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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나무 Feb 05. 2017

길 잃은 새벽 산책

폰디체리, 프렌치 쿼터




인도식으로는 푸두 체리, 폰디체리(퐁디셰리라고도 함)라는 이름은 1674년 프랑스가 인도를 식민 통치할 때 붙여진 프랑스식 이름이다. 마치 답사라도 하고 예약을 한 듯 호텔은 프렌치 쿼터의 중심에 있었다. 그곳은 요가와 명상 치료 센터가 많아 서양 사람들이 오랫동안 머무는 곳이기도 하다. 와인을 곁들인 비프스테이크를 맛볼 수 있는 인도에서는 조금은 낯선 도시, 오랜만에 만나는 세련된 분위기가 반가운 곳이다. 폰디체리는 수로를 기준으로 동서로 나뉘는데 프랑스 느낌이 많이 남아있는 동쪽 구시가지가 프렌치 쿼터이고, 전형적인 인도 느낌이 강한 서쪽은 인디아 쿼터라고 불린다.


프랑스 풍 건물의 병원 문 앞에 그려진 꼴람


폰디체리는 캐나다의 소설가 얀 마텔이 쓴 베스트셀러 소설 <파이 이야기>의 주인공 파이의 고향이다. 그러므로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에는 폰디체리의 풍경들을 만날 수 있다. 


life of Pi
라이프 오브 파이가 촬영된 폰디체리의 해변


인도는 호텔 레스토랑 외에 이렇다 할 음식점을 찾기가 어렵다. 길거리에 서서 간단히 요기하는 식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폰디체리에는 이탈리아, 프랑스, 차이나 음식을 하는 레스토랑은 물론이요, 세련된 펍도 상당히 많은 편이라 편했다.



 <마담 샨티>라는 이름의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식물의 마른 줄기와 대나무를 엮어 만든 높은 천장은 운치가 있을 뿐만 아니라 시원하기까지 했다. 레드와인을 이용한 비프스테이크를 주문했는데 육질도 부드럽고 향도 은은한 것이 썩 훌륭한 맛이다. 가니쉬로 곁들여 나온 프렌치프라이와 껍질콩, 당근도 적절했다. 프라운 프라이드 라이스 역시 감칠맛이 났는데 한 가지 문제가 있다. 스테이크든 볶음밥이든 그 양이 어마어마하다. 라이스 하나 만으로도 셋이 거뜬히 먹을 수 있는 정도이다. 구걸하는 사람을 천지에서 볼 수 있는 인도에서 남긴 음식이 버려질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서빙하는 남자가 맛이 어떠냐고 물어보아 맛있다는 대답을 해주고 나도 물었다. 


- 음식이 왜 이렇게 양이 많아요?, 그리고 무척 짜게 먹는 이유가 뭐죠?

- 남인도는 여름이면 기온이 50도까지 올라가요, 많이 먹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어요. 짜게 먹는 것도 그 이유랍니다. 가끔 한국 사람들이 오는데 너무 조금 먹더군요. 우리가 많이 먹는 게 아니라 당신들이 적게 먹는 건지   도 몰라요.


기온이 가장 낮다고 하는 겨울임에도 30도를 훌쩍 넘는 남쪽 인도의 음식이 유난히 짜고 향신료가 강하게 느껴진 이유를 그제야 알 수 있었다. 한 여름에 노인들이 많이 사망한다고 한다. 50도라니, 그런 곳에서도 살아갈 수 있다니 인간이 얼마나 강인한 존재인지 새삼 놀라웠다. '인크레더블 인디아'는 어쩌다 나온 말이 아니다.



식사를 마치고 근처 샵들을 돌아보았다. 상품의 질과 세련된 컬러, 상당히 수준 높은 물건들이 많았다. 고가 제품이 많은 건 당연하다. 평소 화려한 프린트가 된 옷을 즐겨 입지 않는다. 그런데 블랙을 베이스로 화려한 꽃무늬가 프린트된 시폰 원피스가 맘에 들었다. 살짝 아쉬울 정도의 길이를 빼고는 만족한 수준이다. 폭이 아주 넓고 발목을 덮는 길이의 페이즐리 무늬 연두색 랩 스커트도 맘에 들었다. 값도 나쁘지 않았다. 현지에서 산 물건은 현지에서 당장 사용하는 성격인지라 그 옷들은 인도에 머무는 동안 유용하게 입을 수 있었다. 


