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사슴] 한강 장편소설
[검은 사슴]은 시간 순서가 일정하지 않아 쉽게 읽히는 소설을 아니었다. 그럼에도 두 번 세 번 꾸역꾸역 읽어본 것은, 누구에게나 자리 잡고 있을 내면의 어둠을 보고 싶었다. 아름다운 결말 따위 없는 지독한 현실을 외면하면서도, 아이러니하게 [어둠]이라는 단어에 담긴 동질감을 통해 위로를 받고 싶었다랄까.
책의 마지막에 백지은 문학평론가는 말한다.
[ ‘결코 벗겨지지 않는, 절대로 벗겨질 수 없는 어떤 검은 것’에 끈질기게 따라가는 이야기이다. 그 (세계의) 혹독함이 (인간의) 존엄함으로, 우울이 정념으로, 좌절이 용기로 변할 때까지 돌아서지 않는 소설이다. 인간의 연약함을, 연약함으로 인한 고통을 운명의 깊이로 전환하는 소설이다. ]
이 문장은 [검은 사슴]이 어떤 이야기인지 가장 정확하게 보여준다.
[ 잡지사 기자인 인영과 사진작가 명윤, 이 둘은 사라진 의선을 찾아 나선다. 유일한 단서인 ‘김영석’을 쫓아 월산과 황곡을 오간다. 그 과정에서 만난 사진작가 ‘장’이 찍은 탄광 사진을 통해, 죽음마저 무색하게 만드는 어둠을 보며 그들은 더 깊숙한 내면의 상처로 들어간다. 검은 바다, 검은 하늘… 온통 검은색으로 뒤덮인 이 여정의 끄트머리에 발견한 것은 결국 빛을 잃고 스스로 어둠이 되어버린 ‘검은 사슴’이었다. ]
어둠은 정말 벗어날 수 없는 것일까.
[검은 사슴]에서도 말하듯, 희망적인 답을 내놓기엔 어딘가 불편한 구석이 있다.
그럼에도 말하고 싶은 것은, 지금도 갇혀 있을지 모를 어둠 속에서도 삶은 계속될 수 있다는 것이다.
탄광처럼 한줄기 빛이 없어도 그 어둠이 익숙해지기 시작하면 희미하게 문의 테두리가 드러난다.
문을 열어 당차게 밖으로 나가지 못하더라도 괜찮다. 그저 옅은 빛이 새어 나오는 네모난 선을 보며 ‘여기에 나 혼자가 아니구나’ 그 사실만 알아차리면 된다.
그렇게 하루, 이틀 지내다 보면 주변을 보기 시작하는 순간이 온다.
용기 낸 것이 무색하게 주위에는 쓰레기 더미만 있을 수 있고, 그것들과 내가 다르지 않아 보여 함께 웅크려 있기도 한다. 남들은 왜 그런 삶을 사냐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스스로에게는 잠시 숨 고르는 시간이라 여기면 된다.
그렇게 또 시간이 지나다 보면 어디선가 불씨 하나가 피어난다.
어둡고 습한 이곳에서 쓰레기들조차 외로움에 허덕이며 서로 치열하게 치대다 생겨난 불씨인지, 내가 안 보는 사이에 어디선가 빛이 내린 건지는 알 수 없다.
이유가 무엇이든 끝날 것 같지 않던 어둠 속에서 생겨난 작은 불씨는 흩어졌던 시선을 붙잡기에 충분하다.
그렇게,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는 숨결에서 발견하지 못할 것 같았던 나의 얼굴을 마주하면 된다.
흔들리는 형상이라 또렷하지 않더라도 한 가지만 확인하면 된다.
[ 나는, 이 더미들과 같지 않다는 것 ]
그 사실을 조금씩 자각하기 시작하면 어둠 속에서도 나만의 빛이 만들어진다.
그러면 어느새 쓰레기들은 불을 키우는 재료가 된다.
[꼭 방을 나서야 밝음이 찾아오는 것은 아니었음을.
어둠에서도 스스로의 작은 불씨를 피울 수 있음을.
그 하나로 살아갈 수 있음을.]
이러한 사실을 조금씩 알아가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