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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나무 Jan 31. 2017

낙서 같은 사흘의 단편

스리랑카 갈레




이번 여행의 목적지는 남인도,

그러나 스리랑카의 콜롬보로 시작한 이유는 순전히 갈레(galle, 골)에 가기 위함이다.

스리랑카를 소개할 때 나오는 대표적인 사진 한 장,

바다에 세워진 말뚝에 올라앉아 물고기를 낚는 '스틸트 피싱(Stilt Fifhing)'으로 스리랑카 남부에만 있는 전통적인 낚시법이다. 

이 낚시법은 물고기가 많던 시절 파도가 심해서 배를 타고 나가 고기 잡기가 어려웠던 시절, 조상들이 만들어낸 방법이다.   

하지만 지금은 옛날처럼 많은 고기가 잡히지 않아 전통의 모습만 갖추어 놓고, 관광객들에게 전통적인 낚시법의 시범을 보여주고 수고비를 받는 돈벌이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도 그곳에 가고 싶었다.



콜롬보 포트 역, 플랫폼을 확인하고 구름다리를 건너갔다.

기차는 낡고 허름했지만 명색이 1등석이라고 좌석마다 커튼도 있고 좌석 앞에 나무로 만든 간이 테이블도 있다.

포일에 싸진 샌드위치를 풀어보니 또다시 꼼꼼하게 랩핑이 되어있다.

몽키 바나나 역시 랩으로 단단히 감쌌고 생수가 들어있었다.

아침 식사를 못한 현지인들이 여기저기서 뭔가를 먹는다.

종이 접시에 담긴 밥에 커리를 쓱쓱 비벼 오른쪽 세 손가락으로 잘도 집어먹는다.




갈레 역에 도착하니 오토 릭샤왈라가 다가온다.

핀랑카 호텔로 가는 동안 그는 며칠 동안 머무느냐, 600루피(약 6,000원) 내면 관광지를 모두 안내해 주겠다 하며 말이 많다.

내가 스틸트 피싱을 보러 가고 싶다 하니 그곳은 거리가 멀기 때문에 2,000루피(20,000원)는 줘야 한다고 했다.

그럼 일단 사원과 갈레 포트를 500루피에 돌아보기로 얘기한 후 호텔에 도착했다.

호텔의 오너라는 무하마드가 반갑게 맞이하며 뭘 타고 왔냐고 물었다.

릭샤를 타고 왔다고 하니 미리 연락했으면 자신이 기차역으로 마중 나왔을 거라며 아쉬워했다.

자기는 게스트들이 행복하면 그걸로 족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릭샤왈라가 안 가고 기다리냐고 물었다.

내가 자초지종을 설명하니 가까운 곳은 본인의 차로, 그것도 무료로 태워줄 수 있으니 그를 보내는 게 어떠냐고 물었다.

마당엔 떡 하니 빨간색 혼다가 주차되어 있다.

마다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곳 역시 방이 대 여섯 개 밖에 안 되는 아담한 게스트 하우스이다.

방을 안내받고 웰컴 주스를 마셨다.

그는 핀란드의 탐페레에서 보석 세공을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곳에 간 지 벌써 16년이 되었고 휴가를 이용해서 집에 돌아왔고 그동안 게스트 하우스일을 하는 중이란다.

핀란드를 여행했던 이야기를 나누니 그는 흐뭇해했다.


- 이곳 이름인 핀랑카는 핀란드와 스리랑카를 더해서 만든 이름이겠군요?

- 네, 맞아요.


아이 셋과 부인은 콜롬보에 살고 있지만 주말이라 그곳에 와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뜬금없이 가공된 주얼리들과 원석이 담긴 보석 상자를 갖고 나와 내게 보여준다.

솔직히 나는 보석에 대해 관심이 없다.

모던하고 심플한 디자인의 실버 액세서리와 진주는 좋아하는 편이다. 

게다가 그가 가져온 사파이어, 에메랄드, 루비 등이 세팅된 반지나 목걸이들이 단 한 개도 맘에 들지 않는 고루한 디자인이었다.

내심 내 나이가 보석을 좋아할 거라는 판단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 정말 아름답네요.

맘에 없는 말을 인사로 남겼다.

그러나 무하마드는 계속 자랑이 이어진다.

