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내가 남긴 최고의 걸작은 나의 정원이다."
모네 지베르니 정원
'마스크 벗어도 돼요. 당신이 원해서라면 모르지만 이제 기차에서도 마스크를 쓰지 않아도 되도록 바뀌었답니다.'
중년 신사가 친절하게 말했습니다.
보름 전 프랑스에 도착했을 때에는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마스크를 착용해야 했는데 그 사이 바뀐 겁니다.
감사의 말을 전하고 마스크를 벗었지요.
M과 L이 나란히 앉고 나는 통로 건너 1인용 좌석에 앉았습니다.
앙티브-칸-툴롱-마르세이유를 거쳐 파리 리옹역까지는 약 6시간 예정.
고속철인데 그 정도 걸리는 걸 보면 프랑스 면적이 넓긴 합니다.
평일이라 그런지 출발지인 니스에서는 1st class의 빈 좌석이 많더군요.
Gare de Nice ville (니스 역)
1등 칸 탔다고 남편에게 자랑한다며 사진을 찍어달라던 T
내일 아침은 몇 시에 먹을 거야? 라며 매일 새벽부터 식사 준비를 자처하던 D
사진을 찍을 때마다 다리를 요상하게 ㄱ자로 만들어 항상 웃게 만들던 J
친구 셋이 빠져나가니 뭔가 두고 온 듯 허전합니다.
우리는 말없이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풍경에 시선을 두고 있습니다.
파리에서 6일을 지낼 예정입니다.
스케줄은 단순합니다.
마레 지구 어슬렁거리며 빈티지 샵 구경하기,
필하모니 드 파리의 콘서트 2회,
파리에서 가까운 지베르니와 오베르 쉬르 우아즈 다녀오기.
그러니까 에펠탑이나 몽마르트, 루브르 박물관, 오르셰 미술관, 오랑주리 미술관, 노트르담 성당, 샹젤리제, 개선문 이런 유명 관광지는 아무 데도 가지 않을 예정입니다.
파리는 이미 여러 차례 왔던 터라 웬만한 곳은 다 가보았으니까요.
숙소는 운하가 훤히 내려다 보이는 아파트입니다.
물이 보이는 풍경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싶습니다.
바다, 강, 호수, 아니 이렇게 작은 운하라도 좋습니다.
센강의 지류겠지만 대도시 한복판에서 수변에 위치한 것 하나만으로도 멋집니다.
갖가지 앤티크 한 가구에 레드를 포인트로 한 파리 숙소는 수 십 장의 그림들이 벽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남은 일정 20일 동안은 1인 1방입니다.
셋 다 말이 없는 편이고 조용한 곳에서 에너지를 얻는 타입이라 좋은 시간을 보내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파리 숙소
비가 내렸습니다.
발코니에서 내다보이는 선상 레스토랑의 붉은 선체 위로, 그리고 운하 위로 빗방울이 떨어집니다.
16일 동안 한결같던 표정의 파란 하늘이 뭔가 할 이야기가 많은 듯합니다.
빗방울이 물 위로 떨어지며 수없이 많은 동그라미를 그려냅니다.
그대로 무념무상,
요즘 말로 '비 멍'
차분하게 흘러가는 그 시간이 참 좋았습니다.
새벽이면 조깅을 하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이질 않고
저녁이면 물가에 모여 앉아 맥주 몇 병에 몇 가지 요깃거리를 챙겨서 좀처럼 지지 않는 해를 등지고 앉아 담소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아무 데도 가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이틀이 지났어요.
하지만 누구도 아쉬워하거나 시간이 흘러감에 초조해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걸 원했던 여행이니까요.
밤 10시의 파리 숙소 발코니에서 보이는 비 내리는 운하
클로드 모네 (Claude Monet, 1840-1926),
잠깐 생각해도 머리에 떠오르는 작품이 참 많은 화가입니다.
우선 그가 43년 동안 살면서 직접 가꾼 지베르니의 정원, 인상파라는 말이 처음 생겨난 해돋이, 수련 연작, 에트르타의 코끼리 바위, 파리 생 라자르 역, 루앙 성당 연작, 부인과 아들을 그린 파라솔을 든 여인 등 좋아하는 그림이 참 많습니다.
