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하지는 않았습니다만..
미각이 없어졌다.
그것은 어느 날 갑자기 깨닫게 되었다.
맛있어 보이는 초콜릿 케이크를 사서 배송받은 날이었다.
초콜릿 향이 꽤 진한데도 맛은 담백해서, 마음에 쏙 드는 케이크를 만났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마음에 드는 경우는 드물다.
이건 무조건 더 사둬야겠다고 생각하고, 그 케이크를 파는 사이트를 다시 찾았다.
남들도 같은 생각이겠지 싶어 케이크 후기를 찾아봤는데, 너무 달아서 못 먹겠다는 원성이 자자했다.
그때 알았다.
내가 겪는 코로나 백신 부작용 중에 미각 상실도 포함되어 있었다는 걸.
미각이란 감각에 기억이 더해지는 것 같다.
난 단맛을 좋아했는데, 미각이 사라지고 난 후 단맛의 빈자리엔 그 맛의 기억조차 사라져 있었다.
짠맛도 신맛도 어떤 느낌인지 기억나지 않았다.
처음 몇 달 동안은 내가 좋아했던 맛을 다시 느끼고 싶은 갈망이 내 모든 시간을 지배했다.
그것은 꽤 힘든 시간이었다.
달디단 바닐라 라떼나 구수한 된장찌개, 짭짤한 감자튀김 같은 것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워도, 먹어본들 아무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리 먹어도 맛이 느껴지지 않으니, 결국 영영 먹지 못한 것과 다르지 않았다.
먹어도 먹은 게 아니다.
먹는다는 건 단지 배고파서가 아니라 맛을 느끼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미각을 박탈당하고 보니, 나에게 먹는다는 건 에너지를 얻기 위한 일이라기보다 맛의 즐거움을 위한 일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뭔가를 먹고 싶다는 생각은 결국 미각을 기쁘게 하고 싶은 욕망이었다.
불교에서는 수행하는 이들에게 오신채를 금한다고 한다.
강한 자극을 멀리하고 감각에 대한 욕심을 다스려 마음을 평화롭게 하라는 뜻일 것이다.
내 미각은 그저 운이 나빠 사라졌을 뿐, 그런 깊은 뜻과는 무관하다.
하지만 지나고 보니, 의도치 않게 오신채를 포함한 모든 미각을 멀리하면서 마음이 평화로워진 것 같기도 하다.
어쩌다 보니, 운 좋게 수행자들과 비슷한 곳에 가 닿은 것 같다.
갱년기 세계에서는 미각이 있던 사람도 점차 미각이 무뎌진다고 한다.
나이가 들면 이전보다 더 간이 센 음식을 찾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고 했다.
나야, 그전에 이미 미각이 없어졌기 때문에 미각 부문에 있어서는 오히려 익숙하다.
난 이미 미각 없음의 경력자니까.
미각이 사라지고 먹어도 먹는 게 아닌 시간이 지나자, 난 음식에 휘둘리지 않게 되었다.
맛집을 찾을 필요도 없고, 더 맛있는 것을 위해 시간과 돈을 할애할 필요도 없어졌다.
맛없는 걸 먹어도 억울하지 않고, 똑같은 것만 먹어도 질리지 않는다.
요리를 한다는 행위도 의미가 없어졌다.
유사 이래 인류에게 요리법이 발전한 이유는 혀의 감각에 즐거움을 주기 위함이리라.
그 즐거움이 아무것도 아니게 되면, 그저 재료가 소화가 잘 되게 익히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그렇게 남는 시간과 에너지는 내가 좋아하는 다른 것을 하기 위해 사용하면 된다.
예를 들면, 가만히 누워서 음악을 듣는다거나 하는.
세상에, 이거 꽤 이득이잖아!
물론, 조심해야 할 점도 있다.
모든 음식은 냉장고에서도 서서히 변하기 마련인데, 그 변함의 정도를 알 수 없다.
누군가를 기미상궁으로 활용할 수도 있지만, 그런 파렴치한 행동을 하지 않는 경우 영문도 모르고 두 계절 정도 배탈을 달고 지낼 수 있다.
그럼 그냥 냉장고에 보관하는 음식을 다 치우면 될 일이다.
식사 후 양치를 했는지 여부도 입안의 느낌으로는 알 수 없는데 그냥 시간을 정해서 양치하면 된다.
미각에는 온도감각도 포함이 되는지, 차고 뜨거운 정도도 잘 구분이 되지 않는데, 심하게 혀를 데거나 너무 차가운 걸 먹고 몸이 덜덜 떨리기도 했었다.
그럼, 너무 극단적인 온도의 음식으로 보이는 것들은 피하면 될 일이다.
너무 달고, 너무 짜도 모르고 계속 먹다가 건강에 위협이 될 수도 있다.
그럼 음식을 사기 전에는 성분표와 후기를 꼼꼼히 살펴보면 된다.
대신 통각도 무뎌져서, 맵찔이었던 내가 매운 음식도 잘 먹게 되었다.
어쨌든, 미각이 없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 상황에 대한 노하우는 늘어났고, 점차 적응이 되어갔다.
햇살이 좋아서, 비가 와서, 바람이 불어서, 노을이 예뻐서.. 온갖 이유로 내 머릿속을 가득 메우고 지갑을 지배했던 맛들은 없어졌다.
기분이 좋지 않아서 원했던 맛, 기분을 내려고 원했던 맛도 다 의미 없어졌다.
날씨와 나는, 기분과 나는 맛이라는 매개체 없어도 직접 만날 수 있다.
맛을 지우고 나면, 모든 것과 더 고요하고 깊게 소통할 수 있다.
법정 스님이 말씀하셨던, 무소유란 바로 이런 것이리라.
맛에 대한 집착이 사라지면서 맛으로부터 자유를 얻었다.
아마 이런 계기가 아니었다면, 번번이 풀소유를 지향했던 내가 무소유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리가 없다.
어쩌면, 미각이 없다는 건 결핍이 아니라 미각 없음을 더한 상태인 건지도 모르겠다.
코로나 백신 부작용을 거쳐 갱년기 세상의 미각법칙까지 겹쳐져, 어쩌면 앞으로도 이 상태는 꽤 지속될지도 모르겠다.
가끔 다른 통증으로 한의원에서 침을 맞고 온 후, 맛이라고 까지 부르기엔 부족한 어떤 자극이 혀에 짧게 스치고 지나가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찰나의 일.
그 시간이 지나면 다시 제자리다.
아마, 범인으로서의 나에겐, 무소유를 체험하는 시간이 좀 더 필요한 게 아닐까.
그렇다면, 이 체험판을 더 누리면 될 일이지.
가끔은, 자주 가는 카페에 예쁜 신음료가 출시되면 궁금해지기도 한다.
그럼 누군가와 함께 가서 예쁜 그 음료를 다 마시고 난 후 묻는다.
“그런데 이거 무슨 맛이야?”
[히치하이커의 메모] 맛의 무소유, 나쁘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