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n’t say you love me

by 차은설

“야, 쟤가 너 좋아한대!”


누군가 소리쳤다.


왁자지껄하던 교실 안은 순간 숨을 참듯 조용해졌다가 모두가 동시에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며 교실밖으로 뛰어나갔다.


내가 “쟤”라고 불렸다는 걸 알게 된 다음 순간 ‘너’라고 불린 아이와 덩그러니 교실에 남겨졌음을 알게 되었다.


금방 도망 나간 수십 개의 눈들이 복도로 난 유리창 너머에서 반짝거리고 있었다.


교실 안엔 숨을 곳 하나 없었고, 운동장으로 난 큰 창으로는 햇살이 아득하게 쏟아져 들어왔다.


강제 고백을 당해버렸을 땐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디에서도 배운 적이 없었다.


틀린 말은 아니다. 맞는 말이라서 더 어쩔 줄 몰랐다.


‘너’라고 불린 애도 날 좋아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입으로 빼앗겨 버린 고백은 이미 빛을 잃었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선택할지 스스로 정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이미 내 것이 아니다.


내 것이 아닌 고백은 여기서 더 이어지면 안 된다.


그게 내 자존심이었다.


난 그 아이에게 눈으로 말했다.


날 좋아한다고 말하지 마.




내 자존심의 근원은 어릴 적 거실 책장에 꽂혀있던 60권짜리 세계위인전집이었다.


그 60명이 전하는 메시지는 한결같았다.


‘중요한 건 너의 가치야. 돈이나 그 밖에 다른 건 중요하지 않아.’


그 시절의 아이에게 어른들의 한마디는 곧 세상의 질서인 법이다.


부모님은 맞벌이로 집에 없었고, 어린 집순이는 심심할 때마다 60명의 위인들과 시간을 보냈다.


자신이 원하는 걸 스스로 선택해 진짜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는 이야기들은 매번 볼 때마다 멋졌다.


내가 직접 선택해 얻는 것만이 진짜 내 것이라는 것.


그렇게, 내 자존심의 중심에는 언제나 그 60명의 이야기가 놓여 있었다.




조금 더 자라서 전공을 정할 때도, 이직을 할 때도 내 선택을 결정한 우선순위는 호기심이었다.


60명 중에 누구도 진로를 정할 때 네가 재미를 느끼는 것에 뛰어들라고 했지 수입을 고려하라고 하지 않았으니까.


그 시절의 사회 분위기도 마찬가지였다


‘돈은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네 열정이야.’라는 메시지가 신문 사회면과 대중 광고의 테마였다.


난 내 선택이 매번 올바르다고 믿었다.


이후, 점점 돈을 중심으로 사회적 가치관이 옮겨가기 시작하고 급기야 돈이 사람의 가치를 대변하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60명에게 전수받은 조기교육의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돈을 좇는 선택, 돈에 휘둘리는 마음, 돈으로 평가받는 사회.


그런 건 그래서 나에게 타격감이 없었다.


내 가치관 안에서 그런 것들은 의미 없다 못해 무가치하고 저급한 것으로까지 분류되어 있었으니까.


시간이 더 지나, 세상의 모든 것을 측정하는 단 하나의 기준이 돈이 되었다는 걸 깨닫게 된 후에도, 그리고 나 또한 그 단위를 함께 사용해야 한다는 걸 알게 된 후에도 그랬다.


오히려, 돈이 중심이 된 세상에서 나만의 도량형을 고안해 내려고 애썼다.


돈이 모든 선택의 중심이자 결과의 측량 단위가 되더라도 난 스스로 내 선택의 중심이 되겠다는 게 내 자존심이었다.


결국 가장 가치 있는 선택은 적어도 돈은 아닐 거라고 믿었고, 그 믿음을 고수하는 나는 돈보다 조금 더 우월한 가치를 지닌 인간일 거라고 믿었다.


그 믿음에 최소한 60명은 내 편이라는 것도.

(그리고 아마 그 60명 말고는 아무도)




갱년기 세계에서 나의 중심은 건강이다.


건강이 모든 선택과 결과를 지배한다.


진천에 입소할 정도의 체력을 바라는 게 아니다.


그저 일생상활에 방해받지 않을 정도의 컨디션을 유지하는 것.


오로지 그것만이 내 모든 시간을 관통하는 과제이다.




그걸 풀어내기 위해 매 순간 내가 지나는 길을 의심하고, 새로운 길을 탐색한다.


나에게 맞는 병원, 의사, 약국, 건강식품, 영양제를 찾아내는 과정 역시 그 탐색의 일부다.


그 과정들이 모여, 내 건강을 만들고 갱년기 세계를 구성한다.


그래서 선택은 매번 모든 고려 대상을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살피는데서부터 시작된다.




병원을 다녀오면 먼저 얼굴색이 달라졌는지, 숨은 편해졌는지 살펴본다.


다음날 아침엔 밤새 스마트 워치에 기록된 수면 점수를 확인한다.


영양제를 바꾼 뒤엔, 땀은 덜 나는지 열감은 달라졌는지 이전 기록을 꺼내 비교한다.


시도해 볼만한 치료를 검색하고 후기들을 정독하다 새벽을 넘기는 날엔 숙면에 좋다는 방법들을 다시 찾아본다.


치료는 꾸준해야 하니까 치료 후기들을 거리순, 비용순으로 다시 정리해 본다.


꾸준한 치료를 가능하게 만드는 건 아무래도 결제 금액이니까.


거기에 더 살펴볼 것들은 증상의 변화, 수면상태, 팔다리의 움직임, 붓기, 통증의 정도, 기분, 온도, 습도, 그리고 결제 영수증.




상황에 따라 우선순위에 놓이게 되는 항목은 조금씩 달라지지만, 변하지 않는 중심은 건강이다.


그리고 그 순조로운 과정을 진행하기 위해 쌓이는 결제 영수증은 나를 열심히 출근하게 만든다.


이직과 출근의 동기는 이제 호기심이 아닌 건강에 대한 갈망이다.


충분히 잠을 자지 못해 몸이 한없이 가라앉아도 결제영수증은 가라앉은 나를 꺼내어 출근길로 밀어 넣는다.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출근이 필요하고 회사는 나를 피곤하게 만들고, 그러면 다시 건강해지기 위해 출근이 필요하고..


혹시 나는 뫼비우스의 띠 위를 달리고 있는 건 아닐까.


급여명세서와 카드명세서를 나란히 두고 어떻게 달리기를 멈출 수 있을까 생각하던 차에

명세서의 숫자들은 어느새 오래전 강제 고백을 당한 그 교실 한가운데로 나를 끌어다 세워놓았다.


오후의 낮은 햇살이 공기 중에 날아다니는 뽀얀 먼지를 비추는 텅 빈 교실 안에서 난 돈과 마주 서 있다.


그리고,


돈 say you love 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