얇게 입을 결심

괜찮아, 갱년기야

by 차은설

사시나무가 사람으로 태어난다면, 나다.


아니, 과거형이다.


난 사시나무 인간이었다.


어릴 때부터 추위를 많이 타기로 소문난 아이였다.


그냥 좀 추워하는 게 아니라 항상 꽁꽁 얼어있었다.


여름옷은 남들보다 늦게 입었고, 겨울옷은 누구보다 빨리 꺼냈다.


모든 계절동안 손발은 얼음장이었고, 체온은 언제나 겨울에 머물러 있었다.



진짜 사시나무 인간들에게는 독특한 특징이 있다. 바로 두꺼운 양말은 신지 못한다는 것.


두꺼운 양말 안에서 발이 내뿜는 냉기는, 오도 가도 못한 채 그 안에서 발을 축축하게 얼려버린다.


나에겐 분명 사시나무로 살았던 전생이 있을 것 같다.




평생 사시나무 인간으로 살아왔던 나는, 사실 마음속 깊이 ‘몸에 열이 많은 사람들’을 동경해 왔다.


그들은 눈보라 치는 날에도 손이 따뜻했고, 롱패딩이나 코트를 잠그지도 않고 다녔으며, 장갑도 없이 아아를 들고 다녔다.


사시나무 인간에게 멋이란 이런 것이었다.




그런 내가, 갱년기 세계에서 그 동경해 마지않던 홍삼 인간이 되었다.




내가 갱년기 세상에 처음 도착한 때는, 여름이었다.


에어컨 앞에서도 손끝이 따뜻했다.


이 낯선 감동이란.


그 감동의 며칠을 지낸 후, 갑작스러운 진땀의 밤을 며칠간 거쳐, 최종적으론 땀이 많은 홍삼인간이 되었다.


동경해마지 않던 홍삼 인간이긴 한데, 좀 많이 그릇된.




그때부턴, 모든 시간이 더웠다.


내가 덥다고 인지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내 몸은 여지없이 땀을 흘리고 있었다.


덥고 눅진한 기운이 가득한 투명한 막 안에 갇혀 있는 것 같았다.





홍삼 인간들이 사는 천국은 일 년 내내 겨울일 게다.


한겨울, 얇은 옷 하나에 장갑도 없이 아아를 든 채 겨울바람을 맞는 것.


홍삼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순간이 아닐까.


그러나 땀이 많은 홍삼 인간이라면, 겨울은 더 이상 천국이 아니다


대문을 나서면 얼마 가지 않아 땀으로 범벅이 되고, 아아를 손에 쥘 때쯤엔 이미 반쯤 탈진해 버린다.




사시나무 인간의 겨울옷과, 홍삼 인간의 겨울옷이란 같을 수 없다.


북극의 겨울과 적도의 겨울이 같을 리 없는 것처럼.


적도로 이사 오면서 북극에서 입던 옷을 그대로 입어서야 땀으로 범벅이 될 수 밖에.


그걸 여러 번의 탈진을 겪고서야 깨닫게 되었다.




습관이란, 무의식에 단단히 박혀 어렵게 얻은 깨달음을 번번이 넘어선다.


갱년기 세계에서도 여전히 아침마다 습관적으로 두꺼운 옷을 집어 들었다.


전날 밤 미리 얇은 옷을 꺼내놓고 잠들어도, 아침이 되면 ‘왠지 그래도 이건 좀 춥지 않을까.’라며 망설였다.


그리고는 종일 땀 흘리며 후회했다.


그럴 때마다 '내일은 꼭 얇게 입으리라' 다짐했고, 내일의 나를 설득했다.


'아침엔 무조건 전날의 결심을 믿는다.’




땀을 다스려 주겠다는 곳은 한의원뿐이었다.


“지금은 급격한 호르몬 부족에 몸이 적응하지 못해서 힘든거지만, 10년쯤 지나면 그땐 몸도 적응해서 괜찮아지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요.”


10년이요!?


“10년 금방이죠.”


이건 분명 격려이자 위로겠지. 그런데 왜 눈에서도 땀이 나는 거지.




한의원 치료는 땀으로 탈진하는 홍삼 인간을 그저 좀 땀이 많은 홍삼 인간으로 바꿔주었다.


시간은 사시나무였던 전생의 기억을 조금씩 지워주었다.


이제 얇게 입을 결심 없이도 얇게 입을 수 있다.


그 얇은 옷조차 가끔은 땀으로 적시지만.


괜찮아, 갱년기니까.





[히치하이커의 메모] 어떤 나여도 괜찮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