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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나무 Dec 24. 2016

음악은 길입니다

때론 가지 않은 길을 보여 주기도 하는 음악


  

‘여름은 덥고 겨울은 춥다’라는 어느 책의 문장처럼 “내 이름은 겨울이다” 외치듯 제법 춥습니다. 



「어느 먼 산 뒷 옆에 바우 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워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백석의 시를 떠올리는 눈이 쌀랑쌀랑 내렸던 날의 음악회여서인지 더 정(靜)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정명훈 표 맛에 길들여진 서울시향의 연주는 이제 어머니의 손맛처럼 맛깔스럽습니다. 

실제로 요리를 좋아하고 즐기는 정명훈, 오늘 그의 상차림은 베버와 라흐마니노프, 슈만입니다. 

첫 곡, 베버의 <마탄의 사수> 서곡은 마법의 탄환을 쏘는 사수라는 뜻입니다. 

보헤미아 숲의 몽환적이고 동화 같은 분위기를 담고 있지만 결코 가볍진 않은 곡이지요. 

음악가는 까칠하고 괴팍한 성격이 많다고들 이야기합니다. 

소리의 결을 조탁해야 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니 당연하다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빙그레 미소 짓는 마에스트로의 표정과 함께 오케스트라는 따스한 음악 요리를 시작했습니다.     



소설 베토벤 <10번 교향곡>에 이어 최근 조셉 젤리네크가 두 번째 펴낸 <악마의 바이올린>이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파가니니의 <카프리치오 24번>과 <스트라디바리우스>에 얽힌 이야기를 스릴 있게 풀어놓고 있지요. 

오늘 협주곡은 파가니니의 ‘24개의 카프리치오’ 중 마지막 멜로디를 주제로 하여 24곡으로 변주한 라흐마니노프의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광시곡>입니다. 

라흐마니노프 4개의 피아노 협주곡 중 마지막 작품으로 피아노의 화려한 기교와 웅장한 서정이 어우러진 곡으로 유명합니다. 

오늘 협연할 피아니스트, 페터 야블론스키(스웨덴, 1971- )가 18번처럼 즐겨 연주하는 곡이기도 하지요.


페터 야블론스키


15년 전, 정명훈이 이끄는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극심한 교통 체증으로 공연장에 시간 맞춰 도착하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졌었습니다. 

그때 협연 자였던 야블론스키는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도착할 때까지 무려 1시간 동안 즉석 독주회를 열었었지요. 

물론 특별한 애피타이저를 맛볼 수 있었던 청중들은 외려 행복했습니다. 

바로 그 날 그가 연주했던 곡 역시 라흐마니노프의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광시곡’입니다. 


변주곡을 들으면 우리의 삶도 일종의 변주라는 생각이 듭니다. 

365일 비슷하지만 똑같진 않으니까요. 

매일매일이 다른 것처럼 음악 역시 흥분과 긴장이 교차하며 희열로 다가왔습니다. 

단일 소품으로 종종 연주함으로써 널리 알려진 제 18 변주에서는 진한 카타르시스가 느껴졌지요.

 

Rachmaninov rhapsody on a theme of paganini Variation 18. Andante cantabile


예술, 아니 음악에 완벽함이 존재할까? 

의문해 보았습니다. 

또는 과연 완벽이 필요하긴 한 것일까? 

그렇다면 예술로써의 가치나 매력이 반감되는 게 아닐까 하면서요. 

하기야 완벽이라는 정의 또한 주관적이긴 하지만 때때로 그런 느낌을 주는 연주가 있습니다. 

페터 야블론스키의 손은, 단순한 기능과 역할을 떠나 가능성의 한계를 의심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연이은 커튼콜 후 이어진 건반 위의 비브라토가 아름다웠습니다.


한 소년이 오직 한 여인을 사랑하고, 그로 인해 온 인류를 사랑하는 법을 깨닫게 되는 참사랑의 과정을 담은 막스 뮐러의 <독일인의 사랑>이 떠오르는 곡, 슈만 교향곡 2번입니다. 

신경 쇠약에 걸린 후 회복되는 과정에서 작곡된 2번은 어둠을 딛고 광명으로 나아가기 위해 분투하는 슈만의 삶과 겹쳐집니다. 

오케스트라는 판타지 느낌과 긴장감, 극적인 클라이맥스의 표현을 아주 세밀하게 표현했습니다. 

정명훈과 서울 시향은 곡의 특징상 뚜렷한 멜로디 라인이 없는 듯 느껴져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곡의 흐름을 적절히 조절했지요. 


3악장 Adagio espresso에선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이 엿보였습니다.


Schuman symphony No.2 3rd mov


「노란 숲 속에 길이 두 갈래로 났었습니다. 

나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굽어 꺾여 내려간 데까지, 바라다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바라다보았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아름다운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그 길에는 풀이 더 있고 사람이 걸은 자취가 적어, 아마 더 걸어야 될 길이라고 나는 생각했었던 게지요. 

그 길을 걸으므로, 그 길도 거의 같아질 것이지만. 그 날 아침 두 길에는 낙엽을 밟은 자취는 없었습니다.

아, 나는 다음 날을 위하여 한 길은 남겨 두었습니다. 

길은 길에 연하여 끝없으므로 내가 다시 돌아올 것을 의심하면서…. 

훗날에 훗날에 나는 어디선가 한숨을 쉬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쉼 없는 날개 짓 같은 1,2악장에서 이어진 3악장은 오보에가 새로운 길을 보여주더군요. 

바닷길, 숲길, 하늘길, 그 어느 것이든 상관없습니다. 

가지 않은 길이어도 좋고, 길을 잃어도 좋은 게 오선지 위의 길이니까요. 

음악은 길입니다.

음악은 소리 여행입니다. 

음악은 중독성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음악은 중독성 있는 소리여행이지요. 

소리로 보고, 소리로 떠나며, 소리로 오감을 깨우는 음악의 매력에 중독되는 일은 행복입니다. 

롯시니의 <윌리엄 텔 서곡> 중 ‘스위스의 행진’이 앙코르로 연주되었습니다. 

속도위반을 여실히 보여주는 현악기의 보잉이 유쾌한 질주를 펼쳤습니다. 

“그래, 이 맛이야!” 하며 맛있는 미소가 배어 나오는 소리여행에서 ‘행복’이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젠 그의 연주를 외국에서나 들을 수 있다는 게 참 많이 아쉽습니다.   

  

William tell overture, fan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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