생일이 몇 월이냐, 탄생석은 뭐다 하며 보석에 대한 이야기가 끊임없이 이어진다.

오랜 전부터 스리랑카는 금과 다양한 보석들로 유명하다. 

성서에 이스라엘의 솔로몬 왕이 시바 여왕의 환심을 사기 위해 이곳에 사절단을 보냈고, 사절단의 배가 도착한 곳이 바로 갈레항이며, 솔로몬 왕은 이곳에서 사파이어와, 향신료, 공작새 등을 가져갔다고 전해져 내려져 오고 있다.     

그런 이유로 아마도 그는 스리랑카에서 값싸게 원석을 구입하여 핀란드에서 가공하여 판매하는 것으로 짐작되었다.

아직 젊지만 일찍 핀란드로 가서 일하면서 경제에 해박해진 것으로 추측했다.

스스로도 본인을 비즈니스맨이라는 걸 강조했다. 

어쨌든 그는 성공한 사업가임에 틀림이 없다.


- 저는 주얼리를 별로 안 좋아해요.

- 노 프라블럼!


무하마드의 아내와 자녀들


그렇게 보석으로부터 벗어나 차에 올랐다.

자기가 아니면 못 가볼 곳이라며 해변이 보이는 언덕으로 안내했다.

그는 뷰티풀을 연신 외쳤지만 내 눈엔 그저 so so~

이어 일본 사람이 만들었다는 사원과 정글 비치로 안내했다.

말 그대로 밀림이 우거진 산길을 오르고 내려서 도착한 자그마한 해변에 소소한 사람들이 모여 있었으나 그곳 역시 내 취향은 아니었다.



그렇게 그의 자가용을 이용한 공짜 관광이 끝나고 호텔로 돌아왔다.

내가 원하는 스틸트 피싱을 보러 가는 것은 거리가 멀기 때문에 2,000루피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

오토 릭샤와 같은 값이니 그 또한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점심 식사는 무엇을 원하는지 물었다.

호텔에서 식사를 하면 디저트까지 포함해서 1500 루피면 된다고 한다.

물론 그가 말하는 다른 레스토랑에서의 식사비를 터무니없게 비싸게 말하고 있는 것을 알지만 흔쾌히 그가 준비한 식사를 먹기로 했다.


8인용 식탁 중심의 꽃병에 화사한 꽃들이 한 아름 꽂혀있다.

오이와 양파 당근이 둘러진 치킨 접시가 중앙에 놓여있고, 앞 접시엔 밥을 중심으로 네 귀퉁이에 버섯, 램 커리, 해시 포테이토, 그리고 콩이 담겨 있다.

오렌지 주스가 담긴 글라스에는 조그만 라임 조각을 꽂아두는 센스까지 발휘했다.

모두 자기가 만들었단다.

눈으로 보이는 만큼 맛도 훌륭했다.

커피까지 마시고 나니 살짝 식곤증이 몰려왔지만 잠시 휴식을 한 후 나가기로 했다. 

동네를 돌아볼 요량으로 밖으로 나갔다.



사실 나는 유적보다 그냥 동네 골목 구경을 더 좋아한다.

날 것 그대로의 삶을 엿보는 시간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마을은 평범했도 사람도 많지 않았다.

드문드문 작은 성점들만 무료한 한낮을 안고 있었다.

앤티크 상점에 들어가니 그야말로 오래된 문짝부터 빈 병까지 고물상처럼 가득했다.

잘 골라 때를 벗겨 내고 손 보면 쓸만한 것들이 있겠지만 언제나 그렇듯 여행자에겐 그림의 떡이다.


과일을 파는 수레에 처음 보는 과일이 있었다.

과일 이름을 불어보니 대뜸 아저씨가 칼을 들어 쪼개더니 먹어보라고 내밀었다.

갑자기 벌어진 일이라 말릴 틈도 없었기에 그가 건넨 과일을 한 입 베어 무니 시금 털털~

오만상이 찌푸려졌다.

미안하다는 내 말에 아저씨는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괜찮다고 한다.

싱거운 사진 몇 장 찍었지만 걷는 동안 기분이 한층 좋아졌다.

패키지 그룹 여행과 다를 바 없이 릭샤나 자동차에서 떨궈져서 돌아보고 또 타고 하는 게 내 성미에 맞지 않고 답답했던 모양이다.

