 이유는 내 안의 깊고 오랜 인정 욕구라는 커다란 구멍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릴 적부터 ‘사랑받으려면 유용해야 한다.’는 공식을 내면 깊숙이 새기고 살아왔다. 그래서 존재만으로 사랑받는 법을 배워본 적이 없기 때문에 누군가의 도움 요청이 곧 내 존재 증명의 기회처럼 여겨졌다. 당시 어머니를 위한 헌신이 어쩌면 나에게는

일종의 시험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내가 어머니의 기대를 충족하면 나는 좋은 사람, 괜찮은 며느리,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고 그렇지 못하면 철회될지 모른다는 불안 속에서 나는 그 모든 역할을 스스로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런 패턴은 단지 어머니에게만 해당된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렇게 나를 소모하면서, 타인의 기대에 나를 맞추며 살아왔다. 이제는 알고 있다. 사랑받기 위해 ‘시녀’가 되어야 하는 삶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결국 나를 잃어버릴 것이라는 것을. 그래서 이제는 그 누구보다 내 마음의 목소리를 가장 먼저 듣기로 한다. 누군가의 인정이 아니라, 내 안의 내가 나를 믿어주는 감각을 매일 조금씩 깨워가는 중이다. 어느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내 마음을 가장 먼저 돌봐주는 삶. 그게 내가 진짜 바라던 안전 기지였다는 걸 이제야 알게 됐다.






한번은 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데 어머니께서 전화하셨다. 계절이 바뀌었으니 옷장 정리를 해야 한다고 하셨고, 만나는 순간에도 옷장 정리가 안 돼서 무슨 옷이 있는지 몰라 입고 갈 옷이 없다고 하셨다. 결국 나는 어머니의 옷장을 정리하고, 속옷을 정리하고, 헤지거나 유행이 지난 옷들은 버리거나 내가 들고 왔다. 이런 일들은 매년 새로운 계절마다 반복됐다. 그 외에도 집에 행사가 있거나 뭔가를 준비해야 할 때면 어김없이 나를 부르셨고, 나는 어느 순간부터 그것이 내 역할처럼 당연해져 있었다.


했을 때와 하지 않았을 때의 상과 벌이 분명했기 때문에, 나는 어머니의 햇살과도 같은 사랑과 인정을 받기 위해,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일까지 도맡아하기 시작했다. 이 구조는 어릴 적 내게 내재된 ‘조건부 사랑’의 내면 모델과 너무도 닮아 있었다. 사랑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해내야’만 받을 수 있는 어떤 성취처럼 여겨졌다. 어린 시절부터 형성된 역할 고착(Role Fixation)과 반복 강박(Repetition Compulsion)이 내 삶의 모든 관계에서 동일한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또다시 사랑받기 위해 누군가의 욕구를 먼저 읽고 충족시키려는 아이로 돌아가 있었다.


나는 내가 하는 행동들을 통해 시아버지가 될 분에게도 사랑받는 아이가 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아버지께서도 이전에 해오시던 많은 일들에서 점차 손을 놓으셨다. 밥을 먹기 위해 준비를 해야 할 때면 “집에 여자가 셋인데 내가 움직여야 하냐.”라고 하며 소파에 앉아계셨고, 식사 후 커피를 타다 드릴 때 컵 받침이 없으면 어머니께서 호통을 치시며 반드시 컵받침까지 받쳐 드려야 한다고 하셨다. 나는 나도 모르게 어린 시절 했던 그 ‘기능하는 아이’의 역할을, 남자친구 부모님께 고스란히 옮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 순간 멈춰야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이미 너무 멀리와 있었다. 당시에는 내가 ‘반복 강박’을 하고 있다는 개념조차 몰랐기 때문에, 내 노력과 정성이 부족해서 사랑과 인정을 받지 못한다고만 생각했다. 천천히 나는 더 깊은 인정 중독에 빠졌고, 나라는 사람은 어머니에 비하면 하찮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다 더는 견딜 수 없는 상태가 되었는지, 무의식이 “그만하라”고 보내는 신호처럼, 어머니께서 해주신 반찬과 음식을 먹고 알레르기 반응이 생겨 병원에 가기 시작했다. 심리학에서는 억압된 감정이 신체화(Somatization)로 드러나기도 한다. 내 안에 쌓인 억울함과 분노는 결국 내 몸을 통해 “이건 내 몫이 아니야”라고 외치고 있었던 것이다. 청소를 하고, 집 정리를 하고, 옷장을 정리하고, 어머니 대신 쇼핑을 하고(쇼핑하기엔 부족한 양의 돈을 주셨다), 선물을 준비하고, 어머니 대신 일정을 챙기며 어머니가 슈퍼스타로 보이지 않을까 걱정했던 10년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심지어 이때 스스로를 챙길 시간과 힘이 부족해 내 방은 엉망이었다.


