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나에게 조금 더 친절해지기로 했다
이 책은 저자의 개인적 경험과 감정, 그리고 그로부터 얻은 심리적 통찰을 바탕으로 구성된 에세이입니다. 등장하는 인물은 모두 사생활 보호를 위해 가명으로 처리되었으며, 실제 인물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본문은 사실을 단정하거나 특정 개인, 단체를 지칭·비난하려는 목적이 없습니다. 인물, 장소, 관계, 시점, 상황의 일부는 가명, 합성, 변형되었으며, 식별 가능한 세부 사항은 변경되었습니다. 유사성이 있더라도 이는 순전히 우연입니다.
이 글에 등장하는 관계와 감정은 특정 인물을 이상화하거나 동일한 관계를 반복하도록 권유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를 삶의 구원자, 기준, 전부로 삼는 관계가 지닌 위험과 그로부터 벗어나는 과정을 기록한 개인적 성찰임을 밝힙니다.
저자는 타인의 명예나 사생활을 침해할 의도가 없으며, 본문의 해석은 전적으로 저자의 주관적 경험과 성찰에 기반한 것입니다. 이 책은 유사한 경험을 지닌 독자에게 위로와 통찰을 전하기 위한 진솔한 기록입니다. 다만, 이 글은 특정한 관계를 미화하거나 모범 사례로 제시하지 않으며, 독자 각자의 삶과 상황에 그대로 적용되기를 전제하지 않습니다.
본문에는 가족 내 학대, 정서적 방임, 상실, 관계 의존 등 트라우마를 환기할 수 있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글을 읽으실 때 스스로의 마음과 안전을 가장 우선하시고, 불편함이나 과도한 감정 반응이 느껴질 경우 언제든 읽기를 멈추셔도 괜찮습니다.
저자는 이 글을 통해 과거를 고발하거나 누군가를 단죄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과 관계를 돌아보며 회복에 이르는 과정을 기록하고자 했습니다. 이 책은 특정 인물이나 집단을 비방하거나 공격하려는 목적이 아닌, 한 개인이 겪은 성장과 치유의 여정을 담은 성찰의 결과물입니다.
이 기록이 비슷한 경험을 가진 누군가에게, 누군가를 대신 살거나 누군가에게 자신을 맡기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건넬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 글이 각자의 속도와 방식으로 회복을 선택할 수 있다는 작은 용기와 희망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 타인의 필요보다 나를 먼저 돌보기로 한 어느 날
[사진서체: 네이버나눔명조체]
[AI 네컷 만화]
최근 들어 예전에 보았던 한 드라마가 자주 떠오른다. 김혜수 주연 '직장의 신' 드라마다. 모든 일을 다 해내는 여주인공이 직장이든 어디든 소속되지 않고, 만능으로 일하면서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그린 드라마였다. 그때는 멋있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한편으론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다 오늘 돌아보니 요즘 시대상과 잘 맞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드라마 속 여 주인공은 정말 못하는 게 없고, 어떤 일을 하든지 거리낌 없이 완벽하게 해낸다. 누군가 무시하더라도 개의치 않고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모습이 지금 생각해도 참 대단하게 느껴진다. 요즘 이 드라마가 부쩍 더 많이 생각나는 이유가 있다. 그 이유는 AI로 대부분의 직업이 대체된다는 요즘 직업 시장에 딱 맞는 인물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어쩌면 이것저것 다 실패한 내가 닮고 싶은 인물이어서 더 생각나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요즘 나는 앞으로 무엇을 해야 먹고살 수 있을지 많이 고민하고 있다.
오늘의 나는 늘 타인의 필요를 먼저 살피며 살아온 사람이 자기 삶의 기준을 다시 세우는 시기를 지나고 있다. 하루들을 살아가면서 과거를 돌아볼 시간이 참 많아졌다. 별달리 하고 싶은 게 없고,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느끼는 것에 대한 순기능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시간이 없고 바쁘면 과거를 돌아보기는커녕 주변에서 뭐라고 해도 신경 쓸 겨를이 없다. 그런 나날들을 보낸 덕분에 과거를 마주하지 않을 수 있어 좋았는데, 요즘은 정말 시간이 많아져서 어쩔 수 없이 많은 부분이 들여다봐진다. 진작했으면 이렇게까지 힘들진 않았을 텐데라는 생각이 들지만 지금이 딱 내게 맞는 시기여서 적기라는 생각도 든다.
시간이 많아져서 요즘은 집안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보이는 즉시 정리를 하고, 쓰레기를 정리하고, 나와 남편에게 딱 맞도록 집안을 구성하고 있다. 예전엔 항상 공부하러 나가고 아르바이트를 하러 나가느라 집안 꼴이 엉망이었다. 요즘은 시간이 많으니 이런저런 곳을 돌볼 시간이 많아졌다. 정리하면 바로바로 눈에 보이기 때문에 완성 후 성취감을 즉시 느낄 수 있다.