눈을 뜨자마자 창문을 열었다. 

가루 분필 같은 것을 손으로 뿌리면서 길바닥에 그림을 그리는 여인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 그림은 '꼴람', 

꼴람은 남인도 여인들이 쌀가루, 꽃가루 등을 이용해 집 앞에 그리는 그림으로, 신들이 땅에 내려올 때 발을 디딜 받침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신의 축복을 집안으로 불러들인다는 의미이다. 



여행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은 새벽 산책이다.

그곳이 어디든 사람들의 일상이 시작되기 전, 한적한 골목을 걷는 일이 즐겁다.

막 태어난 깨끗한 태양이 빚어내는 그림자는 그 어느 조명보다 아름다운 컬러를 연출한다.

짜이를 마셔야겠다. 그날은 후덕한 미소가 돋보이는 아줌마의 짜이를 맛보게 되었다.

조그만 무쇠 포트에 아삼 차와 생강, 계피를 넣고 끓이다가 체에 찌꺼기를 걸러내고 우유와 설탕을 듬뿍 쏟아붓고 끓인 후 조그만 잔에 따라준다. 인도는 길거리 어디서든 어렵지 않게 짜이를 사 마실 수 있다. 그런데 짜이 맛이 모두 다른 게 신기할 정도이다. 생강 맛이 더 진하거나, 지나치게 달거나, 아니면 슴슴한 짜이도 있다. 짜이 한 잔으로 시작하는 인도의 아침 산책이 새삼 그립다.



골목을 돌다 보니 인근에 바다가 보였다. 방금 떠오른 태양의 인사처럼 바닷가를 걷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해안도로의 이름이 내가 좋아하는 단어, 프롬나드(산책)이다. 해안도로에 24시간 운영하는 커피숍이 있다. 놀라웠다. 왜냐하면 그곳은 인도이기 때문이다.

폰디체리는 아직도 그곳에 거주하는 프랑스인들이 있어서 프랑스어를 가르치는 학교도 있었다. 리틀 프랑스라는 애칭답게 도로 이름도 프랑스식으로 길이라는 뜻의 Rue라는 표지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간디 기념탑을 지나 걷는데 바다 반대편 2층 집에 청년들이 뭔가를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는 게 보였다. 짓다만 것처럼 마감되지 않은 벽돌집 한쪽에 풍경과 너무나 잘 어울리는 초록의 낡은 차양이 걸려있고 조그만 가위를 든 청년이 친구의 수염을 다듬는 중이다. 먼 거리였지만 그중 한 청년이 나를 발견했고 일제히 나를 바라보았다. 가위를 들고 있는 청년은 러닝셔츠를 뒤집어 입은 탓에 상표와 솔기가 밖으로 나와있었는데 꼬질꼬질 때가 묻은데다가 다 헤져서 구멍이 여럿 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청춘은 늠름하고 행복해 보였다. 이른 아침 수염을 다듬어주는 친구, 또는 가족이 있다는 게 얼마나 따뜻한 풍경인가. 아직 이른 아침이라 오픈하지 않은 부티크와 가구점들을 구경하지 못한 아쉬움은 있었다. 하지만 바쁘고 급하게 빵빵거리며 돌아다니는 오토 릭샤가 없다. 그 이유는 해안도로의 아침과 저녁의 일정 시간은 통제하여 차 없는 거리가 운영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저 조용한 길 위에 꼴람을 그리는 평화로운 모습만이 고요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프랑스 학교
24시간 운영하는 바닷가 카페 , 프랑스식 이름 르 카페
간디 기념상



