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이벤트가 발견되었습니다 : 골다공증 주사
겨울은 모든 생물에게 냉혹한 계절이다.
특히 약한 개체에게는 어떻게 버텨야 얼마나 생존할 수 있는지 스스로 깨닫게 해주는 크고 작은 이벤트를 선사한다.
그런 이벤트는 썩 겪고 싶지 않다고 하더라도 언제나 부여 자격은 겨울에게 있다.
다행히 인간은 롱패딩이라는 훌륭한 방패를 만들어냈다.
롱패딩으로 나를 김밥처럼 말고 다니면 겨울이 주는 대다수의 이벤트를 피할 수 있다.
골다공증 주사 같은 걸 만나지만 않는다면.
골다공증은 그동안 나에게 딱히 대수로운 단어가 아니었다.
호흡, 열감, 두근거림, 관절통증, 불면, 두통 이런 직접적으로 나를 괴롭히는 증상들에 비하면 명함도 내밀지 못했다.
바람 한 점 없이도 차가운 공기에 얼굴이 아려오던 어느 퇴근길, 버스를 기다리다가 불현듯 한 장면이 머릿속에 스쳤다.
일 년 전, 대학병원에서 이런저런 검사 결과를 알려주던 의사의 얼굴.
“... 그리고 골감소증이네요. 앞으로 1년마다 골밀도 검사는 꼭 해보세요. 칼슘제도 꾸준히 드시고요.”
그 말에 샀던 칼슘제는 유독 크기가 컸고, 이 알약을 만든 사람은 대체 목구멍이 얼마나 큰 건지 삼킬 때마다 궁금했다.
어느 날 결국, 그걸 삼키다가 목에 걸려 이대로 저승사자와 면담하러 가는 건가 싶었던 이후로 칼슘제를 치워버렸다.
골다공증으로 죽을 확률보다 알약이 목에 걸려 죽을 확률이 훨씬 높아 보였다.
그리고 골밀도 따위의 단어는 내 기억에서 휘발되어 버렸다.
왜 잊혀진 그 장면이 갑자기 왜 떠올랐을까.
일상이 통증인 갱년기 세상에선 가끔 내 의식보다 앞서 내 몸이 이런 식으로 불현듯 메시지를 보내기도 한다.
그런 메시지는 높은 확률로 매번 유용했다.
다음날, 자주 가는 내과에서 골밀도 검사를 하겠다고 했을 때 의사의 반응은 ‘벌써 뭐 그런 것까지’에 가까웠다.
아직 그럴 나이도 아니고 골다공증이 진단되지 않으면 검사비도 비싼데 굳이 원한다면 말리지는 않겠지만, 정말 괜찮은 건지 몇 번을 되물었다.
나 또한 골다공증으로 진단되지 않아 비싼 비용을 치르는 대신, 골밀도에 대해서만큼은 일단 안심하자는 심산이었다.
골밀도 검사는 검사기계에 누워서 체감상 15분 정도 있게 되는데, 검사 기계 옆에 있는 벽에는 검사에 대한 온갖 설명들이 어지럽게 붙어있었다.
처음 검사실에 들어갔을 때는 그 알록달록한 종이들이 모여서 뿜어내는 미감에 기함했지만, 기계 위에 누운 지 3분이 채 지나기도 전에 모든 걸 이해할 수 있었다.
검사 기계위에 멀뚱히 누워 눈알만 굴릴 수 있는 피검사자가 할 수 있는 건 미감을 파괴한 채 어지럽게 붙어있는 그런 설명지들을 읽는 일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새삼 환자에 대한 세심한 배려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벽에 붙은 모든 것을 정독하며 15분을 보냈다.
대기실로 나와 잠시 기다렸다가 진료실로 다시 들어갔을 땐 예상과 다른 상황이 펼쳐져버렸다.
검사 결과지는 확신의 골다공증을 보여주고 있었다.
-2.5부터 골다공증이라고 진단하는데 나는 -2.9, -3.1이었다.
일 년 동안 온갖 좋다는 보약에 치료는 다 했는데, 뼈에까지는 닿지 않았나 보다.
‘이 나이에 이렇게 수치가 낮게 나오기가 힘든데..’라는 의사의 혼잣말에 나는 내가 난소절제술을 했음을 상기시켰다.
‘아 맞다. 그럼 이렇게 나올 수도 있지.’
그리고 곧 먹는 약이나 주사약이 있으니 치료약을 쓰면 더 나빠지지 않고, 약간 좋아질 수도 있다는 말을 덧붙였다.
골다공증이 덥석 진단될 거라는 예상을 하지 않아서 어떤 약을 써야 할지 사전조사를 하지 못했다.
직관적으로 먹는 약보단 주사제가 더 직접적으로 작용할 것 같아서 주사제를 선택했고,
3개월 또는 6개월 주기로 맞는 약 중에 고르라고 해서 왠지 단계적으로 조금씩 진행될 거 같은 3개월 주기 약을 골랐다.
사전 지식이 없다면 선택은 직관에 맡기게 되는데, 비슷한 비용이라면 6개월 쪽이 더 가성비 있지 않겠냐는 간호사의 조언도 있었지만, 왠지 효과가 6개월이나 가는 너무 강할 것 같은 약은 부작용이 생길까 무서웠다.
주사를 맞는 동안 간호사가 심장이나 호흡엔 문제가 없는지 팔은 괜찮은지 계속 체크해 주었는데 난 아무 반응이 없었다.
하루정도 팔을 많이 쓰지 말라는 주의사항을 듣는 것 말고는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이 주사가 새로운 이벤트의 시작이라는 건, 그날 밤부터 알게 되었다.
처음엔 약간 열이 나고 몸살 기운이 무겁게 오는 느낌이 들었다.
