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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보다 마흔 Nov 27. 2024

오얏나무 아래서 갓끈 고쳐 매지 마라

이탈리아 토스카나에서였다. 

  호텔이 포도와 올리브밭 가운데 있는 조용한 곳이었다. 자동으로 철문이 열리면 길을 따라 서 있는 올리브 나무가 호텔로 안내한다. 밭 한가운데 낮은 건물 몇 채를 짓고 수영장과 자쿠지를 만들어 쉼이 필요한 이들을 불러 모을 작정이었나 보다. 나도 여기에 온 걸 보면.

  시골에서 자랐으나 시골이 더 좋은 건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 대지에 발을 디디고 낮은 풀꽃과 나무를 보며 흙냄새와 풀 향을 맡을 때 편안함을 느낀다. 나랑 한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나 대도시와 쇼핑몰을 좋아하는 친구를 보면 자라 온 지리적 환경 탓만은 아닌 것 같다. 

  시차에 적응하랴 먼 거리를 이동하느라 미처 풀지 못한 피로를 안고 여기까지 왔다. 태초의 엄마 뱃속으로 돌아온 듯, 조용한 숲속으로 들어온 듯 스르르 어깨 힘이 빠지고 눈꺼풀이 가벼워졌다. 호텔 옆 사이프러스 나무속에서는 새들이 한참을 떼 지어 재잘거리고 있었는데, 나는 마치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소리인 것처럼, 마치 암호를 해석하는 사람처럼 소리 하나하나를 조각내서 들었다. 그럴리 있겠냐마는 내게는 그 소리가 어서 오라는 환영 인사로 들려서 오래오래 눈인사를 하고 귀를 조아렸다.


  올리브야 귀하다지만 포도나무는 한국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나무다. 우리는 추석쯤이면 이미 포도 수확이 끝나는데 여긴 아직 그대로 달려 있어서 그 이유가 무언지 여간 궁금한 게 아니었다. 농사는 때를 놓치지 않는 게 관건이다. 마늘과 양파를 뽑고 나면 모내기를 해야 하고 여름엔 허벅지까지 자란 벼 사이를 다니며 피(잡초)를 뽑아야 한다. 때맞춰 약을 쳐야 하고 물을 들이고 빼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모심기가 끝나면 고추 모종을 밭으로 옮겨 심고 김장 배추는 늦여름에 심어야 제때 속이 찬다. 과실수도 겨울철에 전지를 해줘야 불필요하게 웃자라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일일이 해 보진 않았으나 보고 자란 게 농사라, 다른 이들은 관심도 없는 것들이 예사로 보이지 않았다. 새카맣고 조그마한 포도가 조롱조롱 많이 달리기도 했지만, 그중에는 시들고 주글해진 것 또한 많아서 수확을 포기한 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일손이 부족했나, 호텔 일이 바빴나, 내내 포도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이튿날 나는 가이드에게 부탁해 왜 여태 포도 수확을 하지 않았는지 좀 물어봐 달라고 했다. 마침 프런트 앞을 지나는 직원을 만나 물었더니 포도밭까지 우리를 데려가 설명해주었다. 