마침 가족들이 도착해서 스틸트 피싱하는 해변까지는 그의 사촌 동생이 운전을 맡기로 했다.

의사라는 여동생, 누나, 매형, 사촌 등 대가족이 모였다.




처음 도착한 해변에는 빈 장대만 덩그러니 꽂혀있고 낚시하는 사람들이 없다.

다시 차를 타고 미디 가마 해변으로 가니 낚시꾼들이 보였다.

해변에는 서양인 몇이 사진을 찍고 있었고 예상대로 협상꾼이 나타났다.

20분에 1000루피란다.

100~200루피 정도면 되겠거니 생각했던 터였다.

스리랑카나 인도 물가를 익히 잘 알고 있는 나로서는 바가지 상술에 정나미가 떨어졌다.

그러나 어쩌랴~

500 루피 하자니까 안된다고 한다.

단호하다.

성격대로라면 싫으면 마세요, 하고 뒤돌아야 마땅하다.

하지만 좋은 마음으로 찾아가 태격태격 하고 싶지 않았다.

석양 무렵에 그곳을 찾아가고 싶었는데 해는 아직 중천에 떠있고 낚시꾼들은 모래에서 겨우 5m도 안 되는 가까운 바다에 장대를 꽂아두고 있어 메리트는 더욱 떨어졌다.

큰 기대를 한 것은 아니지만 이건 아닌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낚싯대를 들고 있을 뿐이지 해적과 다름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인지 그 사람들의 인상 또한 사기꾼 같아 보였다. 



시들한 사진 찍기를 마친 후 향한 곳은 갈레 포트.

바닷가에 자리해 구시가를 감싸듯 세워진 요새는 포르투갈인들에 의해 처음 세워지고 네덜란드인들에 의해 강화된 곳이다.

2004년 발생한 해일로 갈레 신시가지는 물론 주변의 모든 도시는 폐허가 되고 수천 명의 사상자를 냈지만

갈레 구시가의 피해가 적었던 것은 그 요새 덕분이라고 한다.


요새는 생각보다 규모가 컸다.

무엇보다 맘에 들었던 것은 요새 아래에 있는 마을이었는데 유럽풍 건물들과 소박하지만 예쁜 카페와 상점들이 눈길을 끌었다.

호텔이 집결되어 있는 이유로 대부분이 서양 여행자들로 붐비고 있다.

하지만 호텔 오너의 사촌 동생을 대동하고 나온지라 마냥 시간을 보낼 수는 없었다.

그에게 약 한 시간쯤 돌아보고 오겠노라 약속을 한 터라 대충 골목을 돌아본 후 석양을 보고 호텔로 돌아갔다.



마당에는 무하마드의 가족들이 대거 나와 있었다.

본의 아니게 그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가족들이 집 안으로 들어가고 마당에 앉은 내게 커피를 가져다주더니 그의 비즈니스 병이 다시 발동하기 시작했다.

자기가 게스트 하우스 하나를 더 만들고 있는데 동업자가 필요하다.

얼마를 투자하면 수입은 50:50으로 할 수 있다는 거다.

내가 복부인처럼 보이는 스타일이 전혀 아닌데 왜 그는 틈만 나면 내게 그런 말들을 꺼내는 것인지 도무지 알 길이 없다.

대충 귓등으로 흘려보내면서 샤워를 하고 저녁을 먹으러 가야겠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추천할만한 해변이 있으니 그곳에서 저녁 식사를 하는 게 어떠냐는 제안을 했다.

딱히 마다할 이유가 없어 8시에 떠나기로 약속을 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가 데려간 곳은 까르마남 비치,

좁은 골목을 지나는 동안 빼곡하게 들어선 샵들과 여행자들이 넘쳐났다.

이런 곳이라면 약쟁이들도 있겠는 걸? 하는 추측을 했다.

무하마드가 안내한 레스토랑으로 들어섰고 2시간 후에 오겠다고 했지만 나는 1시간 반이면 충분하겠다고 말했다.

딱 한 가지뿐인 파스타 까르보나라,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소스의 양에 비해 스파게티 면이 넘쳐나는 접시가 날라져 왔다.

