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왜죠?
“이제 일어나셔야 돼요.”
누군가 어깨를 두드렸다.
눈을 뜨니 갑자기 환한 천장조명이 눈으로 쏟아져 내렸고, 나는 잠시 어리둥절했다.
조금 전 내 얼굴 위로 천천히 내려온 투명한 플라스틱 마스크에서, 하얗게 뿜어져 나오던 차갑고 톡 쏘는 공기의 감촉이 문득 떠올랐다.
내 몸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배꼽 양쪽으로 2센티 정도 떨어진 두 점이 피부 아래서 타는 듯이 쓰라렸다.
‘수술한 부위가 거기구나’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지나가던 누군가가 내가 누워있는 침대 옆을 지나다 나와 눈이 마주쳤고 ‘깨셨네요.’라고 말하고는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것은 이제 막 '갱년기 증상 풀세트 종합 체험 1급 자격증'을 받아 든 나를 환영하는 첫 번째 미소였다.
곧 누군가 내 침대를 밀었고, 나는 누운 채로 병원의 긴 복도를 달렸다.
드라마에서 보던 것처럼, 누워서 마주 본 병원 천장의 길쭉한 형광등들이 빠른 속도로 뒤로 휙휙 지나갔다.
그 속도감을 즐기면서 수술실 안에서 떨어져 나갔을 나의 난소들에게 마음속으로나마 작별을 고했다.
'그동안 고생했어. 이제 편히 쉬렴!'
환한 형광등 불빛을 마주 보며 터널 같은 복도를 누워서 달리고 있으려니 눈이 빙글빙글 돌아 눈을 감았다.
감은 눈꺼풀 안에서 여러 가지 색들이 만화경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흩어지고 모였다.
몸 전체가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았고, 그것은 다른 차원의 세계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 새로운 세계에서는 신기하고 재미있는 모험이 펼쳐질 것 같았다.
그땐 그냥, 그렇게 왠지 신나고 들떴었다.
이전과 같은 공간, 같은 사람들 사이에 있으면서도 동시에 갱년기라는 다른 낯선 차원의 세계에 갇혀버렸다는 걸 깨닫게 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지만.
그때는, 그랬다.
수술 전, 의사들은 말했다.
"복강경 수술은 아주 쉬운 수술이니까 걱정 마세요."
"난소가 없어서 갱년기 증상이 생길 수도 아닐 수도 있지만 호르몬 치료하면 돼요."
"유방암이요? 아. 생길 수도 있죠. 그래도 호르몬 치료 중엔 정기검진을 꾸준히 하니까, 생기더라도 조기에 발견할 수 있으니 괜찮아요."
'암이 생기는데, 괜찮을 수가 있다고요!?'
직장 동료들 중에 유방암이 생겼던 사람들의 사례를 생각해 보면 전이가 잘 돼서 완치 후에도 다시 항암을 하느라 고생했던 사례를 한두 번 본 게 아닌데도 어쨌든 다 괜찮다고 했다.
'암'과 '괜찮다'는 단어가 한 문장 안에 공존한다는 게, 과연 가당키나 한 일일까.
선뜻 믿기 어려웠다.
어쩌다 가끔 생긴다던 코로나 백신 부작용으로 직장도, 일상도, 미각도, 머리숱도, 멘털도 잃었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더 그랬다.
이번에도 어쩌다 생길 수도 있다는 유방암에 또 당첨되지 않으리란 확신이 없었다.
사실 생각해 보면 난 어릴 때부터 이런저런 자잘한 이벤트에 당첨이 잘 되는 편이었다.
가장 큰 이벤트는 코로나 백신 부작용이었지만, 유방암까지 당첨될 기회는 사양하고 싶었다.
게다가 난, 백신 부작용으로 인한 혈전 문제도 있었는데, 호르몬 치료의 금기증 중 하나가 바로 혈전이었다.
결국, 자의든 타의든 나는 호르몬 치료를 할 수 없었다.
갱년기를 편하게 여행할 수 있는 KTX와 같은 호르몬 치료라는 루트를 탈 수 없었던 나는, 이제 갱년기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가 되어야 했다.
나침반도 지도도 없이 길 위에서 골골대는 히치하이커에게, 갱년기의 밤하늘엔 길잡이 삼을 별이 보이지 않았고, 초행길에서 불쑥 만나는 낯선 통증은 종종 나를 패닉에 빠지게 만들었다.
그럴 때마다 혹시 같은 문제를 맞닥뜨린 사람은 없는지 그 사람은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주변과 검색창을 통해 수소문해 봤지만 이렇다 할 소식을 찾을 수 없었다.
기껏 찾은 것으로는 '세상에서 내가 제일'이라는 통증 배틀이나, '그럴 땐 이런 걸 사'라는 광고, '남들 다 겪는 거 유난 아니냐'는 차가운 조언이었는데, 그런 것들은 나에게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패닉이 깊어질수록 길잡이 별이 되어줄 누군가를 찾아 여기저기 뒤져봤지만 시원한 답은 보이지 않았다.
너무 아팠던 날은 혹시 갱년기 증상으로 앓다 죽은 사람이 있나 찾아보기도 했다.
없었다.
다행이다.
아니, 그런데 혹시 글도 남기지 못할 정도로 심하게 앓다 죽은 건 아닐까.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와 비슷한 상황에 놓인 사람을 찾는다고 내가 덜 아파지는 건 아니다.
모든 게 낯선 곳에서 내가 어디쯤에 와 있고 어디로 가게 되는 건지 그렇게나마 알고 싶었다.
같은 세계에서 헤매는 누군가를 찾게 되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체셔고양이가 줄법한 모호한 메시지라도 한 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어디로 가든 상관없어, 어딘가엔 도착할 테니까."
어디로 가든 그게 내 길이 되어버린다는 건 좀 멋지지만 상당히 부담스럽다.
혹시 되돌아가고 싶거나 여기가 아니면 어쩌지 싶을 때를 대비해, 지나는 길 위에 부스러기를 남기듯 짧은 기록을 남겨보기로 했다.
그 부스러기들이 모여 나의 나침반이 되어주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