폰디체리에는 유난히 청소부가 많았다. 핑크 재킷을 입은 그들은 작달막한 싸리비를 양손에 들고 쓱싹쓱싹 능숙하게 비질을 해나갔다. 머리에 노란 꽃 한 송이를 달고 비질을 하던 핑크 할머니의 잰 손놀림이 귀엽지만 빠르고 당차다. 그녀의 키보다 3배는 더 기다란 그림자가 그녀와 비질을 함께 하고 있었다. 낡았지만 깨끗하게 정돈된 집들이 인상적이다. 도심 한복판에 갈대 이엉 지붕의 집이 있었다. 밝기가 다른 노란 벽이 2개의 면으로 분할되어 칠해졌고 지붕을 받치고 있는 대나무에는 초록 페인트가 칠해져 있다. 초록은 방으로 곧장 연결되는 문틀에도 칠해져 있는데 무척 조화롭다. 내가 필요 이상으로 과장되게 미화시킨 게 아니다. 노랑과 초록 두 색깔이 집에 생기를 불어넣어주는 힘이 되어주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누군가 내다 버린 예수님과 성모 마리아 사진 액자를 나무 그림자가 지붕처럼 덮고 있다. 버려진 그들이 그곳에서 또 다른 빛을 발하고 있었다. 



얼마를 걸었을까? 시계를 보니 벌써 1시간 반이 지났다. 호텔로 돌아가야겠다 생각했는데 어느 쪽인지 모르겠다. 방향 없이 걸은 이유는 프렌치 쿼터라는 게 그리 넓은 것이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다. 곧 나타날 것 같으면서 비슷비슷한 골목들만 이어질 뿐 찾을 수가 없었다. 간간히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호텔 네임 카드에 적힌 주소를 보여주며 물어봐도 소득이 없었다. 길을 잃었다. 30분을 헤맸다. 그러나 그 마저도 행복한 시간이었다. 예쁜 컬러, 낡은 벽들이 여전히 새롭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결국 오토 릭샤를 타고 호텔로 돌아가야만 했다. 예상대로 호텔은 그리 멀지 않은 위치에 있었다.        



아침을 먹고 세이크리드 하트 교회로 향했다. 적갈색과 흰색의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성당은 꽤 화려했다. 첸나이에서 보던 교회와는 달리 안정적이고 신자도 많은 듯했다. 예수의 삶을 묘사한 스테인드 글라스가 소박하다.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라는 문구의 패널이 성당 안에 걸려 있다. 교회는 정갈했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사람의 표정은 진지했다. 인도 사람들 중에 종교를 갖지 않은 사람도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1791년, 포르투갈 스타일로 지어진 흰색의 동정녀 마리아 성당에는 스카이 블루색의 문이 포인트였다. 성당 내부엔 예수님의 12처가 걸려있고 크리스마스 때 장식했던 것으로 짐작되는 리본이 걸려 있다. 성당을 나오는데 문디를 입은 백발의 노파가 지팡이를 짚고 성당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가 가톨릭 신자인지는 알 수 없지만 왠지 그의 외모에서 신성함이 느껴졌다.



힌두 사원은 신들이 땅에 내려와서 머무는 곳이다. 스리 마나 꿀라 비나야 가르 사원은 프랑스 식민지 이전부터 존재했던 힌두 사원으로 가네시(코끼리) 신을 모시는 곳이다. 황금 첨탑과 40가지의 가네시 신이 벽면에 새겨있다. 힌두 사원에 들어가면 작은 사당 같은 것들을 여러 개 볼 수 있는데 신자들은 꽃과 음식, 그리고 돈을 들고 줄지어 들어간다. 그곳에는 상의 대신 하얀 실타래를 크로스로 두르고 미간에 두 개의 흰 줄이 그어진 제사장이 있다. 사람들이 들고 온 쟁반에 담긴 것을 가네쉬 신 앞에 내밀어 축복해준다. 뭘 모르고 제사장 사진을 찍다가 제지당하는 바람에 무척 무안했다. 제사장들은 한결같이 뭔지 모를 강한 포스가 느껴졌다. 

