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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나무 Aug 19. 2022

23.사막엔 피라미드, 바다엔 몽생미셸

Mont-Saint-Michel




2015년 1월

비는 그쳤지만 여전히 흐림 가득.

리옹 역에서 RER C를 타고 메시 역에서 렌으로 가는 기차로 갈아탔다.

노르망디의 겨울 풍광은 아름다웠다.

빈 가지의 나무들은 무채색 꽃 같은 겨우살이들이 주렁주렁 매달려있었다.

겨울의 황량함이 그토록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이 어색했다.        

그곳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어둑어둑했기에 곧장 호텔에 체크 인 하고 밖으로 나갔다.

이미 대부분의 상가는 문을 닫았고 하얀 양 떼 무리와 알록달록한 소들만 문 앞을 지키고 있었다.



2015년 1월 몸 생 미셸 갯벌



흑백 영화를 보는 것처럼 온통 무채색이던 갯벌의 모습을 지금도 생생하다.

'말 타면 종 부리고 싶다'라는 말이 있다.

다음에 다시 올 땐 물에 잠긴 수도원의 모습을 보고 싶다는 소망을 가졌었다.

그 맘인즉 그곳에 꼭 다시 오겠다는 다짐을 전재로 한 것이었다.

정말 그랬다.

그곳에 다시 간다.

그리고 오늘 그 바람이 이루어지면 좋겠다.


5시쯤 숙소를 출발했다.

노을도 보고, 야경도 보겠다는 의도였다.

생 말로에서 몽 생 미셸까지는 한 시간 남짓 걸린다.


'LJ!, 오늘 몽생미셸까지 운전해 봐, 내가 시내 빠져나가서 좀 한적한 곳에 세워줄게.'

'그럴게.'


LJ는 30년 이상의 운전 경력을 가진 베스트 드라이버이다.

하지만 해외에서의 운전 경험은 없고 겁이 좀 많은 친구다.

역시 경력은 무시하지 못한다.

여행 내내 운전하기를 사양하던 LJ는 안정적인 실력으로 몽 생 미셸 주차장에 여유 있게 주차를 마쳤다.

주차를 한 후 도보(몽 생 미셸까지는 3.4km, 호텔 존에서 몽생 미셸까지는 2.5km) 또는 셔틀버스나 마차를 타고 들어가야 한다.

2005년 이전에는 몽 생 미셸 섬 바로 앞까지 자동차를 갖고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환경적인 문제로 인해 2015년에 디트마 페이팅거(Dietmar Feichtinger)가 설계한 다리가 세워지고 주차장은 섬과 떨어진 외딴 이곳으로 옮겨졌다.




셔틀버스는 무료, 마차는 유로
8개 국어 인사말 '방문을 환영합니다'




프랑스어로 몽(mont)은 산을, 생(saint)은 성자를, 미셸은 대천사 미카엘의 불어식 이름이다.

즉, 성자 미카엘의 언덕이라는 뜻이다.

섬의 높이는 80m, 그 위에 157m 높이의 수도원이 세워진 모습은 그야말로 현대판 불가사의라고 할 수 있다.

맨 꼭대기에는 금으로 된 대천사 미카엘이 자리하고 있다.

몽생미셸에 상주하는 인구는 40여 명, 거주라는 의미보다 직업적인 이유로 인해 부정기적으로 상주하는 사람들 뿐이라고 한다.

그곳 수도원에 거주하는 수도자들이 있을까? 궁금하여 몽 생 미셸 홈페이지를 검색했다.

현재 형제 5명과 자매 7명 등 12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이들은 예루살렘 수도원 형제회 소속으로 2001년부터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셔틀버스는 호텔과 상가들이 모여있는 호텔 존에서 정차하는데 우리는 그곳에서 일단 내렸다.

그 이유는 아직 노을을 보러 가기에는 터무니없이 밝았기 때문이다.

7년 전 묵었던 가브리엘 호텔, 알록달록한 소, 몽 생 미셸의 사진이 박힌 기념품 등이 모두 그대로였다.

근처 호텔 레스토랑에 들어가 커피를 마시기로 했다.

그리고 이 사진들을 발견했다.








연간 400만 명이 그곳을 찾아온다.


'그 많은 사람들이 몽 생 미셸을 찾아오는 가장 큰 이유가 뭘까?'


몸이 100냥이면 눈이 90냥이라는 옛말이 있다.

우리 신체의 기능 중 '보다'라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다.

그곳을 찾아오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 으뜸은 아름답고 신비한 저 모습을 보기 위해 찾아오는 것이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다시 셔틀버스를 타고 데크로 만들어진 다리를 건넜다.

