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는 삶을 살아갑니다 / 28. 금수저의 삶

28. 금수저의 삶

by 김희경 작가



이 책은 저자의 개인적 경험과 감정, 그리고 그로부터 얻은 심리적 통찰을 바탕으로 구성된 에세이입니다. 등장하는 인물은 모두 사생활 보호를 위해 가명으로 처리되었으며, 실제 인물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본문은 사실을 단정하거나 특정 개인, 단체를 지칭, 비난하려는 목적이 아닙니다(없습니다.). 인물, 장소, 관계, 시점, 상황의 일부는 가명, 합성, 변형되었으며, 식별 가능한 세부 사항은 변경되었습니다. 유사성이 있더라도 이는 순전히 우연입니다.


저자는 타인의 명예나 사생활을 침해할 의도가 없으며, 본문의 해석은 저자의 주관적 성찰임을 밝힙니다. 이 책은 유사한 경험을 지닌 독자에게 위로와 통찰을 전하기 위한 진솔한 기록입니다. 본문에는 가족 내 학대와 상실 등 트라우마를 환기할 수 있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글을 읽으실 때 스스로의 마음을 가장 우선하시고, 불편함이 느껴지면 언제든 읽기를 멈추셔도 괜찮습니다.


저자는 이 글을 통해 과거를 고발하려는 것이 아니라, 비슷한 경험을 한 이들에게 공감과 회복의 메시지를 전하고자 합니다. 이 책은 특정 인물이나 집단을 비방하거나 공격하려는 목적이 아닌, 개인의 성장과 치유의 여정을 기록하고자 한 성찰의 결과물입니다. 이 기록이 비슷한 경험을 가진 누군가에게 살아갈 용기와 희망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AI 네 컷 만화


쓰는 삶을 살아갑니다


28. 금수저의 삶


오늘까지 3일 동안 <금수저> 드라마(총 16화)를 완시청 했다. 우연히 발견한 드라마였는데 드라마 소개에서 ‘부모를 바꾸면 부자가 될 수 있어요.’라는 문구가 마음을 끌어서 시청을 시작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보기 시작했는데 온종일 드라마 내용이 나를 따라다녔다. 깨어 있으면 드라마를 보고, 자는 동안에도 드라마 내용을 꿈속에서 다시 재생하며 생각했다. 나는 매일 꿈을 꾸기 때문에 꿈속에서까지 낮 동안의 생각이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이 드라마에 이렇게 몰입한 건 누군가의 삶을 바꾸는 이야기이기 때문이 아니라, 결국 사람은 자기 인생을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끝까지 보여주는 작품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드라마 금수저는 부모를 바꾸면 부자가 될 수 있다는 같은 나이대의 완전히 다른 환경에서 살아가는 두 남자아이를 주인공으로 한다. 한 명은 대한민국 최고 재벌 집 아들이고, 다른 한 명은 반지하에 사는 가난한 아이이다. 가난한 아이는 꿈을 좇느라 돈을 벌지 않는 아버지를 대신해 아르바이트를 하고, 부잣집 아이의 숙제를 대신하며 돈을 번다. 학교에서는 부잣집 아이들의 놀잇감이 되어 뺨 한 대를 맞고 만원을 받는 식으로 돈과 모욕을 교환한다. 반면 재벌 집 아이는 가진 돈만큼 학교 내에서도 최상 계급자로 군림한다.


어느 날, 가난한 아이가 금수저를 3만 원에 파는 할머니를 만나고 그 수저를 구입하게 된다. 금수저로 같은 나이의 인생을 바꾸고 싶은 아이 집에 가서 밥을 세 번 먹으면 그 아이와 완벽히 삶을 맞바꿀 수 있다는 설정이다. 1달, 1년, 10년. 세 번 원래 자신으로 돌아갈 기회도 주어진다. 흥미로웠던 점은 금수저로 인생을 바꾼 사람이 그 아이 하나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서로 얽히고 섞여, 삶이 바뀐 사람들은 자신이 바뀌었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새로운 삶을 살아간다. 그 장면들에는 자신이 누구였는지 기억이 희미해지는 ‘정체성의 공백’이 드러나는데, 인간이 자기 서사를 잃을 때 어떻게 공백을 메우는지 생각하게 한다.