  지금이 포도 수확 철이긴 하나 고른 맛을 위해 사나흘 만에 한꺼번에 작업하려고 일기(日氣)를 살피는 중이라고 했다. 고른 맛이라고 표현하는 거 보니 하루 이틀 수확일에 따라서도 맛이 달라지는 모양이다. 또 화이트, 레드 와인이 포도의 색깔에 따라서가 아니라 압착 정도에 따라 종류가 나뉜다며 껍질을 까서 속을 보여주고 맛을 보라며 몇 알을 따 주었는데, 어릴 적 산속에서 따 먹던 머루 포도 맛이 났다. 더불어 나는 올리브는 얼마나 더 자라며 언제 수확하고 어떤 게 가장 맛있는지를 물었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 신나는 표정으로 - 마치 마리오 같은 표정을 짓고, 이탈리아 특유의 느끼함과 징그러움을 섞어 - 이야길 해줬다. 멀리서 온 이의 궁금증을 해결해 주겠다는 듯. 나 또한 흡족한 표정으로 돌아오며 내가 지급한 호텔비에는 호텔 이용료뿐만 아니라 직원들의 친절 비용까지 포함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 산책은 여행 중에 들인 재미다. 여기에 있을 때보다 더 일찍 눈이 떨어져 새벽 별을 올려다보고 일출을 맞고 산책하며 틈새 여행을 즐겼다. 둘째 날 아침엔 천천히 포도밭을 걷다가 들꽃들 사이에서 열무처럼 생긴 잎을 보았다. 띄엄띄엄 자란 몇 포기가 전부인 걸 보니 농사를 지은 건 아닌 것 같았다. 이탈리아에도 열무가 있는지, 진짜 열무가 맞는지 확신할 수 없어 한 잎을 따서 냄새를 맡아 보았다. 뒷면에서 알싸한 매운 무 맛이 나는 게 열무가 맞았다. 반가운 마음에 억센 잎은 놔두고 어린잎만 뜯었다. 주방에 올리브오일과 발사믹이 있는 걸 보았기 때문이다. 마침 사과도 있고 어제 산 방울토마토도 남았다. 오랜만에 싱싱한 위산이 돋으며 침이 고였다. 허락 없이 열무를 뜯으니 '오얏나무 아래서 갓끈 고쳐 매지 마라.'라는 속담이 생각났다. 예상치 못한 '우리 것'을 발견한 반가운 마음 뒤편에는 '내 것'이 아니라는 불편한 양심이 있었다. 그것도 잠시, 나는 비뚤어진 갓끈은 고쳐 쓸 생각은 하지도 않고 열무 한 움큼을 쥐고 누가 볼세라 뒷짐을 진 채 방으로 돌아왔다. 유유히 조심스레 왔지만 행여나 들킬까 불안하고 얼른 먹고 싶어 다급했다. 사과와 토마토를 뚝뚝 썰어 넣고 연초록 열무를 뜯어 넣어 드레싱 해서 먹으니 제때 딱 맞는 보양식이 되었다. 식사때마다 맛있게 먹었지만 연일 느끼한 속을 달래주는 반가운 열무였다. 그러고도 조금 켕기는 마음은 체크아웃 때 올리브오일과 발사믹 몇 개를 사며 뿌리쳤다.


  오얏나무 아래서 훔칠 거라곤 자두밖에 더 있겠나 만은 세상엔 탐나는 것들이 넘쳐난다. 그중에서 부러운 건 뭐니 뭐니 해도 맛깔나는 글이다. 최근 노벨문학상을 받으며 한국문학과 한국의 존재감을 더 높인 한강 작가의 책 세 권을 재독했다. 작가의 노벨상은 '예술가란 고통받는 존재에 반응하는 것이다.'라는 목표에 도달했다는 증거 같기도 했다. 작가의 글은 눈으로 읽으나 소리로 전달되는 것처럼 또렷해서 빗소리에 온몸이 흠뻑 젖고, 함박눈에 발발 푹푹 파묻히는 듯했다.

  불현듯, 소설을 써 보고 싶단 마음이 들었으나 달콤함만 취하고 글 뒤에 숨은 작가의 고충은 외면하려는 적극적인 건망증을 보았다. 하던 거나 잘하자, 성실한 독자면 충분하다고 결론 내린다. 잘 쓴 글을 읽으면 감동과 좌절을 함께 느낀다. 읽으며 감동하고 좌절하면서 쓴다. 감동하기 위해 또 읽고 잘 쓰고 싶어 매번 좌절한다. 그러니 앞으로도 나를 끌고 갈 건 담 넘어 탐스러운 오얏과 감동과 좌절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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