다리의 길이는 760m.

신비하다, 경이롭다, 아름답다, 환상적이다, 비현실적이다... 별별 수식어를 생각해보아도 적절하게 표현할 말이 없다.

끝내 적절한 단어를 찾아내지 못했다.


몽 생 미셸은 여전히 똑같은 얼굴로 서 있었다.

어딜 봐도 흑백 사진 같은 갯벌도 변함이 없다.

그곳의 갯벌은 유럽에서 가장 크기로 유명하데 축구장 45,000개의 넓이라고 하니 가히 상상이 불가하다.

모노톤의 그 바다는 아름다웠다.

마음이 급하여 흔들리는 셔틀버스 안에서도 계속 사진을 찍었다.

정작 그곳 앞에 가까이 가면 그 모습을 중앙에 넣고 찍을 수 없기도 하다.

걸어가는 사람,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 그들 뒤로는 수수께끼 같은 삼각형의 수도원이 서 있었다.

가슴이 뛴다.



 





셔틀버스는 500m 전방에서 승하차




컬러로 촬영했지만 흑백으로 보이는 갯벌



몽 생 미셸로 들어가는 입구에 '왕의 문(Porte de Roi)'으로 알려진 거대한 문이 나타난다.

이 문을 지나 좁은 비탈길을 따라 올라가는 길이 그랑 루(grand rue)인데 몽 생 미셸의 주요 거리로 섬을 빙빙 둘러싸고 있다.

이름처럼 그리 넓지는 않지만 포석이 깔린 옛 길 그대로 남아있다.



왕의 문(Porte de Roi)



제일 먼저 눈에 띄는 레스토랑은 뿔라 아주머니네 (La mere Poulard)레스토랑으로 오믈렛이 주 메뉴이다.

원조 장충종 왕족발 할머니 집! 같은 곳이다.

1879년, 가난하고 배고픈 수도자들에게 음식을 대접하기 위해 시작되었다는 레스토랑으로 어니스트 헤밍웨이와 입생 로랑을 포함한 유명한 인사들이 사인을 해 놓은 벽으로 유명하다.

값에 비해 맛이 없다는 평이 있다.

골목을 오르다 보면 여기저기서 똑같은 이름의 레스토랑을 만나게 되는데 그 모두가 뿔라 할머니의 후손들이 영업을 하고 있는 이유란다.

15세기와 16세기에 지었을법한 목재로 된 집들은 원래 수도승들이 포도주를 마시거나 식사를 하던 식당, 잡화점들이었지만 지금은 대부분 선물 가게, 호텔, 레스토랑인데 상가들은 이미 문을 닫은 곳이 대부분이다.




La mere Poulard
유명 인사들의 사인이 걸린 레스토랑 내부
수도원으로 향하는 길 Grand rue



몽 생 미셸을 둘러싸고 있는 영불 해협은 유럽에서 가장 빠른 조수간만의 차를 가지고 있다.

보통은 1초에 1m씩 물이 차오르는데 빠를 때는 초당 6m의 속도라고 하니 아찔하다.

그런 이유로 옛날에는 이곳을 지나가던 사람들이 많이 죽었고 무덤 산(Mont tombe)이라고 불렸었다.


몽생미셸이 속한 아브랑슈 지역의 주교 오베르는 어느 날 밤 꿈속에서 대천사 미카엘을 만난다.

미카엘은 오베르에게  사람들이 무서워하는 무덤 산에 수도원을 지을 것을 명했다.

꿈에서 일어난 일이니 당연히 오베르는 대천사의 계시를 무시했다.

며칠 뒤 대천사 미카엘은 화난 표정으로 다시 나타나 주교를 응징했다.

손가락을 내밀어 주교의 머리카락을 태운 것이다.

놀라 잠에서 깬 주교는 이마에 실제로 상처가 난 것을 알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정신을 차리고 난 오베르는 문헌을 뒤져보니, 미카엘 천사를 위한 곳이 5세기경에 이탈리아 몬테 가르노 Mont gargano에 비슷한 계시로 세워졌다는 알게 되었다.

그렇게 계시를 받들어 708년에 초석을 올린 것을 시작으로 1000년이 넘게 변화해 온 것이다.



몽 생 미셸의 변천사를 보여주는 모형 사진



몽 생 미셸은 백년전쟁 기간 중에는 요새 역할도 하였고, 프랑스혁명 이후에는 외딴섬에 위치한 지리적 특성으로 감옥으로도 이용되었다.

