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면의 바다를 떠도는 해파리의 꿈

고래가 되고 싶었지만

by 차은설

그러니까 갱년기의 밤은 내 의지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백신 부작용부터 난소 수술까지 오랫동안 환자모드로 지냈다.


그러는 동안 내 시간은 집-병원-회사 사이에서만 흘러갔다.


내 세계도 딱 그만큼으로 좁아져 있었다.


바다를 좋아하던 나였지만, 이렇게 좁아진 세계에 바다가 끼어들 자리는 없었다.




어릴 때부터 나는 바닷속을 유영하는 꿈을 자주 꾸곤 했다.


실제로는 수영을 전혀 못하는데도, 꿈속의 나는 바닷속에서 거침이 없었다.


천적에 대한 걱정 없이 바다를 내 세상처럼 돌아다녔으니 아마 고래가 아니었을까 싶다.


물 위로 뛰어올라 바다를 내려다보고, 수면 아래에서 눈부시게 부서지는 햇빛을 올려다보고, 깊은 바다 아래로 내려가보기도 했다.


그저 땅 표면만을 걷는 사람일 때보다, 공간을 날듯이 바닷물을 가르는 쪽이 훨씬 더 자유롭고 재미있었다.


침대에 누워 잠들기를 기다릴 때면, 난 바다 위에 누워있다고 상상하곤 했다.


잠이 들면서 몸이 천천히 물속으로 가라앉으면 곧 바다를 내 세상으로 품을 고래가 될 기대에 부풀곤 했다.




불면과 함께하는 갱년기 세계의 밤은 길다.


잠이 오지 않을 때는 이런저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게 마련이다.


그렇게 물리고 물린 생각은 이리저리 떠돌다 결국 바다에 가 닿곤 했다.


환자모드인 채로 누워 눈을 감으면 마치 물 위에 누운 듯 평형감각이 흔들린다.


바닷물의 움직임에 몸을 맡긴 듯이 위아래로 양옆으로 흔들리거나 허리를 축으로 빙글빙글 돌아간다.


그러면 귓가에 찰랑찰랑 부딪혀오는 바닷물 소리가 들려오기도 한다.


마치 바다를 유영하는 꿈에 곧 들어갈 것처럼.


그러나 역시 갱년기 세계의 바다는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렇게 물속을 유영할 설렘만을 안은 채, 난 수면 위에 그저 떠있을 뿐이다.


등은 바닷물 속에 잠겨있지만 내 얼굴은 밤하늘과 마주하고 있다.


끝없는 밤하늘과 드넓은 밤바다 그 사이에 누워있으면 하늘과 바다가 모두 내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눈을 떠도, 눈을 감아도 같은 밤하늘이 펼쳐져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면 먼 곳에서 은하수가 천천히 흘러간다.


그러나 나는 끝내 바닷속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환자 모드가 켜진 후로는 이상하게도, 고래가 되어 바다 저 깊은 곳까지 내려가지 못했다.




예전처럼 다시 바다를 유영하기 위해 온갖 것들을 동원해보기도 했다.


따뜻한 우유, 적절한 습도와 온도, 멜라토닌, 마그네슘, 빗소리, 모닥불 소리, 잠 오는 주파수 등등


따뜻한 우유는 바닷속을 여행하기 전에 먹는 간식 같은 것, 적절한 온도와 습도는 여행을 위한 가벼운 옷차림 같은 것.


멜라토닌은 바다 여행의 입장권 같은 것, 마그네슘은 깊은 바다로 가는 지름길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잠이 잘 온다는 각종 소리들은 바다 여행에 듣기 좋은 배경음악 같은 것.


다만, 멜라토닌이나 마그네슘은 가끔 악몽을 가져다주기도 했다.


내 악몽은, 꿈에서 마주친 괴물이나 귀신을 잡겠다고 밤새 쫓아다니다 기력을 다 소진한 채 맞이한 아침, 그 현실이었다.


운이 좋은 날은 저런 방법들의 한 두가지 조합으로 천천히 물속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그러나 고래는 되지 못했다.)


운이 나쁜 날은 같은 조합으로도 쉽게 물속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코끝에 수면이 닿을까 싶으면, 어김없이 갱년기 세계의 기묘한 조류가 나를 다시 물 위로 밀어올렸다.


그런 날은 그냥 틀린 것이다.


밤새 해파리처럼 수면에 둥둥 떠있다가 아침을 맞이하게 된다.


한 번은 진짜 고래가 되리라 맘먹고 꽤 여러 가지 것들을 한꺼번에 시도해 보기도 했다.


그 시도는, 어둡고 깊은 무저갱으로 한없이 추락하는 것으로 실패했다.




잠들기에 성공한다고 끝난 건 아니다.


잠이 들어도 중간에 곧 잘 깨는 게 갱년기 세계의 불면이다.


운이 없으면 중간에 깨서 다시 잠들지 못할 수도 있다.




이상하게도, 나는 항상 같은 시각에 깼다.


한동안 자다 깨서 시계를 보면 매번 2시 15분이었다.


그렇게 노력해도 금방 깨버린다는 게 아쉬우면서도 잘 시간이 아직 많이 남았다는 게 다행인 시간이었다.


최근에는 자다 깨서 시계를 보면 항상 4시 35분이다.


한번 자는 시간이 좀 길어졌다는데 좀 뿌듯하면서도 다시 잠들 시도를 할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는 게 아쉬운 시간이다.


눕는 시간도 잠드는 시간도 매일 달라지는데 중간에 깨서 시계를 보면 매번 같은 숫자를 본다는 건 정말이지 신비롭고 재미있는 일이다.


그래, 이런 재미도 있어야지.




눈을 감았다 뜨면 어느새 아침이 되어있던 세계로는 이제 다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다.


대신 갱년기 세계의 나는 매일 밤 바다로 떠난다.


오늘 밤,

나는 밤하늘과 밤바다 사이에서 고래가 될 것인가, 해파리가 될 것인가.






[히치하이커의 메모] 나는 어쩌면 불면의 밤을 항해하는 마도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