모네의 수련
모네가 1883년, 마흔세 살 때 구입하여 죽을 때까지 43년 동안 살았던 그의 집과 정원은 지금은 두 말할 것도 없이 유명한 관광지가 되었습니다.
지베르니에 가기 위해 파리 생 라자르 역 (Gare Saint Lazare)에서 기차를 타고 출발해 베르농 역(Gare de Vernon)까지 갔습니다.
베르농 역에 내리니 마침 지베르니까지 운영하는 코끼리 기차가 승객을 기다리고 있더군요.
셔틀버스를 타도 되지만 귀여운 코끼리 기차를 탔습니다.
모네의 그림 '생 라자레 역'을 참 좋아하는데 그 역에서 기차를 타자니 기분이 묘합니다.
그림 속의 그때 그 시절은 정말 멋지게 느껴지니까요.
모네 그림 생 라자르 역(좌), 현재의 생 라자르 역(우)
꽃이 지천인 계절은 역시 5월입니다.
사실 여름에 피는 꽃은 생각보다 적거든요.
과연 지베르니는 5월이 1년 중 가장 인기 있는 때라는 걸 실감했습니다.
코끼리 열차와 셔틀버스에서 내린 사람들과 개인 차량으로 도착한 사람들이 그야말로 떼 지어 한쪽 방향으로 걸어갑니다.
무슨 행사장에 상품 받으러 가는 사람들처럼 말이죠.
모네의 집으로 가는 동네 길목에서 벌써 모네의 화폭을 떠올리는 꽃들이 즐비합니다.
마을 전체가 모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지요.
마을의 일반 주택도 모네의 집 분위기
그의 집으로 들어가려면 기념품을 파는 샵을 지나가게 됩니다.
물론 돌아 나올 때도 마찬가지죠.
그런데 높은 유리 천장으로 만들어진 그곳이 모네의 아틀리에였다고 쓰여있습니다.
드디어 보입니다.
분홍색 벽에 초록 창문이 가득한 그의 집 앞엔 수억의 꽃송이들이 가득합니다.
놀라운 것은 그곳을 찾아온 사람들의 숫자였습니다.
관광객이 많을 것을 예상하여 아침 일찍 나섰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집으로 들어가려는 사람들이 벌써 길게 줄지어 서있습니다.
무려 만 평이나 된다는 그의 넓은 정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베르니의 정원은 평소에도 11월부터 3월까지는 개장하지 않는데요.
지난 코로나로 영업을 중단하였다가 2022년 4월, 그리니까 우리가 방문하기 한 달 전에 재개장을 한 것입니다.
1년 중 가장 인기 많은 5월, 게다가 한동안 문을 닫았으니 사람이 많은 건 당연한 일입니다.
통행이 가능한 길은 모두 사람들로 북적인다.
황 수선화, 붓꽃, 작약, 한련, 장미, 수선화, 루피너스, 알리움 등 다양한 식물들이 군데군데 산책로를 가로지르는 아치 아래 다양한 색으로 수를 놓고 있습니다.
정원 관리를 위해서 곳곳에 출입을 통제하는 줄이 쳐져있지만 꽃들은 차고 넘쳤습니다.
정형화되고 획일적으로 가꾼 베르사유의 정원의 아름다움과는 다르게 자연스레 피어난 꽃의 색깔은 파스텔을 트럭으로 쏟아부어 놓은 것처럼 은은합니다.
"내가 화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꽃 덕분이다"라고 했던 그의 말이 이해가 되더군요.
마침내 그의 집으로 들어갑니다.
1층 첫 방은 거실 겸 아틀리에로 모네의 그림이 가득 걸려 있는데 모두 복제품이라고 합니다.
이어 응접실, 부엌 등으로 이어지는데 방마다 컬러가 다르더군요.
다이닝 룸은 노란색, 주방은 파란색입니다.
모네는 특히 일본 문화와 미술품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기에 그가 수집한 일본 판화 컬렉션의 수가 상당했습니다.