드라마를 보며 예전에 ‘부모만 잘 만났더라면’이라고 생각했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누구나 한 번쯤 더 좋은 부모를 만났다면 인생이 달라졌을 거라고 상상해 본 적은 있을 것이다. 드라마에서도 계속 말하듯 인생은 때로 너무 불공평하고, 그것을 정면으로 떠안고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극 중에서 부자 집 여자아이와 인생을 바꾼 여자아이가 할머니에게 묻는다. 할머니의 행동은 악취미가 아니냐고. 할머니는 “인생이 불공평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그래도 기회를 주고 싶었다.”라고 말한다. 이 장면은 불평등을 마주할 때 생기는 무력감과 열등감이 어떻게 인생에 보이는지 생각하게 한다.


금수저를 사용하면 인생이 정말 바뀔까. 이 질문 앞에서 여러 생각이 들었다. 좋은 것만 보고 타인과 삶을 바꾸기엔, 내가 가진 것 속에도 분명 소중한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드라마는 각자가 짊어져야 하는 고유한 짐을 보여주며, 금수저로 인생을 바꾸면 반드시 합당한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메시지도 준다. 인생은 불공평하고, 동시에 공짜가 없기 때문이다.


20대에 친구 한 명이 내게 말했다.


“너는 항상 다이어트한다고 굶고 죽을 듯이 운동하고, 인생이 불행하다고 말하잖아. 내가 봤을 땐 넌 가진 게 참 많은데. 만약 나랑 인생을 바꿀 수 있다고 한다면 바꿀래?”


나는 한참이나 대답하지 못했고 하지 않았다. 한참 동안 내 눈을 응시하던 그녀가 이어서 말했다.

“봐. 너도 나랑 인생 바꾸기 싫잖아. 넌 예쁘니까. 살은 빼면 되는 거고, 운동도 하면 되잖아. 결국 나랑 바꾸기 아쉬운 거지?”


그 말이 나오기까지 나는 왜 그렇게 망설였을까. 그녀는 내가 봐도 정말 멋지고 능력 있는 사람인데 말이다. 지금에 와서야 그럼에도 나는 나를 사랑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지만, 당시에는 몰랐다. 그 순간은 지금 생각해 보면 내 안의 ‘나는 쉽게 대체되지 않는다. 대체되고 싶지 않다.’는 자기 개념의 작은 불씨가 스스로를 지키고 있었던 시간인지도 모르겠다.


당시 내 주변 친구들은 거의 모두 부유한 집안 출신이었다. 대기업 인사과장 집안, 공장을 여러 개 운영하는 집안, 고위 공무원 집안, 집이 여러 채인 친구들까지. 그래서 친구들을 만나면 할 말이 없었다. 그녀들 중 아버지가 주말마다 바다낚시를 가서 수천만 원을 쓴다는 이야기는 지금도 생생하다. 명품가방을 매달 사던 친구도 있었는데 나는 속이 꼬여서 “그렇게 많으면 나 하나 줘.”라고 했다. 진심이었다. 그 이후 그 친구는 내 앞에서 명품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녀들 중엔 내 가방이 싸구려라며 자신의 명품 가방 깔개로 쓰고 당당하게 말하는 아이도 있었다. "니건 싼 거니까. 내건 400만 원짜리야. 네가 살 수도 없는."


20대에는 여러 명의 여자 친구들과 가까워지며 그들의 집안과 삶을 가까이에서 보게 됐다. 금수저로 그녀들과 삶을 바꿀 수 있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결론은 그 누구와도 바꾸고 싶지 않았다는 것이다. 겉으로 멋지고 화려해 보여도, 그들 집안 안에는 내가 오래도록 바라던 ‘따뜻함’이 없었다. 나는 그걸 그때는 몰랐지만, 결국 내가 평생 원한 건 사랑할 수 있고 사랑받을 수 있는 따뜻한 가정이었다. 완벽한 가정이 존재하기라도 할까 싶지만, 적어도 나는 그걸 꿈꿨다.