몽생미셸은 총 3개 층으로 지어져 있는데 중세 시대에는 1층은 서민, 2층은 귀족, 3층은 왕족들만 이용이 가능했다고 한다.      

노르망디 공작의 후원으로 확장된 이곳은 14세기 성 루이 saint louis 왕의 후원 아래 번영하였고, 프랑스혁명을 거치면서 감옥으로 변했지만, 빅토르 위고를 비롯한 여러 위인들의 노력으로 복원을 거쳐 1897년에는 미카엘 천사 상이 꼭대기에 올려지면서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몽 생 미셸을 사랑했던 빅토르 위고는 '사막에는 오아시스가 있고 바다에는 몽 생 미셸이 있다.'라는 말을 남겼다


수도원 꼭대기에는 미카엘 대천사(Saint-Michel) 상이 보이는데 그 실제 크기는 어마어마하다.

무게 820kg, 길이 3,5m의 어마어마한 천사는 2016년에 복원되어 헬리콥터를 타고 해발 156m의 꼭대기에 재입성하였다.




헬리콥터로 수송되는 미카엘 대천사(Saint-Michel)
미카엘 대천사(Saint-Michel)



수도원으로 올라가는 길 곳곳에 사진이 걸려있는데 눈길을 끄는 게 있었다.

'여기까지 기차가 다녔다고?'

이 사진이 궁금하여 찾아보니 1901년 7월 29일 퐁토르송과 몽생미셸의 11km를 연결하는 철도가 개통하여, 증기 트램 이 운행함에 따라 더 많은 관광객을 유명한 바위로 수송할 수 있었다는 기록이 있었다.

퐁토르송은 몽 생 미셸로 가는 길목에 있는 작은 마을이다.

지금은 기차를 타고 오면 그곳에서 내려 버스로 갈아타고 몽 생 미셸까지 갈 수 있다.

기차 사진은 수도원으로 가는 길목 곳곳에 걸려 있다.

120년 전에 섬을 연결하는 제방을 만들고 철로를 놓았다는 것이 너무 신기했다.

정말 그 섬은 우리가 알 수 없는 신묘한 힘이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퐁토르송에서 출발하여 몽생미셸까지 다니던 기차





석양을 본다는 생각에 꽂혀 미처 챙기지 못한 게 있었다.

수도원 입장시간은 오후 7시, 아직 대낮 같지만 이미 문은 닫혀 있었다.

M과 나는 가보았으나 LJ가 못 가보게 되어 아쉬움이 남지만 성곽을 둘러보기로 했다.

몽생미셸의 둥그런 서쪽 테라스(Terrasse de l'Ouest)는 노을을 바라보기도 좋고 물이 차오르는 모습을 관찰하기 좋은 장소이다.




수도원 묘지
수도원으로 올라가는 계단
수도원에 있는 성 미카엘



주택 담보 대출이라고 잘 알려진 ‘모기지론’은 영어로 mortgage loan이라고 쓴다.

여기서 mortgage의 철자가 조금 낯설다.

자음이 3개나 연달아 나와 발음이 어렵다.

이 단어는프랑스어로 죽음을 의미하는 mort와 담보를 뜻하는 gage가 합쳐진 말이다.

     

사실 모기지론은 무척 오래된 제도로 중세 시대에 시작되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지만 당시 유럽의 귀족들에게 경제의 기본이 되는 것은 토지였다.

귀족들이 얻을 수 있는 재화는 자신의 영지에서 나오는 수확물과 세금이 전부였다.

그러나 토지는 현물을 생산해내는 데 반해, 귀족들은 현금이 필요한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지금의 중동 지방에서 수입되는 사치품을 구입하려면 상당한 금액의 현금이 필요했다.     

     

가뜩이나 현금이 부족하던 중세 유럽의 제후들은 또 다른 사건을 맞닥뜨리게 된다.

십자군 원정이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전쟁은 신앙심과 명분만으로는 할 수 없다.

제후들은 원정에 참여하기 위해 자신들의 영지를 돈 많은 대제후에게 담보로 맡기고 현금을 빌렸다.

본격적인 모기지론의 시대가 이미 11세기에 열린 것이다.     


노르망디의 공 윌리엄의 아들은 십자군 원정에 참여하기 위해 노르망디 공국을 저당 잡히고 은화를 대출받았다.

노르망디는 남한의 30%나 되는 면적이다.

노르망디를 저당 잡힌 것은 역사상 최대 규모의 모기지론이다.           

관례적으로 mortgage라고 불렸던 이 탐욕스러운 고리대금은 수도원의 동의 하에 이루어지는 대표적인 돈벌이 수단이었다.

