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눈물을 기억하라.
살면서 내 몸의 혈관 모양을 알 수 있는 경우는 드물다.
하지만, 머릿속의 혈관 모양을 선명한 감각으로 느낀 날이 있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머릿속과 눈이 좀 답답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오전엔 내내 모니터의 빛이 썩 편하지 않았다.
오후가 되면서 통증은 머릿속에서 서서히 제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마치 혈관이 스스로의 형태를 드러내듯, 팽팽하게 잔뜩 부풀어 올라있었다.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었다.
조금만 잘못 움직여도 곧 터질 것 같았다.
그래도 경험적으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걸 안다.
‘머리는 생각처럼 쉽게 터지지 않지.’
그러나 어떤 두통약도 듣지 않았다.
속은 울렁거리고 곧 토할 것처럼 입안에 신침이 돌았다.
미각은 없어도 침샘은 이렇게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존재를 드러낸다.
손발이 차갑게 굳어가고 식은땀이 흘렀다.
퇴근시간을 기다리다가 혹시 집이 아니라 응급실로 가야 하는 건 아닌지, 혼란스러웠다.
너무 아플 땐 핸드폰에서 나오는 빛, 시계의 초침소리조차 감각을 헤집어 놓는다.
그때 내가 바랐던 것은, 오로지 조용한 어둠뿐이었다.
어릴 때 잠깐 집에서 돌보던 작은 강아지는 아플 때마다 가구 틈새로 파고들어 손이 닿지 않았다.
안아주고 눈을 맞추고 쓰다듬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혼자 어두운 그늘 속으로 파고드는 강아지가 여간 서운한 것이 아니었다.
이제 와서야 그 강아지의 마음을 알 것 같다.
아픈 강아지처럼, 집에 도착하자마자 불을 끄고 어둠 속에 숨었다.
다음날, 여느 날과 다름없이 아침 햇살에 눈을 떴다.
동향집에선 암막커튼 사이에 조그마한 틈만 있어도, 그 사이로 새어든 햇살이 잠을 깨운다.
어제의 두통은 전생의 기억인 것 마냥 아무렇지 않았다.
그럼 그렇지. 머리는 쉽게 터지지 않아.
씻을 준비를 하러 욕실로 향하던 길에, 무심코 거울에 눈길이 갔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다시 거울 앞으로 다가가 찬찬히 나를 바라보았다.
오른쪽 눈꼬리에서 시작되는 까만 물방울 모양의 자국이 있었다.
마치 내가 잠든 사이, 몸이 힘든 시간을 대신 견디며 남긴 눈물 자국 같았다.
......터.. 진 건가?
그러나, 내 얼굴을 마주 보는 나는 아프지 않았다. 그럼 됐다.
좀비 떼가 나타난대도 직장인이라면 출근해야 한다.
그리고 평소 거울을 자주 안보는 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 자국도 곧 잊어버렸다.
다음날, 다른 치료를 위해 방문한 한의원에서 눈가에 남은 검은 자국 이야기를 꺼냈다.
그런 일이 있었지만, 다행히 괜찮아졌다고.
그러나, 내 의도와 다르게 의사의 얼굴은 심각해 보였다.
‘……생각보다 위험했던 건가.’
이후로 그런 두통은 몇 번 더 있었지만, 그런 멍이 생기는 일은 없었다.
대신 그때마다 심각했던 의사의 표정이 떠올랐다.
그 두통의 기억엔 연말을 앞둔 특유의 다소 들뜨고 어수선한 사무실의 공기와, 찬바람이 불던 깜깜한 퇴근길이 함께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두통은 초겨울에 찾아왔던 것 같다.
겨울 아침, 갑작스러운 찬바람은 혈관을 갑자기 수축시켜서 위험할 수 있으니 보온에 유의하라는 뉴스가 초겨울을 알리는 알람처럼 매해 반복된다.
어릴 때부터 수없이 들어왔던 얘기지만, 그 경고가 나에게도 향하고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왜 그런 얘기는 늘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에게 하는 것이라고 당연히 생각했던 걸까.
호르몬이 없는 갱년기 세상에서는 심혈관계 질환도 주의해야 한다고 했는데..
내가 주의해야 하는 이유는 나이 때문이 아니라, 갱년기 세상에 발 딛고 있기 때문이다.
이 또한, 호르몬의 장난이었던가.
그 겨울은 그렇게 지나갔다.
그리고 봄이 왔고, 긴 여름이 지났다. 그동안 그런 두통은 없었다.
그러나 <왕좌의 게임>에 나오는 윈터펠의 사람들처럼, 다시 돌아올 겨울을 준비해야 한다.
긴 여름동안 쌓아둔 내 몸의 기록들을 무기 삼아 방어벽을 쌓아야 한다.
그리고, 지난 겨울 검은 눈물자국의 기억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른 아침,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눈이 떠졌다.
창을 열고 새벽 공기의 냄새를 맡아보았다.
미처 색이 다 변하지도 못한 나뭇잎들이 알싸한 찬 바람에 떨어져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겨울이 오고 있다.
[히치하이커의 메모] 더 이상 검은 눈물은 없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