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작은 행복
이 책은 저자의 개인적 경험과 감정, 그리고 그로부터 얻은 심리적 통찰을 바탕으로 구성된 에세이입니다. 등장하는 인물은 모두 사생활 보호를 위해 가명으로 처리되었으며, 실제 인물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본문은 사실을 단정하거나 특정 개인, 단체를 지칭, 비난하려는 목적이 아닙니다(없습니다.). 인물, 장소, 관계, 시점, 상황의 일부는 가명, 합성, 변형되었으며, 식별 가능한 세부 사항은 변경되었습니다. 유사성이 있더라도 이는 순전히 우연입니다.
저자는 타인의 명예나 사생활을 침해할 의도가 없으며, 본문의 해석은 저자의 주관적 성찰임을 밝힙니다. 이 책은 유사한 경험을 지닌 독자에게 위로와 통찰을 전하기 위한 진솔한 기록입니다. 본문에는 가족 내 학대와 상실 등 트라우마를 환기할 수 있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글을 읽으실 때 스스로의 마음을 가장 우선하시고, 불편함이 느껴지면 언제든 읽기를 멈추셔도 괜찮습니다.
저자는 이 글을 통해 과거를 고발하려는 것이 아니라, 비슷한 경험을 한 이들에게 공감과 회복의 메시지를 전하고자 합니다. 이 책은 특정 인물이나 집단을 비방하거나 공격하려는 목적이 아닌, 개인의 성장과 치유의 여정을 기록하고자 한 성찰의 결과물입니다. 이 기록이 비슷한 경험을 가진 누군가에게 살아갈 용기와 희망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AI 네 컷 만화
오늘 매달 사용하기로 약속한(혼자 한 약속이다.) 식재료 구입비 30만 원을 넘겼다. 이유는 김밥이 너무 먹고 싶었기 때문이다. 김밥이 먹고 싶은데 다음 달까지 기다리기엔 아직 날이 많이 남아, 결국 김밥 만들기 세트를 구입했다. 마트에서 장을 보고 배송을 받아 냉장고에 넣는 순간,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꽉 찼다. 곧 만들어 먹어야겠다. 김밥은 몸에 아주 좋다고 할 수 없지만, 포기할 수 없는 식재료다. 그래도 사 먹는 것보다는 낫겠지, 하는 마음으로 만든다. 이렇게 스스로를 설득하며, 오늘의 선택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매달 식재료 구입비를 설정한 이유는 이렇게 하지 않으면 전혀 아껴지지 않아서다. 요즘 물가가 너무 높아 생각 없이 이것저것 장바구니에 담다 보면 식재료비가 감당할 수 없이 커진다. 나이가 들수록 돈을 써야 할 곳은 더 많아지는데 영양제도 필요하고, 저축도 해야 하고, 학자금 대출이나 각종 고정 지출도 있다. 예상치 못한 고장이나 파손, 구 가족 행사처럼 갑작스러운 지출도 늘 따라온다. 결국 문제는 절약의 의지가 아니라, 한정된 자원을 어디에 어떻게 배분하느냐에 가깝다.
그래서 항목을 나누고, 사용할 수 있는 금액을 미리 정해둔다. 그러면 그 안에서 선택하게 된다. 심리학자들이 말하길 돈을 쓰고 기록하는 행위가 ‘고통’을 발생시키기 때문에 소비를 줄이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한다. 나는 그 말을 꽤 신뢰하는 편이다. 그래서 반드시 적는다. 신용카드를 써도 적고, 할부를 했다면 끝나는 날까지 계속 확인한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신용카드를 제어하기가 쉽지 않다는 걸 이미 여러 번 경험했다. 그래서 매달 스스로에게 이 과정을 요구한다. 누가 시킨 일이 아니라 나와 남편을 보호하기 위해 내가 만든 규칙이다.
요즘은 원금과 이자를 내는 일에 대해 종종 생각한다. 대학원에 다닐 때 학자금 대출을 받았고, 그 원금과 이자를 매달 갚아야 했다. 이자가 낮아도 수입이 거의 없는 학생에게 월세와 학자금 대출, 기본 생활비는 마음을 끝없이 조여왔다. 갚는 날이 다가오면 앞뒤로 일주일은 잠을 제대로 못 잤다. 그래서 지금도 나는 쉽게 돈을 빌리지 않고, 돈을 빌려주지도 않는다. 신용카드 리볼빙을 하지 않는 이유도 그 경험 때문이다. 대학원 시절, 매달 쓴 돈을 일기장에 적으며 살았다. 그 덕분에 돈이 없어서 공부하지 못하고, 살 곳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감각이 어떤 것인지 몸으로 기억하게 되었다. 그리고 학자금 대출 덕분에 돈에 대한 감각이 잘 자리잡혔다고 생각한다. 학생 시절에는 원수 같았던 학자금 대출이, 지금에 와선 오늘의 나를 만들어준 좋은 스승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생각하니 감사한 마음도 함께 남는다.
