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분 탓이겠죠.
날씨는 감정을 비추는 스크린 같다.
나는 아픈데, 창밖에 비치는 햇빛이 너무 반짝이는 날.
날씨에 위로를 받기는커녕, 놀림받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해를 가리거나 비를 한바탕 쏟는 것으로, 날씨가 내 통증에 동조하길 바랐던 건 아니다.
나는 골골거리는데, 그런 일 따위 아무 상관없다는 듯 냉정하리만치 화창한 날씨가 그저 얄미웠다.
아직 초록이 강해지지 않은 가로수의 연둣빛 잎사귀들이 햇빛에 반짝이며 바람에 살랑거릴 때면, 괜히 짜증이 솟는 날이 있다.
그렇다고 폭풍우가 몰아치면 위로가 되냐면, 또 그렇지도 않다.
날씨에게서 받는 위로, 그거 어떻게 하는 건데.
그날도 무심하게 날이 좋았다.
짜증 나기 딱 좋은 날씨였다.
대체 어디가 그렇게 아픈 거냐고 누가 묻는다면, 모호한 통증의 구름 속에 갇힌 것 같아서 정확히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딱 집어 말할 수 없다. 그래서 더 답답하고 짜증스럽다.
그냥 아프다고 하기엔 풀어놓고 싶은 사연이 많은데, 그렇다고 막상 판을 깔아주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
갱년기의 통증이란, 언어로 그려내기가 호락호락하지 않다.
이렇게 아플 거면, 그냥 호르몬약을 먹고 잠깐만이라도 무통의 시간을 누리는 건 어떨까.
금기증이니 부작용이니 하는 것들, 어쩌면 나는 다 비껴갈 수 있지 않을까.
잠깐만이라도 평화로운 3일 정도를 향유해 본 다음 약을 끊으면 괜찮지 않을까.
아무 근거 없는 희망회로를 돌려봤다.
구름 한 점 없는 높은 하늘과 눈 시린 햇빛이 괜히 원망스러웠다.
다 집어치우고 내일은 병원에 가서 호르몬약을 달라고 해보면 어떨까.
다짐했다가, 망설였다가, 없던 일인 셈 치다가, 다시 다짐하기를 반복했다.
아주 오랜만에, 아는 언니로부터 메시지가 왔다.
MBTI로 표현하자면 FFFF인, 공감능력 무형문화재급 사람이다.
"요즘 어떻게 지내?" 내일의 일을 다짐하기 바빴던 난, 그 메시지가 도착하고도 한참 뒤에야 발견했다.
수술했다는 얘기를 꺼냈는데, 언니는 아무래도 잘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래서 짧게, 다시 한번 설명했다.
‘그러니까.. 중성화했다고요.’
그리고는 서로 한동안 ‘ㅋ’ 수십 개를 잔뜩 주고받았다.
웃음이 잦아들 무렵, 수술의 결과로 따라온 갱년기 증상들을 압축해서 경험하느라 요즘은 일상생활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덧붙였다.
내가 보낸 메시지 옆에 붙은 1은 바로 없어졌지만 잠시 답이 없었다.
이 언니는 갱년기를 아직 모르는 나이다.
그러나 무형문화재의 감으로 뭔가 강한 문장을 보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곧 이런 문장이 도착했다.
"나라면 진짜 죽고 싶었을 것 같아.”
짧은 문장이 내 가슴에 화살처럼 날아와, 응어리진 짜증 한가운데 정확히 꽂혔다.
짜증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논어』에 "군자는 다른 사람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워하지 않는다"라고 했지만 나는 군자가 아니다.
알아준다는 건, 이런 거구나.
그렇게까지 힘들 거라고 생각되는 상황이라면, 난 사실 꽤 잘 버티고 있는 편이잖아.
사실 그 정도까지 힘든 건 아니었지만, 어깨가 으쓱 솟아오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어느새 나는 정신을 차리고, 히치하이커의 길 위로 돌아와 있었다.
당장 내일 호르몬약 처방을 받고 말겠다는 다짐은 어느새 잊어버렸다.
대신 그동안 모아둔 ‘증상별 약 효과’ 메모장을 열어, 그날의 나에게 도움이 될 만한 항목들을 훑었다.
잠깐 히치하이커의 본분을 잊을 뻔했다.
나는 나의 길을 찾아가야지.
구름 한 점 없는 높은 하늘과 눈부신 햇빛이 찬란했다.
길을 찾기 딱 좋은 날씨다.
[히치하이커의 메모] 다시, 길을 걸어나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