짜지 않게 해달라는 주문이 무색하게 한 입 먹은 후 오만상이 찌푸려졌다.

웬만하면 리오더를 하지 않지만 먹을 수 없을 정도라 웨이터에게 이야기를 하니 다시 만들어오겠단다.

아예 without salt! 를 요구했건만 여전히 짭조름한 파스타가 다시 만들어져 나왔다. 

곁들여 나온 빵과 더불어 간신히 요기를 했지만 바닷바람에 그나마 면발에 묻어있던 소스가 금세 말라버려 면발이 꾸덕꾸덕해지니 스파게티가 거문고 줄 같아졌다.

깔루아가 들어있는 블랙 러시안 잔은 비었고 취하면 위험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에 잘 받지 않아 평소에는 거의 마시지 않는 맥주를 마실 수밖에 없었다.

인도양의 해변, 게다가 밤바다이지 않은가?

이런 기회는 쉽게 오는 게 아니거든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낭만으로 가득해야 할 해변에 복병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모기!

다리를 아예 의자 위에 올리고 스카프를 둘둘 감고 앉아 있어도 불필요한 헌혈은 지속되었다.



다음 날, 콜롬보로 돌아갈 기차는 오후 3시 30분이니 시간 여유가 있다.

무하마드에게 올드 타운에 가보고 싶다고 말했다.

거기서 시간을 보내다가 갈레 포트로 가서 점심을 먹고 기차를 탈 요량이었다.

무하마드가 인도한 올드 타운은 다름 아닌 어제 갔던 갈레 포트 중심거리였다.

그러니까 거기가 바로 올드 타운인 것이다.


바다로 돌출되어 있는 갈레 포트는 견고한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성벽을 따라서 갈레 포트를 둘러볼 수 있는 둘레길이 만들어져 있고, 성벽 안쪽의 구시가지에는 네덜란드, 영국 등이 지배할 당시에 지었던 건물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갈레 성벽과 구시가지 유적은 동남아시아에서 유럽인들이 건설한 요새도시 중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사례라고 한다. 


레몬 젤라토를 먹고, 상점을 기웃거리고 골목을 빠짐없이 돌아보았지만 그곳은 어제 생각했던 것보다 면적이 훨씬 작았다.

학교와 교회와 등대, 몇몇 여행자, 그 외엔 그곳을 가득 채운 뜨거운 햇빛이 전부였다.

겨우 12시가 넘어가고 있다.

길거리에 앉아 랩탑에 사진을 옮기다가 불현듯 든 생각,

'아마도 기차표를 빠른 것으로 바꿀 수 있을 거야'

마침 옆에 있는 오토 릭샤와 흥정을 해서 역으로 갔다.

5분 남짓한 곳에 기차역이 있었다.




하지만 내 기대와는 달리 1등석이 있는 기차는 그 시각 전에는 없다는 것,

먼저 출발하는 2,3등석 기차는 있지만 1등석 티켓으로 교환이 안 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기차역 주변은 혼잡하고 시끄러웠다.

음식점이라고 할만한 것도 보이지 않았다.

철로와 하천이 나란히 지나가는 한적한 길을 따라 걸었다.

역을 벗어나면 뭔가 있을 것 같았다.

그때, 드문드문 벗겨지긴 했지만 차이니즈 레스토랑이라는 글씨가 보였다.

문은 열려있지만 안이 컴컴했다.




- 지금 식사할 수 있어요?

- 네네, 그러믄요, 어서 들어오세요.


밖이 너무 환하고 창문 하나 없는 실내에는 작은 전구가 몇 개 켜져 있을 뿐이라 어두웠다.

하지만 기특한 눈은 자리를 잡고 앉자 이내 어두운 실내에 적응되었다.

마치 극장에 들어갈 때 더듬적거리지만 곧 익숙해지는 원리처럼 말이다.

벽 쪽으로 세 남자가 현지 위스키로 보이는 술을 마시고 있다.

그 정경이 마치 올드한 영화의 한 장면처럼 느껴졌다.

두툼한 금반지와 금팔찌를 두른 사장으로 보이는 남자는 나이는 꽤 들어 보이는 듯했지만 주름살 하나 보이지 않고 탱탱하다.

외국의 중식당에서는 제일 무난한 게 치킨 프라이드 라이스다.

