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용서는 했지만 그 자리로 돌아가지 않는다.
이 책은 저자의 개인적 경험과 감정, 그리고 그로부터 얻은 심리적 통찰을 바탕으로 구성된 에세이입니다. 등장하는 인물은 모두 사생활 보호를 위해 가명으로 처리되었으며, 실제 인물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본문은 사실을 단정하거나 특정 개인, 단체를 지칭·비난하려는 목적이 없습니다. 인물, 장소, 관계, 시점, 상황의 일부는 가명, 합성, 변형되었으며, 식별 가능한 세부 사항은 변경되었습니다. 유사성이 있더라도 이는 순전히 우연입니다.
이 글에 등장하는 관계와 감정은 특정 인물을 이상화하거나 동일한 관계를 반복하도록 권유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를 삶의 구원자, 기준, 전부로 삼는 관계가 지닌 위험과 그로부터 벗어나는 과정을 기록한 개인적 성찰임을 밝힙니다.
저자는 타인의 명예나 사생활을 침해할 의도가 없으며, 본문의 해석은 전적으로 저자의 주관적 경험과 성찰에 기반한 것입니다. 이 책은 유사한 경험을 지닌 독자에게 위로와 통찰을 전하기 위한 진솔한 기록입니다. 다만, 이 글은 특정한 관계를 미화하거나 모범 사례로 제시하지 않으며, 독자 각자의 삶과 상황에 그대로 적용되기를 전제하지 않습니다.
본문에는 가족 내 학대, 정서적 방임, 상실, 관계 의존 등 트라우마를 환기할 수 있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글을 읽으실 때 스스로의 마음과 안전을 가장 우선하시고, 불편함이나 과도한 감정 반응이 느껴질 경우 언제든 읽기를 멈추셔도 괜찮습니다.
저자는 이 글을 통해 과거를 고발하거나 누군가를 단죄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과 관계를 돌아보며 회복에 이르는 과정을 기록하고자 했습니다. 이 책은 특정 인물이나 집단을 비방하거나 공격하려는 목적이 아닌, 한 개인이 겪은 성장과 치유의 여정을 담은 성찰의 결과물입니다.
이 기록이 비슷한 경험을 가진 누군가에게, 누군가를 대신해 살거나 누군가에게 자신을 맡기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건넬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 글이 각자의 속도와 방식으로 회복을 선택할 수 있다는 작은 용기와 희망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AI 그림
[사진서체: 네이버나눔명조체]
[AI 컷 만화]
중국 드라마 <전경기>의 스포가 될 수 있으니, 주의 바랍니다. 결말 포함 주의.
며칠 전 지난주부터 보기 시작한 중국 고장극 드라마 <전경기>를 완드 했다. 이 드라마를 보기 시작한 이유는 내가 좋아하는 여자 배우가 출연하기 때문이다. 나는 무료할 때 중국 드라마를 보곤 하는데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어릴 때 고통스러운 환경 속에 놓일 때마다 나는 새벽 늦게까지 중국 드라마를 시청했다. 당시엔 할아버지와 같은 방을 사용하고 있었고, 그 방의 텔레비전은 24시간 쉴 새 없이 틀어져 있었다. 그래서 X파일, 정무문, 포청천 등 다양한 드라마를 섭렵할 수 있었다. 그때 등장인물들의 이야기들을 보면서 감정적으로 무너지는 걸 회피했던 것 같다. 덕분에 학교에 가면 매일 졸아서 선생님께서 집에 전화를 하시는 일이 잦았다. 그때는 그 드라마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 시절을 견딜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지금 돌아보면 사람은 감당하기 어려운 시기에 적절한 회피와 무반응으로 시간을 버티기도 한다는 생각이 든다.