사원 근처에 꽃장사가 많은 건 당연한 일이지만 사원 안에서도 꽃을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실에 꿰어 목걸이를 만들고 있는 할아버지가 있었다. 그가 바라는 것이 이 생의 행복인지 사후 세계의 안녕을 비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이루어지길 바라는 마음이다. 



사원에서 나와 신발을 찾아 신고 발길을 돌리려는데 어떤 남자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목소리의 주인공은 사리를 입은 여자? 였다. 한 사람은 퉁퉁하고 또 한 사람은 키가 컸는데 인도 여자라고 하기엔 체구가 건장하고 화장도 짙다. 사진을 찍어달라고 했다. 여행 중 사진을 찍어달라는 사람들은 모두 찍어주었다. 그리고 내가 찍고 싶은 사람에게는 가능한 한 그들의 동의를 얻고 찍었다. 두 사람은 다정하게 스킨십을 하면서 포즈를 취했다. 그들이 트랜스젠더인지 아니면 크로스 드레서(여장을 좋아하는 남자) 게이인지 알 수 없지만 기분이 묘했다. 그들을 찍는데 그들 뒤로 구걸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불협화음 같은 사진이 나왔다.  




그 사원 근처에는 유난히 연꽃을 많이 팔고 있었다. 연못에 피어있는 연꽃은 많이 봤지만 피지 않은 연꽃송이를 그렇게 수북이 쌓아놓은 건 처음 보는 일이라 신기했다. 한 묶음 사고 싶었지만 내겐 그걸 들고 다닐 손이 없었다. 




전날 저녁을 먹었던 마담 샨티를 다시 찾아가 점심을 주문했다. 그런데 와인이 떨어져서 와인 스테이크를 만들 수 없단다. 어떻게 레스토랑 주방에 와인이 떨어질 수 있다는 말인가? 할 수 없이 블랙 페퍼 스테이크를 주문했는데 그 역시 나쁘지 않았다.  

폰디체리에서 첸나이로 가는 버스 중 에어컨 버스가 있었다. 요금은 두배로 비싸지만 그래 봤자 4,000원이니 무조건 타야 한다. 게다가 직통버스처럼 몇 군데 정차하지 않아 3시간 반쯤 걸려 첸나이에 도착했다.


인도 지폐는 모두 간디 초상이 들어있다.
첸나이로 가던 중 휴게소에서 마신 짜이


레인 트리에 맡겨두었던 러기지를 찾으며 리셉션에 물었다. 다음 날 새벽, 뱅갈 루르로 가는 기차를 타야 하므로 조식을 먹을 수 없으니 meal box를 준비해달라는 이야기다. 그는 흔쾌히 준비해놓겠다며 원하는 시간을 물었다. 5시가 가능하냐고 하니 그러겠노라고 말했다.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누군가 말을 걸었다. 

- 한국에서 오셨어요?

어딘가 낯익은 사람 같은 내 또래 부인이었다.

- 네~

- 여행 오셨나 봐요.

- 네, 맞아요. 여행 중이세요?

- 아뇨, 저는 여기 좀 오래 머물고 있어요. 저녁 식사하러 로비로 내려오실 건가요?

- 글쎄요, 아직 정하지 못했어요. 여기서 이틀 있다가 폰디체리로 갔다 방금 다시 돌아온 거라서요.

- 네~ 즐거운 여행 하세요.


첸나이에 도착해서 호텔로 올 때 탔던 택시 기사의 전화번호를 갖고 있었다. 호텔 차를 이용할 수 있지만 값이 배도 넘게 비싸다. 그 기사에게 전화를 해서 나를 기억하는지 물었다. 다행히 기억했고 다음 날 새벽 뱅갈 루르에 갈 예정이니 중앙역까지 태워줄 수 있냐고 물었더니 그런다고 했다. 혹시 그에게 급작스런 일이 생겨 못 올 것을 대비하여 룸 넘버를 가르쳐 주고 전화를 끊었다. 콜롬보 같은 일이 일어나면 절대로 안되니까 뭔가 확실히 해야 했다. 그리고 잠시 쉬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 저 아까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사람인데요. 제가 잠깐 룸으로 가도 될까요? 전해드릴 게 있어서요.