잊지 않고 말했다.

'소금은 넣지 말아주세요.'


스리랑카 사람들은 특유의 친화력을 갖고 있나?

사장은 내게 와 말을 건다.

물론 뻔한 질문들이다.

'어디서 왔냐, 스리랑카엔 얼마나 있느냐, 이곳이 맘에 드냐?...'

그러면서 한쪽 벽을 가리키며 저 날을 혹시 기억하느냐고 말했다.

2004.12.26 TSUNAMI WATER LINE  Time AM. 9:15



쓰나미가 밀려왔던 바로 그날, 물이 들어찼던 높이에 붉은 줄로 표시를 해놓은 것이다.

인도네시아, 태국, 인도, 스리랑카 등 인도양 일대에서 2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쓰나미의 기록이었다.

나는 그때 시카고에 머물고 있었다.

TV에서 Breaking News를 보며 놀랐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갈레는 스리랑카 남부 최대의 항구 도시이자 네 번째로 큰 도시이다. 

2004년 인도양을 휩쓸었던 쓰나미로 갈레 또한 큰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스리랑카의 남서해안에는 수십수백 킬로미터에 이르는 해변이 이어져 있다. 

2004년에 있었던 쓰나미 때 갈레 신시가지와 주변 도시들이 폐허가 되고 수천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하지만, 갈레 구시가지만은 요새 덕분에 피해가 적었다고 한다. 

당시 스리랑카에서 쓰나미로 인한 사망자는 약 3만 명이었으며, 갈레 지역에서만 4천여 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중국집 사장은 그곳을 30년 동안 운영해오고 있으며 62세라고 했다.

아들이 셋인데 큰 아들은 밀라노에 살고 있다고 자랑이 늘어진다.

계산을 하고 일어서려는데 갑자기 명함을 내밀더니 내 주소를 가르쳐달라는 것이다.

그리고는 자기한테 엽서를 보내주면 좋겠다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친구가 된 거니까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주소는 곤란하다고 했다.

대신 잘 주로 사용하지 않는 세컨드 E메일 주소를 적어주었다.

미안한 얘기지만 그가 준 명함은 돌아와 짐 정리를 하며 버려졌다.


기차를 타려면 아직도  1시간 넘게 남았다.

진행 방향으로 몇 걸음 옮기니 Cafe라는 글씨가 보였다.

상호는 The old railway,

이상한 것은 분명 카페라는 글씨와 함께 커피, 주스, 샌드위치, 샐러드, 케이크이라고 쓰여있지만 안으로 들어서니 옷을 파는 곳이었다.

들어가는 순간 범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꼈다.

인테리어라고 할 것 까지는 없지만 유럽 분위기가 느껴지면서 걸려있는 옷의 컬러나 소품들이 예사롭지 않다.

안쪽에는 세 명의 여인이 나란히 재봉틀을 앞에 두고 뭔가를 만들고 있다.

값은 스리랑카에 어울리지 않는 고가로 한국 물가와 비슷한 정도였다.

조심스레 둘러보고 작은 헝겊 가방에 가죽 끈을 손바느질로 달아놓은 크로스백 하나를 구입했다.

1500루피(30,000원)로 결코 싸진 않지만 면의 색감과 가벼움이 맘에 들었다.

나무 계단을 통해 카페가 있는 2층으로 올라가니 놀라움은 배가 되었다.



독특하고 개성 있는 쿠션이 놓인 안락의자, 보라색 나무 창틀, 아이들이 그린 그림 같은 노랑과 파란 라탄 의자,

무엇보다 맘에 들었던 것은 오래된 문짝을 바닥에 깔고 유리를 덮어 만든 커다란 테이블이었다.

하물며 팬이 돌아갈 때마다 쇳가루가 풀풀 날릴 것 같은 낡은 선풍기마저 그 공간에 놓여있다는 이유만으로 사랑스러워 보였다면 이해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싶다.

벽에 걸린 액자에 컬러 매거진이 들어있었다.

읽어보니 그곳을 운영하는 사람에 대한 내용이다.

Catherine Rawson,

그 샵의 오너인 캐서린 로슨은 세계적인 명문 디자인 스쿨인 영국의 세인트 마틴 칼리지를 졸업한 디자이너였다.

