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지역 케이블 방송국에서 처음 아나운서가 되었을 때 나는 화려한 업무를 기대했다. 예쁜 옷을 입고 메이크업을 받은 후 환한 조명과 여러 대의 카메라 앞에서 당당하고 여유 있게 방송 진행을 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내 기대와 엄청 달랐다. 나는 피디와 작가, 분장사가 없는 방송국에서 멀티 플레이어가 되어야 했다.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기획에 맞는 출연자 섭외를 하고, 출연자와 공유할 방송 대본을 썼다. 출연자가 오는 날이면 출연자 분장마저 내 몫이었다. 당연히 나의 의상과 메이크업 준비는 알아서 해야 했다. 그 다음에야 내가 처음 기대했던 아나운서로서의 방송 진행을 잠깐 할 수 있었다.
다른 방송국에 다니는 아나운서 선배를 만나 내가 느끼는 부당한 업무들을 하소연하던 날도 있었다. 나는 이제 부당하다고 느끼는 업무까지 기꺼이 할지, 부당한 업무를 거부하고 퇴사할지 선택해야 했다.
그래도 방송하는 게 좋았던 나는 일단 방송국에 남는 결정을 내렸다. 이왕 결정을 내렸다면 주어진 조건에서 최선을 다해 일하고 싶었다. 불만을 싹 걷어버리고 다양한 역할마다 내 식으로 열심히 일했다. 조금이라도 알찬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 출연자 섭외에 공을 들였고, 출연자가 방송 준비를 수월하게 할 수 있도록 쉽고 명확한 대본을 쓰고자 노력했다. 분장과 의상은 직접 발로 뛰며 협찬을 구했다. 이때는 몰랐다. 아나운서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 이 다양한 일들이 내게 든든한 경험이 될 줄은.
그저 해야 하는 일이니 ‘열심히 하기라도 하자’는 마음이었는데,
그 열심히 일한 시간들이 차곡차곡 쌓여 내 자산이 됐다.
내가 방송작가의 역할을 겸하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책을 쓰는 작가가 되지 못했을지 모른다.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출연자를 섭외했던 일은 지금의 오디오 콘텐츠 ‘정은길의 돈.말.글’을 만드는 데 큰 도움이 됐다. 프리랜서로 활동하는 지금의 내게 필요한 능력은 낯선 사람들에게 나를 어필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제안하는 것이다. 브랜드 의류 매장에 들어가 나를 소개하고 방송 의상 협찬을 제안했던 사회 초년생 시절의 경험 덕분인지 제안서를 쓰고, 명함을 건네고, 거절을 당한 뒤에도 다음을 기약하는 일들이 어색하지 않다. 내 기대와 달리 지금 처한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가 있다. 꽃 피는 봄이 올 때까지 한껏 어깨를 웅크리며 참아야 하는 겨울 같은 시기다.
이 순간만 잘 견디면 더 나은 내일이 올 거라고 생각을 한다.
그런데 실은 그 생각조차 내 삶의 일부다.
‘지금은 내가 허드렛일만 하고 있지만 나중엔 큰일을 할 사람이라고!’ ‘지금 다니는 회사는 그냥 거쳐 가는 곳일 뿐이야.’ 이 같은 생각을 하는 순간마저 전부 내 삶이다. 현재의 나를 부끄러워하거나 부정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인생은 완성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