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바지를 수선하러 갔다.
지난해 말 건강검진에서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춰야 한다는 처방이 나왔다. 고기와 밀가루 일체를 끊고 석 달 만에 5kg 체중 감량을 했다. 오랜만에 홀쭉해진 배를 내려다보며 맞는 옷이 없다고 구시렁대는 게 썩 나빠 보이진 만은 않는다. 바지와 옷가지를 다 바꿔야 했다. 입어보고 마음에 드는 건 또 사기도 한다. 지난주에도 바지 두 벌을 사 왔다. 바짓단 줄여 달라는 걸 며칠을 미뤄뒀다가 토요일 아침에야 수선집에 들렀다. 9:30. 가게 문이 닫혀있다. 붙어 있는 연락처로 전화했더니, 거의 다 왔으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하신다. 일주일 내내 눈길도 안 주던 게으름은 어디로 가고 아침 댓바람부터 이 수선을 떤다는 말인가? 여유 있게 출근하실 분을 바쁜 걸음 치게 한다. 잠시 뒤 사장님이 땀을 흘리며 오셨다. 오래된 자물쇠에 열쇠를 끼워 양쪽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서자 대기하고 있던 무거운 공기가 밀고 나온다. 선풍기 두 대를 켜신다. 맞은편 조그마한 창을 열어 바깥 공기를 들인다. 방해되지 않으려 의자에 앉아 준비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오래된 아파트에 자리한 좁고 길쭉한 상가다. 오랫동안 한자리에서 일하신 만큼 묵은 짐들도 많다. 무엇이 들었는지 알 수 없는 종이 상자들이 차곡차곡 쌓여있고 오래된 재봉틀 두 대도 역사를 말해주듯 순서대로 자리하고 있다. 의자 뒤로 손님이 맡기고 간 듯한 옷 가방들이 줄지어 있고 오래된 의자는 커버를 씌워 세월의 흔적을 덮고 있다. 청바지를 잘라 만든 듯한 빳빳한 가방엔 제법 무게 나가는 도구들이 들어 있고 얇은 천으로 만든 가방, 필통 등 크고 작은 주머니에도 저마다의 도구들이 불룩하게 들어 있다. 필요한 용품은 모두 사장님 손에서 탄생하니 이 가게에 새 물건이라곤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30년은 거뜬히 넘겼을 골동품들로 즐비하다.
고급 아파트나 회장님 방이 뷰를 우선하듯, 사장님이 주로 일하는 자리도 이 가게의 유일한 창가 자리다. 일 층 상가에 뷰라고 해봐야 화단의 나무 몇 그루가 전부이지만 피로한 눈을 쉬고 복잡한 마음을 잠시 내려놓기엔 거기가 안성맞춤일 테다. 넓지 않은 작업대에서 길이와 폭을 재고 박음질을 하고 다림질을 하신다.
눈앞 벽 정중앙에 사장님의 분신과 같은 색색깔 실타래 수십 개가 미술작품처럼 걸려있다. 칸칸이 나누어져 한 칸에 열 개 정도의 실타래가 들어있다. 선반을 가득 채우고도 모자라 크고 작은 실타래가 서로의 등을 타고 앉아 천장까지 쌓여있다. 사장님의 청춘이 깃들어 있는 듯하다.
"사장님, 여기에 사장님 인생이 다 담긴 것 같네요. 처음부터 이렇게 많지는 않았을 거 아니에요?"
"아유, 그럼요. 해 놓은 거 없이 나이만 먹었네요."
대답하는 사장님의 목소리에 기운이 빠진다. '인생'이란 단어의 무게 때문일까? 나는 어쩌자고 신 앞에서 신 얘기를 꺼냈을까? 생각만으로도 충분했고 다른 단어도 있었을 텐데, 젊은 교만을 부렸다.