그리고 나는 마침내 내가 잘못된 선택을 했다는 사실을 완전히 깨닫는 순간을 맞이했다. 그때부터 나는 지난날을 후회하며, 1년을 울면서 보냈다. 그 시기는 마지막 변호사시험을 치르고, 발표를 앞둔 때였다. 이 부분은 나중에 따로 이야기하려 한다. 어머니는 늘 “자주 효도해야 이 땅의 복도 받고, 하나님의 복도 받는다.”고 말씀하셨다. 내가 다른 의견을 내비치려고 하면, “어디서 어른 앞에서, 신앙도 별로 안 된 것이, 30년 넘게 신앙생활 한 사람 앞에서 떠들어.”라며 입을 막으셨다. 사야 할 책값도 부족하고, 빠듯하게 한국장학재단 이자와 월세, 공과금을 내던 나는 또다시 나를 방치하고, 타인의 삶이 외부에서 훌륭하게 보이도록 기능하고 있었다는 걸, 그때는 완전히 몰랐다.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다. 나는 그것이 사랑이고, 크리스천이 감당해야 할 의무라고만 믿었다. ‘효도해야 하나님께 사랑 받는다.’는 행위 중심의 신앙에 빠져 있던 때였다. 사랑은 ‘자격을 갖춰야만 주어지는 것’이라는 그 믿음은 신앙 안에서도 형태를 바꿔 반복되었다. 하나님의 사랑조차 효도라는 행위로 증명해야 한다는 강박은 나를 더욱 옥죄었다. 사랑은 행동으로 증명해야 한다는 어머니의 말에 매달렸고, 나는 더 많은 것을 어머니께 드려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혔다.


그러던 중, 정말 감사하게도 어머니는 내가 시험을 3회 남겨둔 시점쯤 아버지를 설득해 월세를 내주시기 시작하셨다. 그전까지는 월세를 내기 위해 과외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이었기에 정말 감사했다. 매달 주시는 20만 원이 얼마나 귀한 돈이었는지, 나는 그 감사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십일조 2만 원을 드렸고, 매달 부족한 예산 속에서 생활했다. 어머니는 “더 이상 아르바이트하지 말고 공부에 집중하라”고 하셨지만, 그때부터 주말마다 나를 불러 딸이자 며느리로서 해야 할 도리를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아버지께서 혹시 월세를 주지 않으실까 봐 두려워하게 되었다. ‘더 잘 보이고, 더 잘 해드려야 매달 월세를 주실 거야.’ 이런 생각은 점차 ‘나는 아무 가치도 없고, 아무것도 해낼 수 없는 사람’이라는 무능감으로 번져 점차 피폐해져갔다. 그 시기, 매년 시험도 망하기 시작했다. 나는 또다시 어린 시절의 그 자리로 돌아가 있었다. ‘천 원도 못 버는 가치 없는 인간’으로.


그러다 나는 시부모님의 갈등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까지 떠맡게 되었다. 어머니는 오빠가 아르바이트를 나갔을 때를 골라 시아버지를 의도적으로 자극하셨고, 아버지가 결국 소리를 지르게 되면, 그 안에 꼭 나를 끼게 하셨다. 두 사람의 갈등 속에 자녀나 제3자를 끌어들이는 건 흔한 심리적 방어 기제이며, 이를 '삼각관계(Triangulation)'라 부른다. 나는 갈등의 매개가 되었고, 그 안에서 중재자이자 희생양의 역할을 반복했다.


“00가 이걸 들으면 뭐라고 생각하겠어? 당신 때문에 며느리한테 무시 받는 사람으로 만들면 되겠어?”


“당신이 이런다고 아들이 저 애랑 결혼 안 할 것 같아?”


라는 말들로, 나를 갈등의 중심으로 밀어 넣으셨다. 그리고 그 싸움 안에서 아버지는 ‘너 때문에 집안에 분난이 일어난다.’, ‘집에 오지 마라.’ 는 무지막지한 말을 하시기 시작했다. 돈으로 시작해서 돈으로 끝나는 싸움은 매일같이 반복됐고, 말미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가셨다. 나는 여전히 옷을 정리하고 있었고, 어머니는 친구를 만나고 오겠다며 “가지 말라.”는 당부를 남기고 나가셨다. 그리고 아버지는 말없이 외출했다가 내가 보란 듯이 영수증과 각종 문서를 펼쳐두셨다. 사과를 요구했던 마지막 날 내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가족이라 생각해본 적 없다.”는 메시지를 보내시기까지 나는 두 분과 정말 많은 연을 쌓았다. 내가 원했던 단 한 마디의 사과는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후, 남편을 통해 전해 들었다. 아버지께 스마트워치를 선물로 드린 후였다. 뒤늦게라도 전달된 사과는 내 안의 균열을 완전히 메우지는 못했지만, 더 이상 나를 탓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가능하게 해준 작은 단서였다고 생각한다.