- 네~ 괜찮아요. 오세요.


그 부인은 한국 자동차 회사의 인도 주재원으로 머물고 있는 남편과 함께 호텔에서 3년째 살고 있다고 했다. 내 러기지를 옮겨준 벨보이에게 룸 넘버를 물어서 전화했노라고 실례가 아닌지 물었다. 처음엔 주택에 살다가 여러 가지로 불편해서 호텔 생활을 하는 중이란다. 인도에는 한국 사람들이 마땅히 즐길 간식거리가 없어서 땅콩을 삶아왔다며 건넸다. 튼실한 오렌지 두 개와 석류 하나가 함께 들어있었다. 쉬는 날이면 근교 도시를 여행하고 싶은데 남편은 지저분해서 싫다고 즐기지 않는단다. 그래서 그 부인은 여행사 프로그램을 따라 간간히 다니고 있다고 했다. 외국 주재원들이 호텔 생활을 하는 경우가 있는 건 한국에서도 본 적이 있지만 무려 3년을 호텔에서 지낸다는 게 얼마나 무료하고 답답할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한국 사람이 그리웠을 터였다. 서로 연락처를 주고받을까를 물으니 우리가 언제 또 볼 일이 있겠어요? 하며 돌아갔다. 삶의 방식이 참 여러 가지지만 그 부인의 하루하루가 궁금했다. 땅콩은 알이 작지만 무척 고소했다. 일부러 찾아와 호의를 베풀어 준 그 부인 얼굴이 지금도 생생하다.




새로 배정받은 방은 이틀 전과는 다른 방향의 뷰를 보여주었다. 창문 밖으로 동네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과 골목이 보였다. 그곳이 궁금했다. 입고 있던 민 소매 원피스 위에 흰 셔츠를 걸치고 카메라만 들고 밖으로 나갔다.   

인도는 중국 다음으로 인구가 많은 나라이다. 어느 동네나 여전히 아이들이 많다. 출산을 많이 한다는 증거이다. 갑자기 동네에 나타난 외국인 때문에 아이들은 신이 안 모양이다. 까르륵 대며 까부느라 정신이 없다. 주로 젊은 층의 가족들이 모여사는 동네였다. 




여기저기 걸린 빨래들, 원색의 플라스틱 물동이에 펌프로 물은 받는 사람, 판잣집만 한 가게에 걸려있는 작은 과자 봉지들, 모기향을 피워놓고 앉아있는 아낙네, 빈 수레에서 잠이 든 남자의 머리맡에 놓인 꽃, 강렬한 연두색 벽을 배경으로 다림질하는 부부, 파란 벽 앞에서 줄자를 목에 걸고 재봉틀을 돌리는 테일러, 밀가루 반죽을 판이 비치도록 얇게 펴서 기름에 굽고 있는 청년, 내 손을 덥석 잡은 소녀의 손이 거칠거칠해서 깜짝 놀라 보니 타투가 가득 그려져 있고, 동네에 있는 작은 사원 앞에 앉아있는 청년들도 포즈를 취한다. 

사진 찍어도 돼?라고 물을 필요도 없이 그들은 그냥 자연스레 내 뷰 파인더에 들어왔다. 그리고 나는 카메라에 담긴 그들 모습을 빠짐없이 보여주었다. 그럴 때마다 그들은 고개를 한쪽으로 까딱하면서 슈퍼 슈퍼 한다. '좋아, 맘에 들어'라는 뜻 이리라 짐작했다. 



보통의 여행자들은 소위 말하는 관광명소와 호텔만 오고 간다. 그들의 삶 속으로 나처럼 깊숙이 들어가 보는 외국인은 거의 없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고 없이 불쑥 찾아든 여행자의 방문으로 벌어진 잠깐 동안의 퍼포먼스가 그들에겐 어떤 의미였을까? 어둠 속에서 한 바탕 웃으며 동네 한 바퀴 돌고 들어오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새벽 기차를 타려면 일찍 자야 하는데 쉽사리 잠이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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