"아이들, 내가 이런 일 한다고 삐뚤어지지 않고 잘 컸으니까 그기 고맙고"
잠시 삶을 훑으시고 내린 결론 같다. 한 건 없고 나이만 먹었다. 그러나 아이들 잘 자랐으니 감사하다. 인생은 이토록 긴데 결론은 한 줄이면 충분하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지만, 순간순간 자라나던 아이들의 여린 속이 염려됐던 모양이다. 딸이 교사라고 했던 것 같다. 한 건 없지만, 아이들 잘 컸다는 말씀에 인생의 목표가 곧 자식 농사였다는 말씀처럼 들린다. 완벽이란 건 애초에 성립되지 않을 테니, 그만하면 사장님의 노고와 자식 농사가 비례를 맞춘 것 같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다.
30년이 됐다고 하신다. 술술 풀리는 일도 있었겠지만, 엉킨 실타래만큼이나 삶이 풀리지 않았을 때도 많았을 테다. 인생이란 누구에게나 그러하니까.
준비가 끝나자 갖고 온 게 무언지 물어보신다. 남편 바지 두 벌과 엄마가 벨로아 한복을 잘라 만든 치마를 꺼내 놓았다. 옆구리에 지퍼 하나만 달면 완성이 될 것 같다. 유행이란 데 민감하지 않으니 겨울철 오버코트 안에 입어도 될 것 같았다. 고민이 되긴 하지만 입을지 안 입을지는 수선해 보면 답이 나올 것 같다. 그러나 사장님은 단호하게 반대하셨다. 입을 거 흔한 세상, 이쁜 거 사 입으시란 말씀에 미련 없이 도로 주섬주섬 챙겨 넣었다. '엄마 거'란 표증으로 간직하고픈 마음이 정이 아니라 집착인 것 같아 바로 꼬랑지를 내렸다. 기다리게 한 게 미안하신지 얼른 해 줄 테니, 갖고 가라고 하신다. 손님 속을 유리알처럼 보고 계신다. 천을 자르고 박음질 하고 있는데 또 다른 손님이 오신다. 일손을 멈추고 손님의 요구사항을 들어 주신다. 원피스 레이스가 뒤집히니 박음질 해 달라, 오래된 듯한 바짓단을 수선해 달라고 하신다. 집에선 별 이상 없던 옷이 다른 사람 앞에 내놓으니 후줄근해 보이는 건 내 옷만 그런 게 아닌가 보다. 그분이 가져오신 옷 또한 수선으로 해결될 건지 의심스럽다. 사장님은 이 공간에서 옷 수선을 하고 있지만 옷이 아니라 사람을 겪겠구나, 철학이나 관상을 배우지 않아도 저절로 사람 박사가 되었겠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작은 가게에서 손님들 비위 맞추고 상대하느라 토끼처럼 간을 넣었다 뺐다 하는 건 예삿일이 되었을 것 같단 생각이 든다.
벽을 채운 실타래에 한참이나 생각이 머물렀다. 그것도 모자라 사진을 찍었다. 이쁜 실타래와 인생을 엮어 시를 쓰고 싶다. 사장님은 뒤돌아 앉아 재봉틀을 돌리고 나는 실타래를 보며 시를 떠올린다. 사장님의 재봉질처럼 후루룩 시가 써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꽉 차서 넘쳐야 무릇 시가 될 텐데, 내 안에 과연 시가 세 들기나 했을까? 이런 내가 시를 쓰고 시집을 내도 괜찮은 걸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 데 쉽게 쓰이는 시를 질책하던 윤동주 님의 글귀가 생각난다. 돌아가신 어른에게 시를 갈구하는 건 무례한 일이지만, 쉽게 쓰이는 시를 한 번쯤 겪어봤으면 좋겠다.
사장님의 박음질은 걸림도 없이, 실수도 없이, 순식간에 끝나버렸다. 재봉틀 아래 무심히 딸려가는 실이 부럽긴 처음이다. 인생이 풀리면 시도 따라 풀리고 인생이 안 되면 시라도 풀리면 좋겠단 생각을 해 본다. 물욕 없는 내가 물건대신 시 한 편을 탐낸다면 죄가 될까? 그 언젠가, 엉킨 실을 풀듯 여린 단어와 자라는 상념들이 술술술술 풀릴 날을 그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