제법 화려한 바닥의 타일과 꽃무늬 커튼, 벽에 걸린 액자 등 수 없이 많은 장식품과 컬러들이 어수선할 법도 한데 단 한 곳도 그런 느낌은 없었습니다.
그저 단정하고 조화로운 아름다움만 가득했지요.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가장 먼저 보이는 방이 모네가 썼던 방입니다.
현대 인상파 화가들의 복제품들이 벽에 걸려 있고 꽃무늬 양탄자, 소나무로 제작한 가구들이 제법 부유하게 살았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지금도 손색없이 아름다운 타일과 주방 집기
하나하나 눈을 뗄 수 없이 아름다움으로 도배가 되어있는 그의 집은 규모가 꽤 크더군요.
지금 살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아니 꽤 수준이 높지만 과하지 않게 고급스러우면서 고상했습니다.
차근차근 보고 싶은 게 너무 많은데 그만큼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도무지 사람에 걸려 사진을 찍을 수도 없습니다.
일종의 멀미가 느껴지더군요.
사람이 많은 곳에 가면 숨이 턱 막히면서 의욕이 툭 하고 떨어지곤 합니다.
그게 심해지면 호흡이 곤란해질 때도 있지요.
일종의 폐소 공포증으로 그곳을 벗어나고 싶은 충동에 휩싸입니다.
그곳에서도 그랬지요.
밀려드는 사람들을 헤치고 서둘러 빠져나왔습니다.
모네의 집으로 들어가려는 사람들은 더 늘어나 어느새 큰 정원의 모퉁이를 도는 곳까지 줄을 서 있습니다.
연못으로 가는 길
모네는 1865년 열여덟 살의 모델 까미유 동시외(Camille Doncieux)를 처음 만났습니다.
많은 화가들이 모델과 관계를 맺었던 것처럼 모네 역시 그녀와 사랑에 빠졌습니다.
1867년에 아들 장 모네를 (Jean Monet) 낳았고 가족들이 그들의 결혼을 반대했지만 1870년에 결혼해서 트루빌로 신혼여행을 갔습니다.
1877년에 둘째 아들 미셸 모네(Michel Monet)를 낳은 까미유의 건강이 갑자기 나빠졌고 2년 동안 병상에 있다가 서른두 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모네는 카미유가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무려 52점의 그녀를 그렸으니 아내이면서 뮤즈였습니다.
파라솔을 든 여인 (까미유와 장) 창문 앞의 까미유
지베르니의 정원에서 수련이 있는 물의 정원은 화룡점정입니다.
생전 모네는 정원의 수련들을 직접 길렀다고 합니다.
모네는 그림에 대한 애정과 열정만큼이나 정원을 가꾸는 일에 열정이 있었고, 주위 사람들은 그를 화가라기보다 정원사로 부를 정도였다고 해요.
그는 화가일 뿐 아니라 일류 정원가였던 셈이지요.
이토록 정원에 관심을 가진 건 꽃과 나무, 풍경을 마음껏 그리고 싶어서였습니다.
하지만 말년에 그는
'식물의 색감을 화폭에 그려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즉 식물 본연의 아름다움을 담아낼 수는 없다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합니다.
모네는 처음부터 정원을 목표로 삼고 지베르니에서의 거주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현재 집의 땅과 정원 일부뿐이었는데 후에 길 건너편의 땅까지 구입해 연못을 조성하고,
다리를 놓아 새로운 정원을 만들게 된 것이지요.
43년을 살았으니 그곳은 그의 전부였으리라 생각합니다.
휘영청 늘어진 버드나무 가지, 연못 가에 핀 붓꽃, 일본식으로 만든 작은 다리 위엔 연보랏빛 등나무 꽃이 주렁주렁 피어있고 파란 하늘의 구름까지, 그 모든 것을 연못이 담고 있었습니다.
수련이 보이는 연못가에 앉아 시시각각 빛의 떨림을 화폭에 담았을 화가의 시간은 어떻게 지나갔을까요.
폴 세잔이 말했습니다.
'모네는 신의 눈을 가진 유일한 인간이다.'