친한 친구의 딸이 세인트 마틴을 졸업했기에 그 학교가 얼마나 대단한 곳인지 익히 알고 있었다.

그녀는 런던과 파리에서 디자이너로 활약하며 기라로쉬에서도 일했다.

그러다가 남편인 라시카를 만나 결혼 후 스리랑카에 살며 여러 개의 매장을 운영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뭔가 느낌이 다르다 했더니만 역시나 그런 놀라운 배경이 있었다. 


바닥에 놓인 거울에 비친 나의 발


커피를 마시며 창 밖으로 하교 중인 여학생들의 사진을 찍었다.

무릎이 푹 덮이는 길이의 교복 스커트를 입고 너나 할 것 없이 양 갈래로 땋은 머리 끝에는 똑같은 색과 모양의 리본이 달려 있다.

어린아이 둘을 대동한 독일 부부가 들어왔다.

그들은 식사를 주문했고 같은 테이블에 오래도록 앉아 있는 게 폐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밖으로 나왔다.



길 건너편에 있는 힌두 사원은 공사 중이라 담 밖에서 사진을 겨우 몇 장 찍을 수 있었다.

근처 공원으로 갔다.

입장료는 10루피(100원),

딱히 볼 건 없지만 큰 나무 그늘 아래 벤치에서 오가는 사람을 바라보다가 역으로 갔다.

여행지에서 시간이 남아돌다니,

그것도 심심할 정도라니,

너무 좋다.



해변에 늘어선 파파야 나무 곁으로 레일이 이어지고 시속 40km의 기차가 느릿느릿 달리고 있다.

검붉은 노을이 나무 파파야 사이로 무너지고 있었다.

달리는 기차 안이었지만 연신 셔터를 눌렀다.

해변에서 말을 타는 사람이 지나가거나 바람에 나뭇잎이 휘어지기도 했다.

몇 마리 새가 검은 실루엣을 남기며 날아가기도 했다.



콜롬보의 파빌리온 호텔로 돌아오니 off중인 보디 대신 다른 남자가 방으로 안내했다.

맡기고 갔던 러기지는 이미 방 안에 놓여 있었다.

먼저 있던 방 보다 1.5배는 크지 싶다.

지난 번 방도 좋았지만 그 방은 훨씬 맘에 들었다. 

옷장 옆에 낡은 부츠가 한 켤레 놓여있다.

신문을 정성스레 말아 끼워 놓은 것을 굳이 다 빼고 신어보았다.

분명 남성용이었겠고 약간 크지만 멋지게 어울렸다.

보디가 아닌 나딤을 찾아가 물어보았다.


- 저~, 이 부츠가 맘에 드는데 혹시 살 수 있을까요?

- 아~ 그건 안돼요. 히틀러 부츠로 알려졌는데 오너가 아주 아끼는 것이거든요.



서운했지만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상하게도 내게는 올드한 것과 간혹 남자 옷이나 신발을 좋아하는 취향이 있다.

그렇게 나딤과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보디와는 오래된 친구로 젊은 시절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일을 했단다.

심장 조영술을 받은 후 담배를 끊었는데 아직도 야근을 하는 날이면 호텔리어로 일하는 27살 된 아들이 꼭 전화를 하곤 한다는 말을 했다.

그 말을 하는 순간 때 마침 그의 손전화가 울렸다.

그의 아들이었다.

약간 마른 체형에 보디보다는 많이 큰 그 또한 유순하고 침착한 성격이 엿보였다.


환승할 때 샀던 호세 쿠엘보 테킬라 몇 잔을 마시고 쓰러지듯 잠이 들었다.

까마귀 우는 소리가 들렸다.

아침이다.   

밖으로 나가니 보디가 반갑게 인사를 하며 다가온다.


- 방이 맘에 드세요?

- 네, 아주요. 고마워요.


인도 첸나이로 가는 항공은 오후 6시 30분,

나흘 전, 콜롬보 공항에 도착해서 호텔로 올 때 타고 왔던 택시 기사에게 이미 예약을 해놓은 상태였다.

택시 기사가 4시까지 호텔로 오기로 말이다.

할 일은 없고 그때까지 주변 산책을 하러 밖으로 나갔다.

가까운 곳에 시장이 있었다.

