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끝의 온실] 김초엽 장편소설
이 책을 접했을 때 딱 하나가 머리에 스쳤다.
[ 영화로 나오면 재밌겠다.]
sf를 잘 만드시는 감독님과 만나 책 한 권으로 담아낼 수 없었던 부분들을 더 담아내면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스튜디오드레곤과 계약되었다는 뉴스가 있었다. 언젠가 볼 수 있기를 바라며.
[지구 끝의 온실]은 지구의 생명을 앗아가는 더스트가 존재하는 세상이 배경이다. 2070년 5월 더스트가 종식된 시점에서 더스트를 이긴 유일한 식물 ‘모스바나’를 연구하는데, 주인공 ‘아영’이 자신이 어렸을 때 살았던 ‘온유’에 대해 떠올린다. 그곳에 이희수라는 한 노인의 집에서 푸른빛이 나는 덩굴이 있었다. 그 회상을 통해 모스바나가 탄생되고 유일하게 더스트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던 ‘프림빌리지’라는 마을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보통 sf 장르를 보는 동안엔 어떤 의미를 찾기보단 영상미, 상상력 등 이런 것들에 대한 재미에 초점이 쏠린다. 오랜만에 재밌는 이야기였다.라고 마지막 장을 덮는데 작가의 말에 잊고 지냈던 문제가 떠올랐다.
[ 이 소설을 쓰며 우리가 이미 깊이 개입해 버린, 되돌릴 수 없는, 그러나 우리가 앞으로 계속 살아가야 하는 이곳 지구를 생각했다.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세계를 마주하면서도 마침내 그것을 재건하기로 결심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아마도 나는, 그 마음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었던 것 같다. ]
지구를 사랑할 수 없지만 지구를 지키려는 마음.
지구가 한순간에 폭발했으면 좋겠어요! 아픔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요!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다 평생 보지 못했던 자연재해 뉴스가 뜨면 지구를 보호해야 한다는 마음이 올라온다. 무서움과 생존 본능에서 나온 마음일 거라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적어도 지금 세대까진 무너지지 않을 걸 알면서 지켜야 한다는 마음이 올라온다는 건 미래의 우리들을 위한 것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면 사람들은 스스로 인지하지 못할 뿐 자신의 깊은 곳엔 온기가 담긴 작은 희망을 간직하고 있고, 그것이 지금까지 무너질 거라는 지구가 살아 있는 이유인 듯하다.
미국이나 중국같이 큰 나라에서 쏟아지는 쓰레기들을 보고 있노라면 나 하나 바뀐다고 뭐가 변하겠나 싶은 허망함 속에서도 손으로는 분리수거를 하고 있다든지. 천연 재료를 쓰거나 개인 텀블러, 포장 용기를 들고 다닌다든지 하는 것들. 어느 쪽에선 가축에게서 오는 환경오염으로 인해 비건을 실천하기도 한다. 그 외에도 지구를 위한 다양한 형태의 작은 실천들이 이어진다.
그런 모습들에서 나는 웃길 수도 있는 작은 희망을 간직하며 살아간다. 분식집에서 개인 그릇을 가져와 포장하는 영상을 본 적이 있다. 1000명의 사람 중 한 사람이라도 그 모습을 닮아간다면 2명이 되고, 각 천명 중 한 명이면 4명이 되고, 당장은 작아 보이지만 어느 시점부터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나지 않을까. 한국에서 국한되지 않고 넓은 나라로 넘어가 각 나라마다 한 명씩. 그리고 거기서부터 또 퍼져나간다면 [계란으로 바위 깨기]라는 말이 눈앞에 보이는 날이 올 것이라고.
그 변화가 느리거나 실패하더라도 [우리는 이러한 방법으로 노력했었다.]라는 기록된 문구 하나가 있다면
주인공 ‘아영’이 ‘온유’를 찾아가 보듯, 먼 미래의 지구에게 새로운 해결책의 길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어쩌면 책 속의 온실에서 혼자 조용히 모스바나 식물을 연구하던 ‘레이철’도 작은 변화 하나가 지구를 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은연중에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걷잡을 수 없이 빠르게 퍼지는 모스바나의 생존력은 작은 변화가 어느 시점부터 빠르게 퍼져나갈 수 있는 모습인 것이다. ‘이희수’는, 그 시절 ‘지수’는 지금의 나처럼 그 작은 희망이 의심스러우면서도 믿고 싶었던 것 같다. 그리고 미래의 노인 ‘이희수’가 되어서 의심으로 바라보던 모스바나가 더스트를 종식시키게 만든 현실을 바라본 인물인 것이다.
작은 변화는 개인의 문제에도 해당된다.
나 같은 경우엔 한 달에 3-4 킬로씩 뺏다가 다시 쪘다가를 평생 반복했다. 나이의 앞자리, 환경 등등 여러 상황들로 인해 무자비하게 몸무게가 늘었다. 10킬로 넘게 쪘다. 처음 겪는 몸무게에 몸도 감당을 못했는지 운동을 하면 살이 빠지는 게 아니라 병원을 가야겠구나. 하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때부터 운동을 멈추고 살보단 건강을 위해 두부를 먹기 시작했다. 100 보도 걷기 힘들었던 그때 두부 하나의 시작이 1년이 되고 2년이 되면서 12킬로를 감량하며 유지할 수 있는 수단이 되었다.
한국사를 공부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에 나는 역사 속 인물의 이름을 몰라 욕을 먹는 연예인에게 돌을 던질 수 없었다. 빈 공간이 가득한 내 머리였지만 이상하게 역사를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은 멈추지 않았다. 생각의 움직임은 실천으로 이어졌고, ‘고구려’라는 단어를 시작으로 3급, 2급. 마지막엔 1급을 땄다.
시작은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져도 끝은 아무도 모른다.
그림을 그릴 때도 무심하게 그은 한 획이 한 폭의 그림이 되는 것처럼.
사실 이렇게 길게 적으면서도 100세 인생 중 절반도 안산 내가 말할 수 있는 부분인가 의구심이 들지만, 이것 또한 온실에 박혀 연구하는 레이첼을 보는 지수의 시선이 아닐까 싶다. 헛될 수도 있는 작은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 것.
언제 어디서 멋진 액자에 담긴 한 폭의 그림으로 선물처럼 다가올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