최근엔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꿈에서 종종 만난다. 그럴 때마다 이제는 돌아올 수 없는 곳에 가셨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이 내쉬어지곤 한다. 그리고 가끔 쉴 새 없이 틀어져 혼자 떠들던 텔레비전 앞에 내가 누워 있는 모습이 보이곤 한다. 꿈속에선 10살 정도 된 작은 여자아이가 텔레비전에 눈을 고정한 채 애국가와 색상이 들어간 줄무늬 화면이 뜰 때까지 텔레비전을 보고 있다. 그 꿈을 꾸고 일어났을 때 생각했다. 이때의 나는 무엇을 회피하고 있었을까. 그리고 할아버지는 무엇으로부터 살아남았기에 조용한 시간과 공간을 견딜 수 없었던 것일까.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을 보면, 그 사람들은 조용한 시간과 공간을 견디기 위해 끊임없이 무언가를 틀어놓고, 보고, 듣고, 몰입한다. 나도 그랬고, 국가적인 재난에서 살아남은 친척 아버지도 그랬고, 할아버지도 그러셨던 것 같다. 그 꿈을 꾸고 나서 오랫동안 생각했다. 할아버지가 건너온 시간 속에서 무엇을 잃었기에 그 고요를 견딜 수 없었을까. 그리고 나 역시 지금까지 쉴 새 없이 무언가를 틀어놓으며 그 시간을 덮어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 이후로는 가능한 한 조용한 시간과 공간을 내게 허락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엊그제 완드 한 <전경기> 드라마는 여자 주인공이 게임 속 고대 시대의 농촌에 들어가 연씨 가족의 일원이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전형적인 농경 가족과 극단적인 가부장제를 그리고 있다. 어린 시절 비슷한 환경 속에 살았기 때문에 이 환경과 이야기가 굉장히 내게 익숙했다. 익숙한 편안함과 동시에 견디기 어려운 불편함이 함께 올라왔다.
드라마는 시작부터 주인공을 부잣집 영혼결혼식 신부로 500냥에 팔아버리는 사건으로 전개된다. 주인공은 화형이라는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친다. 그리고 현실로 돌아가기 위해 1000냥을 벌어야 하는 조건 때문에 게임을 끝까지 이어간다. 이 드라마를 보면서 내가 본 것은 이야기 자체가 아니라, 가족 안에서 고착된 역할의 구조였다. 가해는 반복되고 묵인되며, 피해자는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한 채 계속 감당하게 되는 구조다.
회피하는 할아버지, 그 공백을 메우며 독해진 할머니, 집안을 세울 존재라는 이유로 모든 것을 독점하는 큰 아버지, 그를 지지하는 가족들, 그 안에서 계속해서 밀려나는 사람들. 이 모습이 너무 익숙해서 오히려 견디기 어려웠다. 나는 드라마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살아왔던 장면들을 다시 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드라마는 주인공이 어려움을 하나씩 뚫고 나가는 과정을 그린다. 그 안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가족 내의 문제들을 해결해 간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찢어졌던 가족들이 다시 한 집에 모여 서로를 용서하고 받아들이며 마무리된다. 주인공은 1000냥을 모아 현실로 돌아오고, 게임 속 NPC라고 생각했던 남자 주인공이 같은 플레이어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며 두 사람이 현실에서 만나는 장면으로 끝난다.
이 드라마를 보고 이틀 동안 아팠다. 목이 잠기고 열이 나고 염증이 생겼다. 드라마 하나를 보고 이렇게까지 몸이 반응할 수 있다는 사실이 낯설었다. 상처가 충분히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비슷한 구조를 가진 이야기가 단순한 감상이 아니라 신체 반응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걸 그대로 겪은 셈이다. 내가 화가 났던 이유는 고통 자체 때문이 아니라, 그 고통이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덮이는 방식 때문이었다.
사람을 죽음의 자리로 팔아넘긴 가해자, 그 사실을 알면서도 덮어버리는 가족, 피해자를 견제하고 방해하는 사람들, 생존에 필요한 것조차 빼앗는 분위기, 그리고 효라는 이름으로 가족 안에서 자신의 아내와 자식보다 부모를 우선시하는 아버지까지. 이 모든 것이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은 채 마지막에 ‘이제는 다 이해하고 함께 살자.’로 끝난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같은 공간에 있을 때, 가해자를 두둔하는 사람들과 자신이 피해자가 되지 않기 위해 침묵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구조 안에서 피해자는 계속 피해자로 묶여 있게 된다. 그 장면을 보면서 나는 그 자리에 내가 서 있는 느낌이 들었다.