채소와 과일, 곡류, 육류, 생선은 물론 옷가지나 그릇, 시계점까지 다양한 점포가 있어 흥미로운 구경거리가 되었다.



근처 로컬 식당으로 들어가 식사를 하고 망고 주스를 마셨다.

음식은 깔끔했고 특히 감자볶음이 맛있었다.

주인인 젊은 부부는 수줍어하며 칠리소스, 소이 소스 등을 가져다주었다.



호텔로 돌아와 보디가 가져다준 커피를 마시며 택시가 오기를 기다렸다.

보디는 카우치에 편히 누워 한 숨 자라고 권하며 쿠션을 벨 수 있도록 만졌다.

그는 아무 상관없다고 했지만 게스트들이 오갈 수 있는 공동 구역에서 그럴 수는 없었다.

약속한 4시가 지나가는데 택시기사는 오지 않았다.

내가 첸나이로 갈 것을 알고 있던 보디가 물었다.



- 몇 시 비행기예요?

- 6시 반이요

- 네? 오늘 저녁 6시 반이라고요?

- 네


그가 웃음기를 거둔 표정은 그때 처음 보았다. 

무척 당황하고 걱정스러운 듯 급히 말했다.


- 이거 큰 일이네요. 지금쯤 공항에 가 있어야 해요. 콜롬보는 트래픽 잼이 무척 심하거든요.

  특히 사무원들이 퇴근하는 4시부터는 정말 말도 못해요. 그걸 모르셨군요. 하지만 걱정 말아요.

  호텔에 차가 있으니 어서 데려다 주라고 할게요. 


보디는 리셉션에 일을 보는 중년 부인에게 내 사연을 전했고 부인은 40불을 내야 한다고 했다.

40불이 아니라 400달러 라도 주고 가야 할 판국이다.

갑자기 발등에 불똥이 떨어진 나는 서둘러 차에 타는 바람에 보디와 그 흔한 허그도 하지 못했다.

차창으로 손을 건네 악수를 했을 뿐이다.

보디의 눈이 촉촉했다.

그리고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나도 그랬을 것을 짐작한다.

작고 아담한 키에 동글동글한 얼굴, 아기 같은 미소가 떠나지 않는 그는 정녕 천사였다.

그러나 정작 헤어질 때는 그의 웃는 모습을 볼 수 없었다.


호텔 자동차 기사는 최대한 빨리 가겠노라고 나를 안심시켰다.

하지만 자동차에 날개가 없는 이상 빨리 갈 방법은 없었다.

도로는 여러 탈 것 들로 빼곡하고 움직이지 않는 시간이 늘어만 갔다.

게다가 차는 대형 RV로 좁은 도로를 쉽게 빠져나가지도 못했다.

가까스로 도심을 벗어나 짧은 거리긴 하지만 고속도로를 쌩쌩 달렸고 공항 표지판이 멀리 보였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공항으로 진입하는 도로를 놓치고 다른 길로 들어섰다.

이미 100m쯤 주행한 상태이고 도로는 일방통행이다.

가까스로 차를 돌려 역주행이 시작되었다.

그야말로 위험천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쏘리를 연발했고 나는 괜찮다는 말을 거듭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공항에 도착했고 나는 기사에게 거금의 팁을 주었다.


포터라는 글씨가 써진 조끼를 입은 남자가 카트를 들이밀고 러기지를 싣더니 물었다.

어디로 가는 몇 시 비행기이며 무슨 항공이냐는 것을,

왜 이렇게 늦었냐고 묻기에 여러 설명이 필요 없겠다 싶어 트래픽 잼이라고 간단명료하게 대답했다.

스리랑카는 공항 청사로 들어가는 순간부터 짐과 티켓, 여권 검사를 했다.

공항 사정에 익숙한 포터는 날쌔게 인도했고 줄이 짧은 비즈니스석 라인에서 보딩패스를 받을 수 있게 도와주었다.

짐을 부치고 게이트 앞으로 가니 6시, 아직 보딩은 시작되지 않은 상태였다.

휴~

그렇게 무사히 비행기를 타고 인도로 날아갈 수 있었다.


만일 보디가 비행기 출발 시각을 묻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놓쳤을지도 모른다.

고마워요, 보디.

당신이 두고두고 그리울 거예요.


Bod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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