큰 게 온다 싶은 그런 몸살의 오프닝 느낌은 정말 오랜만이어서 몸살약을 먹고 따뜻하게 데워둔 침대에 평소보다 일찍 누웠다.
10시간 가까이 자고 일어난 다음날 몸이 일으켜지지 않았다. 전신의 근육과 뼈가 아팠다.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아픈 적은 처음이라 대체 몸을 어떻게 움직여서 침대에서 벗어나야 하는지에서부터 난관이었다.
조금만 잘못 움직이면 부스러져버리겠다고 뼈가 으름장을 놓는 것 같은 통증이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어깨뼈와 가슴뼈가 깨질 것 같아서 숨도 크게 쉬지 못했다.
오후가 되자 통증이 더 심해져서 몸이 덜덜 떨렸다.
그날도 다음날도 집에 도착하자마자 진통제를 먹고 누웠지만 효과는 거의 없었고, 눕고 뒤척이는 것조차 너무 어려웠다.
내 집은 복층집이고 침대는 복층에 있는데 일단 거기까지 도달하는 게 너무 고통이었다.
나중에 더 나이가 들면 난 과연 복층을 제대로 사용할 수 있을까 싶어 미래의 내가 절망스러웠다.
이 정도로 아픈데 주사제 부작용은 들어본 적이 없어 믿을 수가 없었다.
차라리 누군가가, ‘사실 네가 잘 때 트럭이 와서 한번 밟고 지나갔어.’라고 말한다면, 그 말을 믿었을 것이다.
낙엽 쌓인 길인줄 알고 한발 내디뎠는데 사실 낙엽으로 위장된 함정에 빠진 것 같았다.
10년도 더 전에 조혈모세포 기증을 한 적이 있는데 기증 전 골수의 조혈모세포가 밖으로 나올 수 있게 전처치하는 주사를 맞았었다.
그 주사가 뼈에 작용하기 때문에 뼈 통증이 심하다고 해서 주사제와 함께 타이레놀을 함께 받았었는데, 어떤 통증인지 궁금해서 타이레놀 없이 주사를 맞고 통증을 기다려본 적이 있었다.
그 통증은 커다란 해머로 뼈를 심박 리듬에 맞춰 쿵쿵 치는 것 같은 통증이었는데. 상당히 위압적인 것이었다.
이쯤이면 충분히 경험했다 싶어서 30분 만에 같이 받은 타이레놀을 먹고 곧 통증이 사라졌던 기억이 있다.
그때 통증보다도 지금의 통증이 10배 정도는 강한 것 같았다.
타이레놀은 그때 말고는 나에게 효과가 전혀 없는 약이라는 경험에서 나오는 믿음이 있었는데, 저때의 기억으로 시험 삼아 타이레놀을 먹어보았고, 어쩐 일인지 그때부터 약간 살 것 같았다.
타이레놀 첫날은 나를 둘러싼 통증의 아우라가 걷혔고, 둘째 날은 전신을 감싼 통증의 막이 걷혀서 통증의 위치를 짚을 수 있게 되었다. 비록 수십 군데였지만.
셋째 날이 되자 어느 순간 통증이 사라졌다.
시간의 효과인지 타이레놀의 효과인지 갑자기 온 통증은 그렇게 5일여 만에 갑자기 사라졌다.
이후 다른 약을 받으러 다시 방문한 내과에서는 주사 후 근황을 묻곤, 그렇게 힘들어서 다음 주사는 어떻게 맞겠느냐며 걱정해 주었다.
그 정도 부작용은 거의 없는데..라는 말과 함께.
알고 두려워하면서 맞이하는 통증보다, 모르고 있다가 맞는 게 어쩌면 심적으로 고통받는 시간이 없으니 더 나을 수 있었을지도.
그래서 모든 인간은 미래를 모른 채 현재를 살아가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게다가 모든 건 처음이 어려울 뿐 두 번째부터는 경력자 모드다.
어쨌든 이번에도 운이 좋았다.
나중에 정신 차리고 검색해 보니, 골다공증 주사를 맞고 엄청난 통증을 겪은 사람들이 꽤 있었다.
그저 비용대비 횟수를 보고 가성비로 선택할 약도 아니고, 주사를 맞는 동안만 체크할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모든 약의 부작용은 대부분 제대로 설명을 듣지 못하고 지나가기 일쑤다.
골다공증 주사도 그렇고, 그전에 겪었던 백신 부작용도 그렇다.
그런 케이스는 별로 없으니까.. 가 이유인데 내가 그런 케이스의 주인공이 자꾸 되는 게 문제다.
내 세상의 주인공은 나다.
그게 갱년기 세상이든, 약물 부작용이든 모든 상황에서 주인공은 번번이 나다.
시끌벅적한 이벤트 파티장의 한쪽 벽에 붙어서 있는 듯 없는 듯 구경만 하다 사라지는 역할이 제일 좋은데 이번에도 여지없이 새로운 통증의 무대 한가운데 올라 뼈와 근육들의 아우성 속에 핀조명을 받는 주인공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이제야 조명이 꺼지고 이벤트가 끝났다.
이번에도 무사히 살아남았다.
다음에 소환될 이벤트는 또 뭘까.
새로운 통증의 경험치를 얻은 만큼 반은 자신 있고, 반은 두렵다.
이거 끝은 있긴 한 건가.
남은 이벤트는 또 얼마나 있는 건가.
역시 미래를 모르는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갑자기 이벤트를 만나게 되겠지.
그저 주인공은 끝까지 살아남는다는 주인공 버프를 믿어보는 수밖에.
[히치하이커의 메모] 어쨌든 난 내 세상의 주인공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