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는 삶을 살아갑니다 / 27. 자율성에 대하여

27. 자율성에 대하여

by 김희경 작가



이 책은 저자의 개인적 경험과 감정, 그리고 그로부터 얻은 심리적 통찰을 바탕으로 구성된 에세이입니다. 등장하는 인물은 모두 사생활 보호를 위해 가명으로 처리되었으며, 실제 인물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본문은 사실을 단정하거나 특정 개인, 단체를 지칭, 비난하려는 목적이 아닙니다(없습니다.). 인물, 장소, 관계, 시점, 상황의 일부는 가명, 합성, 변형되었으며, 식별 가능한 세부 사항은 변경되었습니다. 유사성이 있더라도 이는 순전히 우연입니다.


저자는 타인의 명예나 사생활을 침해할 의도가 없으며, 본문의 해석은 저자의 주관적 성찰임을 밝힙니다. 이 책은 유사한 경험을 지닌 독자에게 위로와 통찰을 전하기 위한 진솔한 기록입니다. 본문에는 가족 내 학대와 상실 등 트라우마를 환기할 수 있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글을 읽으실 때 스스로의 마음을 가장 우선하시고, 불편함이 느껴지면 언제든 읽기를 멈추셔도 괜찮습니다.


저자는 이 글을 통해 과거를 고발하려는 것이 아니라, 비슷한 경험을 한 이들에게 공감과 회복의 메시지를 전하고자 합니다. 이 책은 특정 인물이나 집단을 비방하거나 공격하려는 목적이 아닌, 개인의 성장과 치유의 여정을 기록하고자 한 성찰의 결과물입니다. 이 기록이 비슷한 경험을 가진 누군가에게 살아갈 용기와 희망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AI 네 컷 만화


쓰는 삶을 살아갑니다


27. 자율성에 대하여


매일이 흘러간다.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른 채 그냥 흘러간다. 흘러가는 시간들을 붙잡을 수 없지만, 요즘의 나는 살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감사해 매일을 살고 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남편의 출근을 챙기고, 남편이 나가고 나면 집 안에서 해야 할 것들을 찾아 움직인다. 그러면서도 예전 버릇을 다 버리지 못해, 조금이라도 생산적인 일을 하고 싶어 심리학 강의든 경제 강의든 열심히 듣는다. 책도 조금씩 읽고, 매일 조금씩 글도 쓴다. 지금은 비워진 시간을 스스로 채울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진다.


오전에 마늘을 벗기다가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식구가 많아 기본 식재료가 많이 필요했던 집에서 자라다보니 마늘을 자주 깠고, 수건을 자주 갰다. 그때 조금씩 집안일을 도와서인지 지금도 손이 크다. 한번 무언가 준비하면 너무 많이 해서 당황할 때가 있다. 최근까지는 깐 마늘을 사 먹었지만, 깐 마늘에 외국산이 섞여 나온다는 이야기를 듣고 망에 든 통마늘을 구입했다. 가득 사도 16,000원이었고, 산지에서 바로 들여온 마늘이라 그런지 싱싱하다 못해 생생한 느낌이 들었다.


어릴 때 물에 가득 담긴 마늘을 맨손으로 까면 차갑고 아린 감각이 늘 싫었다. 그래도 해야 하니까 했는데, 그 과정에서 끊임없는 비난을 들었다. 미성숙한 어른들이 늘 그렇듯 가장 약하고 편한 대상을 찾아 자신의 불쾌함을 전가한다. 그래서인지 나는 말을 함부로 하지 않게 되었고, 함부로 말하는 사람을 곁에 두지 않는다. 말이 인간의 자존감과 정체성에 얼마나 직접적인 흔적을 남기는지 알기 때문이다. 욕설과 비난이 일상처럼 오가는 환경에서 자란 아이는 자신을 향한 왜곡된 메시지를 그대로 내면화하기 쉽다. 무엇보다 그런 환경에서는 '나는 소중하지 않다.'는 기본 신념이 쉽게 만들어진다. 그러나 욕을 듣는 사람만 작아지는 것이 아니라, 욕을 하는 사람도 그만큼 성장하지 못하고 멈춰 있다.


온전한 나만의 하루, 내가 원하고 필요해서 마늘을 까다 보니 어린 시절 마늘을 까던 내 모습이 겹쳐졌다. 이렇게 좋은 것을, 그땐 왜 그렇게 화가 났을까. 억압된 환경에서 의무처럼 억지로 하던 행동을, 지금은 스스로 선택해 하고 있다는 사실이 가장 큰 차이라고 생각한다. 심리학에서는 이런 경험을 ‘자율성 회복’이라고 말한다. 강요된 행동은 작은 일도 짐처럼 느껴지지만, 스스로 선택한 행동은 같은 일이어도 전혀 다른 감정으로 다가온다. 그 차이를 느끼는 순간, 과거와 현재를 구분하는 힘이 생긴다.


자율성에 대해 생각하면서 자유의지를 인간에게 선물하셨다는 신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신이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떠올리게 된다. 내게 자율성과 자유가 이렇게 중요한 가치였다는 사실을 배우고 깨달아가면서 내 삶이 드디어 내 것이라는 사실에 안도한다. 그리고 마늘을 까면서 만난 어린 날의 나에게 마음속으로 말해주었다. 더 이상 누구도 나를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고, 그렇게 두지 않겠다고. 이제 내가 나를 지켜주겠다고. 나를 지킨다는 결심은 거창한 선언이 아니라, 이렇게 작은 일상에서부터 조용히 실천된다.


뽀얀 마늘들을 예쁜 통에 담아 냉장고에 넣으면서, 이 사소한 행위가 주는 풍요로움이 참 신기했다. 별것 아닌데 만족이 느껴지고, 자기 효능감까지 생긴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작은 성공의 반복’이라고 부르는데, 자율성과 자유가 가져오는 온전한 하루의 감각이 여기에 깃든다. 오늘 벗긴 마늘로 남편과 나를 위해 맛있는 요리를 한가득 해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예쁘게 벗긴 마늘을 냉장고에 넣었다. 나에게도, 누군가에게도 자율성은 중요한 것이니까. 나는 앞으로 나의 자율성과 자유를 사랑하며 살아가기로 했다. 누군가의 요구가 아니라 나의 선택으로 시작된 하루가 이렇게 충만할 수 있다는 사실이, 지금의 나를 평안하게 한다.


참고자료


1. Deci, Edward L., Ryan, Richard M., 『Intrinsic Motivation and Self-Determination in Human Behavior』, Plenum, 1985

→ 사용된 개념: 자율성(autonomy), 자기결정성(self-determination), 개인이 스스로 선택한 행동에서 경험하는 자율감, 자기결정성 욕구 충족으로 인한 심리적 웰빙(정서적 안정 및 만족감 포함)


2. Bandura, Albert, 『Self-Efficacy: The Exercise of Control』, Freeman, 1997
→ 사용된 개념: 자기효능감(Self-efficacy), 작은 성공의 반복이 마음에 주는 영향


[사진 서체 : 네이버 나눔 명조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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