고리대금의 확정 이율은 10~15퍼센트로, 원칙적으로 단기간에 원금을 상환할 수 없다.

최소 15년에서 20년씩 이자를 물어야 하는 경우가 빈번했고, 짧아야 2년에서 10년이었다.

다시 말해 몽 생 미셸은 모기지론에 저당 잡혔던 최초의 수도원이었던 셈이다.

출처 <하루 3분 세계사>(김동섭/ 시공사/ 2017년)








오후 9시



밖에서 바라보는 몽 생 미셸이 아름답다는 것은 가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기막히게 아름답게 찍은 사진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아마 파리의 에펠 탑 만큼이나 많은 사진이 있지 않을까 싶다.

몽 생 미셸에서 밖을 바라보는 풍경 또한 이루 말할 수 없이 경이롭다.

축구장 45,000개 넓이의 갯벌이 펼쳐져있고 그 너머엔 장난감같이 작은 나무들이 서 있다.

이미 사람들에게 길들여진 갈매기들은 코 앞까지 다가가도 꿈쩍도 하지 않는다.

해가 지려면 아직도 멀었구나 싶은 빛이 붉은 벽돌로 쌓은 담벼락을 가스등처럼 붉게 비춘다.

기가 막히게 예쁘다거나 화려한 그 무엇은 단 하나도 없는 갯벌과 하늘을 바라볼 뿐이다.

갯벌에 드리워진 몽 생 미셸의 그림자, 그 실루엣을 좀 더 잘 잡아보려고 연신 셔터를 눌렀다.

그냥 뭐에 홀린 듯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시계를 보니 9시,

아직도 환하다.










문득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 섬으로 이어지는 다리 아래로 물길을 내며 점점 몸을 불리고 있는 게 보였다.


'물이 들어오고 있는데...'


그 광경이 신기했다.

불과 2시간 전에 보았던 모노톤의 갯벌 위로 바닷물이 안으로 안으로 밀려들어오고 있는 것이다.

밀물이 시작되면 순식간에 차오른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있다.

하지만 그게 1초에 1m, 빠를 때는 1초에 6~7m씩 물이 차오를 정도라는 것까지는 모르고 있었다.

서쪽 바다가 서서히 금빛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셔틀버스가 다니는 다리 위를 보니 버스도 없고 사람들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셔틀버스가 몇 시까지 운행하지?'

마침 지나가는 행인이 있어 물어보니 새벽 1시까지 다닐 거라면서 확실치 않다고 했다.

몇 년 전에 왔던 기억으로 밤 늦게까지 운행하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래도 불안하다.

버스를 놓치면 주차장까지 3.4km를 걸어가야 한다.

걷지 못할 정도로 먼 거리는 아니지만 걱정이 되긴 했다.

서둘러 수도원을 내려오니 그 사이 물은 서쪽 섬을 가득 채웠고 다리 아래도 넘실거리고 있었다.

이제 갯벌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저 멀리 셔틀버스가 서 있다.

그곳까지는 500m

다른 여행자들이 버스를 향해 뛰는 모습이 보였다.

그 버스가 마지막 버스일까? 의심이 드는 순간 우리도 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자꾸 뒤에서 누군가 나를 잡아당긴다.


'이렇게 아름다운 시간에 정말 떠나야만 하나?'


그렇게 돌아서길 수십 번 반복했다.




 









2022년 생 말로 월별 조수 시간표



주차장에 도착하니 밤 10시가 조금 넘어서고 있었다.

난데없이 달리기를 한데다 잘 왔다는 안도감이 겹쳐 긴장이 풀리니 갑자기 기운이 빠졌다.

허기가 밀려와 생각해보니 어쩌다 저녁 식사도 못했던 것이다.


밤 11시가 다 되어 가는 시각, 생 말로로 돌아가는 길에 만나는 하늘은 갖은 묘기를 다 부리고 있다.

주황색이다가 보라색으로 다시 핑크색에서 노란색으로 생방송으로 진행하는 하늘의 묘기쇼를 보는 것 같았다.  


'LJ! 오늘 일기 써야겠다, 그렇지?'

'그럼 당연히 써야지. 이렇게 쓸 거야, 날씨, 맑음. 나는 오늘 몽 생 미셸까지 운전을 했다. 참 재미있었다. 끝!'


우리는 박수를 치며 웃었다.


하고 싶은데 못하는 것은 간절함이 부족하다는 증거다.

단순한 싶음이 아닌 간절함이 오늘을 만든 것이다.

그렇게 후회 없는 하루가 지나갔다.  





밤 11시 30분,  생 말로 숙소에서 찍은 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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