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두막] 윌리엄 폴 영 장편소설/ 한은경 옮김.
우리는 자신의 한계점을 넘는 순간에 찾는 분들이 있다.
[하느님, 예수님]
이 책은, 그들의 존재에 대한 의문을 풀어주었다.
주인공 맥의 딸 미시가 실종되고 무너져가는 그에게 한날, [ 다음 주말에 오두막에서 같이 있고 싶다면 찾아와요 ]라는 파파의 편지가 온다. 찜찜한 편지를 무시하며 딸아이를 찾아다녔지만 끝내 피에 젖는 미시의 빨간 드레스만이 오두막에서 발견된다. 맥은 그 편지가 살인자가 자신을 유도하는 것이라 의심하며 총까지 챙겨 오두막으로 향한다. ‘살인자와 마주하면 결단을 내리리라’ 마음먹고 오두막에 도착한 그는 믿을 수 없는 경험을 하게 된다. 최악의 장소에서 하느님, 예수님, 사라유까지 모두를 만나 해결되지 않을 것 같은 ‘거대한 슬픔’에 대해 잔잔하고 소소한 대화로 답을 찾아간다.
요즘 우리 사회는 악이 선을 먹어버리는 모습이 더욱 두드러진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면 [하느님은 존재하지 않나 보다.]라는 말이 줄곧 입에서 나온다.
정말 하느님이 계신다면 우리를 보고 있을까. 그리고 우리를 심판하고 있을까. 그렇다면 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 것일까. 이러한 의문들에 머리를 때리는 사라유의 질문 하나를 받게 되었다.
주인공 맥에겐 다섯 명의 아이가 있는데 사라유가 그에게 말한다.
[ 맥, 당신의 다섯 아이 중 어느 셋을 지옥으로 보내겠어요?]
악에 대한 심판.
[요즘 당신은 케이트와 갈등이 심해요. 당신에게 버릇없이 굴고 상처가 되는 말들을 했지요. 케이트야말로 첫 번째이자 가장 타당한 선택이겠죠. 케이트가 어떻겠어요? 맥, 당신이 심판관이니 당신이 선택해야 해요.]
이 아득한 질문에 맥은 심판을 거부했다. 어떻게 사랑하는 아이들을 심판하겠노라고.
[ 하나님이라면 쉽게 하겠지만 당신은 그렇게 못한다는 뜻인가요?]
이 뜻을 깨달은 순간 ‘잔인하다’라는 말이 떠올랐다. 동시에 근본적인 면에서 모두를 사랑하는 하느님의 입장이 이해되었다. 우리에겐 각자 자리 잡은 독립성이 있다. 그로 인해 각 개인은 심판관이 되었다. 그 아래에서 악의 모습으로 변한 이를 비난한다. 그러나 하느님은 심판하지 않는다. 결과는 독립성으로 인해 생겨난 것일 뿐, 모두의 본연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것이다.
내 자식이 나에게 칼을 꽂는다고 내 자식이 악마로 보이는 어미가 얼마나 있을까.
오히려 악으로부터 아이를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죄스러움이 더 클 것이다.
현실은 잔인하다고 하는 말이 이러한 맥락에서 태어난 것일지도 모르겠다.
고통은 나의 본모습을 잊게 만든다.
하느님은 내가 나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게 나의 안에 인간의 모습으로 머무르며, 결과가 아닌 오로지 사랑과 선함을 믿으며 존재한다.
우리가 악을 용서하는 것은 결국 근본을 품어야 하는 하나님의 모습과 닮은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하느님은 나인 것이고, 용서 또한 내가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