용서는 할 수 있어도, 다시 그 자리로 돌아갈 필요는 없다. 이 문장에 도달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우리는 너무 자연스럽게 ‘용서를 했으면 다시 잘 지내야 한다.’는 전제를 받아들이며 살아왔다. 이제 용서했잖아, 언제까지 그럴 거야, 예수님은 원수도 사랑하라고 했어. 이 말들은 나 자신을 무너뜨리게 만들었던 말들이었다. 제대로 된 사과도 받지 못한 채 죄책감과 수치심을 떠안고, 가해자와 다시 화합하는 척해야 했던 순간들. 그리고 그 관계는 내가 그 자리에 서 있는 한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반복됐다.
용서는 관계를 복구하기 위한 절차가 아니라, 나를 묶고 있던 감정을 끊어내기 위한 선택에 가깝다. 그래서 용서와 재회는 전혀 다른 문제다. 드라마이기 때문에 그렇게 끝날 수밖에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 결말이 답답했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는데,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묶이는 장면. 그게 현실이었다면 나는 그 안에서 다시 무너졌을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그 모든 것이 게임이었고, 주인공이 그 세계를 완전히 빠져나왔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그 장면을 보면서 생각했다. 이제 나도 내 세계로 돌아가야겠다고. 과거의 나는 수없이 많은 용서를 하며 살아왔다. 특히 친부는 술을 마시면 자주 “죽고 싶다.”라는 말과 “나중에 후회할 거다.”라는 말을 하셨다. 그 말속에서 나는 그가 어린 시절에 나를 버렸다는 사실을 잊고 그의 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가 준 역할 속에 늘 붙잡혀 있었다. 과거의 나는 항상 그의 죽음이라는 감정 앞에 서 있었다. 언제 돌아가셔도 이상할 것 같지 않은 그의 생활패턴을 보면서, 내가 모르는 사이 그가 세상에서 사라질까 봐 두려웠다. 그 두려움이 효라는 이름으로 그 앞에 다시 서게 만들었다. 지금에 와서야 아버지의 삶과 고통은 내가 감당해야 할 것이 아니라 그 스스로 감당하고 세워가야 하는 것이라는 걸 알게 됐다.
심리 공부를 하면서 용서와 재회는 전혀 다른 문제라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나를 피해자 자리에 세웠던 사람들은 내가 세상에서 소거될 때까지 지속적으로 무엇인가를 받아내려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이제야 든다. 죽음의 위기 앞에 선 내게 두 아버지가 말했다. “차라리 죽어버리지.” 그 말을 듣고 나는 차라리 내가 죽은 사람이라고 생각해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이 말을 친동생에게 한 적도 있다. “내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살아가 줘.”라고 말이다. 그래야 비로소 그들 속에 만들어진 내 자리를 지우고, 내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용서와 다시 만나는 건 다르다. 지금 돌아보면 이 말은 내가 살아남기 위해 붙잡고 있었던 문장이다. 드라마 속 주인공이 게임을 빠져나와 자신의 세계로 돌아온 것처럼, 나도 이제 내 세계로 돌아가려고 한다. 나는 나일 뿐이다. 내 인생은 누군가의 소모품이 되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다. 오늘도 나는 그 말을 스스로에게 해준다. 이제 나는 내 시간과 공간, 힘과 재정을 죄책감 없이 온전히 나를 위해 사용할 것이다. 그리고 이제 나쁜 관계는 가족이든 무엇이든 진짜 아웃이다. 두 번 다시 내게 아픈 감정을 허락하지 않겠다고, 나를 아프게 하는 관계와 상황에 나를 놓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글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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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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