일본식 다리
모네가 부유한 미술품 수집가인 에르네스 오셰데(Ernest Hoschedé)을 알게 된 것은 그의 집에 걸 작품을 의뢰받으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경제 불황이 닥쳐오고 낭비벽이 심했던 오셰데는 파산을 해버렸습니다.
자살에 실패한 오셰데는 가족을 팽개친 채 혼자서 벨기에로 도망을 가버렸습니다.
모네는 집도 없이 이곳저곳을 전전하던 그의 부인 알리스와 여섯 명의 아이들을 그의 집으로 데려왔습니다.
그때 모네가 살던 곳은 현재 지베르니의 집에서 약 17km 떨어진 베튀유(Vetheuil)였습니다.
두 가정이 한 지붕 아래 살게 된 것이지요.
그 시기는 모네의 부인 까미유가 병석에 있었을 때였습니다.
남편 없는 여인이 병든 아내가 있는 남자와 한 집에 살고 있다는 것은 주위 사람들이 입방아를 찢기 딱 좋은 일이었지요.
하지만 알리스는 이런 묘한 상황에서 나름 정성을 다해 카미유를 간호했고 카미유 역시 그녀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알리스는 까미유의 임종까지 꼼꼼히 챙기며 지냈답니다.
모네는 카미유가 죽은 후 절망에 빠져 한동안 그림을 그리지 못하다가 알리스의 위안을 받고 차츰 안정을 찾게 됩니다.
1891년 알리스의 남편이 죽었고 다음 해에 모네와 알리스는 재혼했습니다.
그녀는 모네보다 스물다섯이나 적었습니다.
그리고 모네는 두 아들, 그리고 알리스와 그녀의 여섯 자녀가 살 집으로 지베르니의 오래된 농가를 구입하게 되었는데 그 집이 오늘날의 지베르니의 정원으로 유명한 모네의 집이 된 것이죠.
모네와 알리스의 가족들(왼쪽 뒤 첫 번째 남자가 모네, 그 앞의 여인이 알리스) Blanche Hoschedé Monet(1865-1947)
모네는 그곳에서 250여 점의 수련 연작을 포함하여 수없이 많은 그림을 탄생시켰습니다.
모네는 말년에 백내장으로 두 차례 수술을 받았지만 시력을 거의 회복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그의 말년 작품에서 강한 붓 터치와 강렬한 색감이 나타나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일본식 다리의 그림을 연도별로 비교해보니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1899년 작품 1900년 작품 1919년 작품 1923년 작품
꽃에 취하고 정원과 연못에 심취하였지만 사람들에 치이는 것만큼은 피할 수 없었습니다.
아름다운 그의 집을 빠져나왔지만 그곳은 동네 자체가 모두 그의 정원과 같은 분위기입니다.
그러나 세계 각국에서 찾아오는 여행자들 때문에 그곳에 사는 게 얼마나 불편할까 싶은 생각도 들었습니다.
개양귀비가 흐드러지게 피어있었어요.
까미유가 두 아들과 서 있던 그림 속의 딱 그 모습 그대로여서 놀라울 뿐이었지요.
그리고 이후 오베르 쉬르 우아즈, 르 아브르, 에트르타 등을 다니면서 그와 같은 광경을 계속 만나게 된답니다.
아르장퇴유 부근의 개양귀비 꽃
베르농 역으로 향하는 셔틀버스에 올라탄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기도하는 사람처럼 고개를 떨구고 잠에 빠져들었습니다.
힘든 일을 한 것도 아닌데, 높은 산을 올라가던 것도 아닌데, 그냥 정원과 집을 돌며 무조건 예쁜 것들만 보았을 뿐인데 피곤함이 몰려왔지요.
그러나 오래 묵혀둔 숙제를 한 것처럼 홀가분하고 뿌듯했습니다.
'이제 몸이 힘드네'
나이가 들어갈수록 몸이 힘들어지는 것은 당연하지요.
그렇지만 변치 않는 게 있습니다.
꿈은 늙지 않는다는 겁니다.
여전히 '싶음'이 많아서 오늘도 행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