집안일을 하면서 내게 필요한 것들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예전엔 타인의 필요에만 눈에 불을 켜고 채워주려고 했었다. 요즘의 나는 타인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게 됐다. 진작 나를 우선순위에 두고 챙긴 후 타인을 돌봤다면 오늘의 삶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생각할 때면 세월이 아쉽다. 그리고 참 사람이 바뀌기 어렵구나라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된다. 실패에 실패를 거듭한 덕분에 나를 바꾸려고 생각한 거지, 이런 상황을 맞이하지 않았다면 관성대로 살았을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한일 삶통을 알게 된 건 3월에 있을 시누이 언니 생일을 준비하면서다. 서로 선물을 주고받지 말자고 부탁했었는데 언니는 내게 선물을 너무 주고 싶단다. 문제는 내가 뭔가를 받으면 반드시 줘야 하는 성격이라, 거절에 거절을 거듭하다 존중하기로 했다. 상대방이 원하고, 하고 싶다는데 거절하는 게 능사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래서 내 생일에 선물을 받았으니, 언니 생일에 어떤 것을 선물해야 가장 좋을지 고민했다. 그 고민 과정 중에 발견한 제품이 한일 삶통이다.
두 살배기 아이를 키우고 있는 언니는 매일 젖병과 식기들을 삶는 데 많은 시간을 쓰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이 제품이 언니에게 정말 좋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장바구니에 담았다. 가까운 시일 내에 혹시 이 제품이 언니 마음에 드는지 물어보고 선물할 생각이다.
선물을 준비하면서 갑자기 이 제품이 내게 필요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20대 중반(그 이전부터겠지만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다) 무렵부터 천 생리대를 사용했기 때문에 매달 세탁과 소독 과정이 힘들었다. 그런데 이 제품은 넣기만 하면 알아서 삶아진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내가 먼저 필요하겠는데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매달 2~3번 사용하려고 16만 원 기계를 구입하는 게 합리적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다 결국 구입했다. 거의 15년을(그 이상) 여성용품을 구입하지 않았으니 기곗값 정도는 회수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드디어 엊그제 사용해 봤다. 어찌나 편안하고 좋던지, 진작 구입할 걸이라는 마음이 들었다.
가끔 타인을 위한다며 준비한 선물들이 내게 가장 필요한 물건이라는 사실을 깨닫곤 한다. 이번 구입 역시 그랬다. 과거 타인의 선물들을 준비하면서 나는 나의 필요와 욕구를 아주 자연스럽게 무시하곤 했다. 같은 돈을 쓰는 거라면 나보다 타인이 훨씬 더 필요할 거고, 잘 사용할 거라는 생각을 해서였다. 그래서 나는 타인의 필요에 민감하고, 나 자신에게는 유난히 구두쇠처럼 굴었다. 타인의 필요를 챙기면 칭찬과 인정, 애정을 얻을 수 있으니 나에겐 더할 나위 없는 선택이었다.
지금은 내 필요와 욕구를 깨달으면 가장 먼저 내 필요를 채우려고 노력한다. 타인의 필요는 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일 뿐, 사실 타인에게 정말 필요한지 알 수 없다. 사람은 자신의 입장에서 타인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무리 타인을 위한다고 해도 완벽히 상대방을 위할 수는 없다. 상대방을 위한다고 오지랖을 부리다 오히려 역효과가 나는 경우도 다반사다. 그리고 엄청 위하다 한번 덜 위했다고 욕을 먹는 일도 있다.
삶통을 구입한 후 이렇게 좋은 제품을 진작 구입했더라면 매달 고생을 덜 했을 텐데라는 마음이 들었다. 10만 원짜리 화장품 하나를 사는 것보다 이 제품 하나면 일주일이 편안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날그날 삶고 세탁하고 말렸으면 여러모로 부담이 덜했을 것이다. 여성들의 경우 매달 있는 주기를 웬만해선 거를 수 없으니, 이 과정을 생리가 끊어지는 날까지 계속해야 한다. 특히 나처럼 여성용품이 전혀 맞지 않는 사람의 경우(유기농도 안 맞다.) 천 생리대는 정말 필수다. 병원에서 말하길 알레르기가 심각할 정도로 있다고 했다. 어떤 합성 물질이 알레르기를 일으키는지는 알 수 없지만, 사람마다 피해야 하고 안 맞는 것이 있으니 그냥 피할 수밖에 없다. 매달 염증과 고통을 감당하면서 병원에 다니고 약을 먹거나, 불편함을 감수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나를 위해 구입한 삶통은 내 삶을 조금 더 편안하게 해 줬다. 그리고 스스로를 챙겼다는 생각에 뿌듯함을 느꼈다. 일단 내가 사용해 보고 좋았으니, 3월 언니 생일 선물로 괜찮은지 물어봐야겠다. 필요하지 않다고 하면 돈 굳는 거지라는 마음으로 가볍게 준비해 본다. 사실 필요한 걸 사라고 돈으로 주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일 수도 있으니까.
삶통을 구입하고 사용해 보니 지난 15년이 억울하게 느껴진다. 앞으로는 타인에게 보다 나 스스로에게 가장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이 글을 기록한다. 실제로 심리학에서 스스로에게 좋은 사람이 되어주는 사람이 타인에게도 좋은 사람이 되어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니 뭐든 나부터 사랑하는 것이 가장 최우선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요즘은 매일 하고 있다.
이 글은 내가 나에게 조금 더 친절해지기로 한 기록 중 하나로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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