지금은 남편이 돈을 벌어오기 때문에 학생 시절처럼 빠듯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비 앞에서 마음이 쉽게 느슨해지지 않는 이유는 그 시절의 감각이 아직도 내 안에 살아 있기 때문이다. 가끔 남편이 “우리가 이럴 정도는 아니지 않아?”라고 말하면, 나는 “나중에 50대, 60대가 되어서 가난해지고 싶지 않아.”라고 답한다. 학생 때 둘 다 돈이 없어 돈 이야기를 많이 했다. 그래서 우리는 돈에 대해서만큼은 정말 잘 통한다. 돈 이야기가 갈등이 되지 않는다는 점은 지금 생각해보면 참 감사한 일이다.
직장에서 사람들이 해외여행이나 국내여행 이야기를 자주 한단다. 그런 말을 들을 때 나는 남편에게 “옥상이 국내여행이야.”라며 옥상으로 데리고 올라간다. 우리는 사귀는 내내, 지금까지 해외여행은 커녕 국내여행도 거의 다녀본 적이 없다. 국내여행 한 번이면 월세가 훌쩍 빠져나가는 게 늘 아깝다. 여행을 다녀오면 뭔가를 배운다고들 하는데 내 경우에는 잘 모르겠다. 여행에서 배움을 얻을 수 있는 사람들은 여행이 값진 선물이 되겠지만, 나는 차라리 집에서 책을 읽는 편이 더 좋다. 우리가 다녀온 여행이라고 해봐야 남도 여행이라 부르는, 1인 2만 원 선에서 가능한 곳이 전부다. 그래도 남편과 함께였기에, 그 기억들만 떠올려도 여전히 마음이 따뜻해진다.
이런 생활을 가능하게 해주는 작은 장치 중 하나가, 매달 구입하는 달걀이다. 한 판에 7천 원에서 8천 원 정도 하는데, 산지에서 사면 훨씬 저렴하다. 내가 이용하는 곳은 일주일에 한 번 번개 특가를 한다. 2만 원이 넘는 90구 달걀을 1만 2천 원에 살 수 있다. 수량이 한정돼 있어 발견하면 바로 사야 한다. 언제 뜰지 몰라 기다리다 놓친 적도 많다. 이번 주에는 꼭 사서 남편 부모님께 드리고 싶다. 이런 소소한 계획을 세우는 일 역시, 나에게는 삶을 붙드는 방식이다.
남편과 만나 사랑하고, 함께 살면서 인생이 참 평안하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우리 둘 다 조용한 걸 좋아해서, 화를 내거나 다투는 일이 거의 없다. 화를 내는 것도, 상대의 화를 감당하는 것도 에너지가 많이 든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화낼 일이 생겨도 차분하게 말하고 대화를 나눈다. 생각해보면, 남편이 평안한 사람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상대가 소리를 지르고 물건을 던지는 사람이라면, 집은 순식간에 전쟁터가 되기 쉽다. 나는 성질을 많이 부릴 것처럼 생겼지만, 실제로는 1년에 한 번 화를 내면 많이 낸다고 할 정도로 화를 내지 않는다. 화를 내면 몸이 아프다는 걸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어서다.
일하고 돌아온 남편은 늘 집에 오면 “잘 놀고, 잘 지냈어? 오늘은 어땠어?”라고 묻는다. 그 질문 덕분에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하루에도 스스로를 탓하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고맙다. 나 역시 남편이 집에서 잘 쉬고, 잘 놀고, 잘 먹고, 잘 잘 수 있기를 바란다. 내 행복이 남편의 행복이 되고, 남편의 행복이 내 행복이 되니까. 남편의 부모님을 살뜰히 챙기는 것도 남편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시댁과의 과거를 떠올리면 행복한 기억보다 불편하고 아팠던 기억이 더 많다. 그래서 지금처럼 잘 지내고 있는 것이 신기하다. 어쩌면 너무 가까이 다가갔기에 마음과 몸이 먼저 타버린 건 아닐까, 그런 생각도 든다. 그러니 가족이든, 친구든 관계에 있어 적절한 거리가 필수라는 생각을 매일 한다.
행복이 별거냐는 생각을 오늘도 한다. 김밥을 언제 싸 먹을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이미 마음이 가벼워진다. 달걀이 많으니 빵을 만들고, 김밥에도 통통하게 넣어 먹어야겠다. 이번 달에는 산지에서 산 국내산 고춧가루 1.8kg에 5만 원을 쓰는 바람에(국내산은 중국산 대비 4-5배 가격을 더 줘야한다.) 이번 달 식재료비 30만 원은 넘겼지만, 남은 날들은 냉장고를 잘 파먹으며 지내면 된다. 달걀도 많고, 무도 있고, 배추도 있고, 김치도 있고, 쌀도 있다. 먹을 게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든든해진다. 김밥 재료도 두 세트나 있다. 벌써부터 행복하다.
이렇게 사소한 선택들 위에, 내가 원하는 삶의 모양이 조금씩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많이 가지지 않아도 불안하지 않은 삶이 있다는 것을, 나는 매일 조금씩 배워가고 있다.
[사진서체: 네이버나눔명조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