어린 시절부터 따뜻한 가정을 갖고 싶어서 나는 나와 비슷한 처지지만 따뜻함이 가득한 가정을 가진 남자친구들을 골라 만났다. 만약 돈으로 인생이 완성된다고 믿었다면 진작에 부유한 집으로 시집갔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나도 부모님께 받은 것이 전혀 없진 않다. 부모님의 화려한 외모와 매일 5개사의 신문을 아침마다 읽고, 바둑을 두고, 책을 읽던 아버지의 지적 능력은 물려받았으니까. 덕분에 젊은 시절 여러 번 인생을 바꿀 기회도 있었다. 하지만 결핍이 만든 자존심, 불안정한 자기애, 자격지심 때문에 부를 앞세운 사람들을 피해 다녔다. 심지어 가난한 줄 알고 사귀었는데 집이 부자라는 사실을 알고 화가 나 헤어진 적도 있었다. 당시 나는 그 남자를 살뜰히 보살피고 싶어 했다. 돌봄을 통해 나의 존재 가치를 확인하려는, 일종의 평강공주 판타지였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건 사랑이라기보다,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을 찾는 공의존적 욕망에 가까웠다.


20대엔 “너만 있으면 된다.”라고 말하던 친구들 속에서 관계와 감정에 휘둘리며 살았다. 그 시절 나는 부러움과 열등감 사이에서 흔들리면서도 나를 지키고 싶은 마음이 동시에 있었다. 그래서 그 와중에도 공부하고 책을 읽고 글을 썼던 건 스스로에게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결핍은 사람을 성숙하게 만들고, 때로는 가장 큰 성장의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지금 돌아보면 그 작은 본능 덕분에 끝까지 무너지지 않고 내 길을 버텨낸 것 같다.


금수저 드라마를 보며 지난날을 돌아봤다. 부모를 바꿀 기회가 있었다면 바꿨을까? 솔직히 말하면 바꾸고 싶은 ‘동일 나이 친구’가 없(었)다. 바꿔봐야 그 밥에 그 나물이었다. 물론 그들 집안은 객관적으로 훨씬 좋은 환경이었지만, 내가 원한 동화를 구현할 집은 없었다. 지금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들의 짐을 너무 정확하게 보았고, 그래서 흔들리지 않았다.


너무 없어서 조금만 돈이 생기면 토익 접수비로 쓰고, 학교 다니는데 필요한 것을 사느라 항상 가난했지만, 그래도 자존심과 자격지심이 있어 타인에게 굽히지 않았다. 그랬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남편에게 온전한 사랑을 줄 수 있게 된 것도 감사하다. ‘좋은 것은 내 것이 될 수 없다(될 리가 없다.).’는 신념 때문에 안전한 사랑을 오래 회피했지만, 결국 그 여정을 지나왔기에 지금의 사랑이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드라마를 보면서 이런 이야기를 쓴 작가는 어떤 사람일까 궁금해졌다. 많은 메시지를 담고 있으면서도 보는 이로 하여금 자기 삶을 돌아보게 만드는 힘. 참 멋지고 부럽다. 나도 언젠가 이런 글을 쓰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그러나 금수저가 있어도 작가님과 인생을 바꾸고 싶진 않다. 내게는 남편이 너무 중요하기 때문이다.


내게 주어진 단 한 번의 삶, 오늘의 삶. 나는 나와 오늘을 사랑하며 살아가기로 했다. 더 이상 타인의 삶을 내 삶에 잘못된 방식으로 끌어들이지 않는다. 과거의 숱한 선택 속에서 지금의 삶이 피어났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 않다. 무엇보다, 이제는 나보다 친구(타인)가 먼저였던 삶을 살지 않는 내가 되어버렸다.


인생지사 새옹지마. 선택했든, 선택하지 않았든 마주했던 실패와 고통 속에서 나는 결국 내 삶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지난 시간이 아깝긴 하지만, 돌이키고 싶진 않다. 그 모든 시간 위에 오늘의 내가 서 있고, 내가 사는 이 삶은 더 이상 누구의 것도 아닌 내 것이기 때문이다.


드라마 마지막 화(16화)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금수저는 바로 나다라는 마음으로 자신을 믿고 사랑하길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끝없이 높은 금수저를 욕망하며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고 살아갈 수도 있으니까요.”


나 자신으로 사는 것. 부족하고 보잘것없어 보여도 내 인생을 내 것으로 사는 것. 그것이 진짜 금수저의 삶이 아닐까 생각하며 기록을 마친다. 누구에게나 인생은 한 번 뿐이고, 내게 주어진 시간과 재능을 어디에 어떤 방식으로 사용할지는 오직 나와 당신만이 결정할 수 있다. 우리의 것, 자신의 것이니까.


참고자료


1.


[사진 서체 : 네이버 나눔 명조체]






금요일 연재
이전 27화쓰는 삶을 살아갑니다 / 27. 자율성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