사람 관계라는 것을 생각할 때,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희생자를 찾아 그 사람에게 자신의 상처와 불행을 투사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마치 자신 안의 아픔을 해소하기 위한 일종의 ‘쓰레기통’처럼, 상대에게 감정을 쏟아내고 해소하려 한다. 그리고 그 희생자는 종종 가장 착한 사람, 가장 감정이 섬세한 사람, 가장 책임감 있는 사람이 된다. 내가 시부모님을 떠올릴 때마다 맨 처음 이야기했던 일화가 자꾸 떠오르는 것도, 어쩌면 나는 뭐든지 할 수 있고, 할 수 있었던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물론 그 ‘할 수 있음’은 내가 진심으로 원했던 것이 아니라, ‘그래야만 사랑받고 살아남을 수 있다’는 절박함에서 비롯된 역할 수행이었다. 그 역할들을 수행하며 무능감이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내가 세상에서 사라지기만을 바랐던 그 시절을 돌아보면, 나는 지금도 가끔 그런 선택들을 했던 스스로를 탓하게 된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것은 내가 선택한 게 아니라,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생존 방식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조건부 사랑 안에서 살아온 아이는, 성인이 되어서도 관계 안에서 끊임없이 자기 존재를 증명하려 한다.


반복 강박(repetition compulsion)은 그렇게 작동했다. 바꿀 수 없는 관계, 오직 내가 맞춰야만 유지되는 구조 안에서 나는 점점 파괴되어 갔다. 그 속에서 나는 신께 수도 없이 외쳤다. 그리고 신은, 지금 돌아보면 정말 많은 방식으로 내게 손을 내밀고 계셨다. 사람을 보내셨고, 우연한 기회를 주셨고, 내 몸을 통해 경고하셨고, 마지막에는 꿈으로까지 말씀하셨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그분의 도우심이라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고, 오히려 ‘관계 안에서 나를 더 헌신시키는 사명’으로 오해하고 더 깊이 들어가 버렸다. '누구의 잘못일까?' 라는 생각조차 떠올릴 수 없을 정도로, 모든 관계들 안에는 투사, 전이, 삼각관계, 조건부 사랑, 인정 중독 등 수많은 심리 기제들이 얽혀 있었다.


그 복잡한 얽힘을 하나씩 풀어내기 시작했을 때, 나는 비로소 내 삶에 대해 처음으로 진심으로 분노하고, 안타까워하고, 슬퍼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런 문제가 결코 나만의 문제가 아님을 알게 되었을 때, 마음 깊은 곳에서 경각심이 일었다. 나는 오랜 시간 나 혼자만이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책과 영상들을 뒤졌는데, 그 안에는 나와 같은 고통을 겪고 있는 수많은 이들이 있었다. 나보다 훨씬 더 처참한 시부모와의 갈등 속에 살아가다 암에 걸린 여성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 눈물은 단순한 연민이 아니었다. 그건 ‘나도 그럴 뻔했다’는 공포와 안도의 눈물이었다. 나 역시 갑상선에 문제가 생기고, 살이 20kg이 찌고, 호흡이 가빠지고, 몸이 망가져 갈 때까지도 내가 왜 그런지를 몰랐다. 몸은 이미 마음이 견딜 수 없는 것을 대신 앓고 있었던 것이다. 나에게 많은 것을 감당해야 한다고, 당연히 내가 줘야 한다고 말했던 어머니는, 나중에는 시누이의 결혼까지도 내게 책임지라고 하셨다.


그때 나는 뼛속까지 내 존재가 ‘타인을 위한 도구’처럼 여겨졌음을 절감했다. 정말 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이 지면에 모두 담을 수 없을 만큼. 그 이야기들은 하나씩 심리적 분석과 함께 천천히, 정직하게 풀어낼 생각이다. 이제 나는 기억을 도려내는 방식이 아니라, 이해하고 소화하는 방식으로 과거를 마주하려 한다. ‘나를 존중하지 않는 사람과 장소에 나를 두지 않겠다.’고 다짐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밤을 울며 깨어 있었는지, 얼마나 많은 새벽에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무너졌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게 정말 소중한 내 남편과 함께하고 싶었고, 그래서 또다시 나를 저 멀리 던져버리기도 했다. 어쩌면 그것조차도, ‘내가 누군가를 구할 수 있다’는 구원자 콤플렉스였는지도 모른다. 나는 ‘정상적으로 보이는 가정’ 안에서도 얼마든지 철저하게 안전 기지를 잃고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두 눈으로 지켜보았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다짐한다. 남편의 안전기지가 되어주고 싶다고. 조건 없이, 존재 그 자체로 사랑받는 감각을, 누군가에게 선물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그리고 나는 드디어 스스로의 안전기지가 되어 살아가겠다고 다짐하며 매일 글을 쌓는다. 이제, 나는 사랑받기 위해 애쓰지 않고도 살아가는 법을 매일 배우고 있다.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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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프로이트, 『쾌락 원칙을 넘어서』, 권수경 옮김, 열린책들,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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