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뜻 밖에 해변의 묘지
Saint Malo
물은 고집이 없습니다.
어디든 담을 수 있으니까요.
물은 부드럽습니다.
어디든 흘러가니까요.
물은 뼈가 있습니다.
가끔은 다 부숴버리니까요.
한 장이 사진이 나를 생말로로 이끌었습니다.
브르타뉴 출신 사진작가 레미 르므니시에(Rémi Lemenicier)가 생 말로의 파도를 찍은 사진입니다.
레미 르므니시에(Rémi Lemenicier) 생 말로
'저~기 몽 생 미셸 보인다'
오른쪽으로 45도쯤 방향으로 삼각형 모양의 수도원이 자그마하게 보였습니다.
이 여행의 마지막 보물 같은 곳이죠.
생 말로 숙소 부근에 도착했습니다.
잠시 정차를 하고 두리번거리며 집 주소를 확인하는 중, 허름한 재킷을 입은 남자가 자동차로 다가오는 게 뭔가 할 얘기가 있는 모양입니다.
당연히 외국인 여행자를 위해 뭔가 도와줄 게 없을까 물어보려나보다 생각했지요.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습니다.
'나는 여기 살고 계시는 장모님 댁에 놀러 왔습니다. 여긴 참 아름다운 곳이죠. 나는 옛날에 중동전에도 참가했었어요. 4개 국어를 할 수 있답니다.'라며 뜬금없는 이야기를 늘어놓는 겁니다.
잠시 귀를 기울였으나 도무지 우리와는 아무 상관없는 말을 계속 듣고 있을 수는 없었지요.
미안하지만 우리는 지금 할 일이 있으니 생 말로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시라고 하곤 유리창을 올렸습니다.
집의 위치가 맞다는 것을 확인한 후 호스트에게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 우리는 지금 당신 집 앞에 도착했는데요, 체크인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요?
- 당신은 내게 스케줄을 미리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5시 반까지 그쪽으로 가겠습니다.
- 제가 생 말로에 4시쯤 도착할 거라는 메시지를 어제 보냈는데요.
나는 어제 보낸 메시지 내용을 캡처하여 보냈습니다.
그 메시지에는 상대방이 OK라고 보내온 답장도 들어있었지요.
하지만 상대방은
- 난 아무것도 받지 못했습니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답장을 했지요.
- 그래요? 알았습니다. 5시 반에 문 앞에서 기다리죠.
그 시간에 만나자든가, 알았다든가 하는 답은 없었습니다.
생 말로의 숙소는 COCOONR라는 이름의 에이전시에서 관리하는 집입니다.
에어비앤비는 집주인이 여행자들에게 집을 임대하는 방식이라 호스트가 직접 게스트를 맞이하고 지켜야 할 사항이나 정보 등을 알려주는 게 일반적입니다.
물론 도착 예정 시각을 미리 전달하면 호스트가 그에 따르는 절차들을 알려주기 마련이죠.
다만 셀프 체크 인일 경우 열쇠를 찾는 방법과 와이파이 비밀 번호 등의 세부 내용을 24시간~48시간 전에 알려줍니다.
그러나 에어비앤비의 인기가 높아질수록 게스트와의 커뮤니케이션, 청소 등을 전문적으로 관리하는 에이전시에 위탁하는 곳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죠.
여러 채의 집을 임대해서 에어비앤비에 등록하고 운영을 하는 경우 혼자 관리가 어려우니까요.
우리는 2014년부터 에어비앤비를 이용하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오십 곳이 넘는 도시를 다녔습니다.
많은 호스트들을 만났고 다양한 집에서 생활해봤지요.
직접 구운 케이크나, 치즈, 와인 등을 준비해놓고 환영의 인사를 전하는 따뜻한 호스트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여분의 화장지조차 준비해놓지 않아서 불편을 겪거나 체크 아웃할 때 침구 시트를 모두 벗겨달라고 요청하는 호스트도 있었습니다.
오늘처럼 에이전시가 관리하는 집은 따뜻한 정 같은 것은 당연히 기대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다행히 그곳 숙소는 안뜰에 프라이빗 주차장이 있어서 일단 주차를 했지요.
자동차 다섯 대는 너끈하게 주차할 수 있는 공간에 코발트색 자동차 한 대가 주차되어 있더군요.
길을 건너면 바로 바다입니다.
군데군데 벤치가 있지만 그야말로 땡볕이라 마땅치 않았습니다.
그나마 어떤 집의 담벼락 아래에 그늘진 벤치가 있어 그곳에 앉았지요.
딱히 하는 일 없이 앉아 시간을 보내고 있는 주민들이 오가는 지인들과 잠시 몇 마디씩 수다를 떠는 모습이 보입니다.
개를 데리고 해변을 산책하는 할머니, 모래사장에 담요 한 장 깔아놓고 아기와 놀고 있는 젊은 엄마,
축구공을 번갈아가며 벽치기를 하는 두 꼬마, 흔히 볼 수 있는 동네 풍경이 다큐멘터리처럼 지나갔습니다.
그날 역시 햇빛은 쓸데없이 맑았고 힘 있게 뻗어나가는 구름도 한몫 거들었습니다.
장모님 댁에 왔다는 이상한 아저씨가 저만치서 다가와 또 말을 겁니다.
아직 시간이 남아 있었지만 아저씨를 피해 벤치에서 일어났습니다.
일단 차에서 캐리어를 꺼내 놓고 안뜰 정원에 앉아 있었지요.
5시 35분쯤 에이전시의 이름 모를 아가씨가 왔습니다.
우편함에 들어있는 열쇠를 꺼내어 문을 열어주더니 체크 아웃할 때 열쇠를 다시 우편함에 넣으라는 말만 하고 가버리더군요.
'쏘리' 아니면 '빠르동', 그 쉬운 말 한마디 없이요.
따져봤자 소용없는 일, 입꼬리를 올리고 품위 있는 표정으로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했습니다.
거실과 이어진 다이닝 룸과 침실 두 개는 바다를 향하고 있어 전망이 좋더군요.
안뜰 방향으로 있는 나머지 방은 개인 욕실이 함께 있어 편리하고요.
초록색으로 칠해진 거실 벽면에는 모네의 그림 <개양귀비> 모사품이 걸려 있는데 싸구려 티가 너무 많이 나서 눈살이 찌푸려졌습니다.
그래도 곳곳에 앤티크 한 소품과 바다를 주제로 한 사진들을 적절히 걸어 놓아 집을 꾸미려는 흔적이 엿보였지요.
거실에서 보이는 뷰 거실
생말로는 영국해협과 접한 프랑스의 북서부 브르타뉴 지방의 항구 도시입니다.
15세기에는 해상 탐험으로 수많은 해상과 해적을 배출하였고 프랑스 정부는 이들을 소탕하려 했지만 워낙 해적들의 세력이 강해 토벌에 실패, 아예 그들을 용인하기로 했습니다.
그 결과 해적을 막으려 쌓은 성벽 안의 마을은 해적들의 본거지가 된 것이지요.
당시 해적의 후예들은 '나는 프랑스 사람도, 브르타뉴 사람도 아니고 오직 생말로 사람이다'라 할 정도로 자부심이 대단했다네요.
올드 타운의 한가운데는 높은 첨탑이 솟아 있고 성곽 입구 앞에는 검은색의 해적선이 정박해 있었습니다.
아마도 선상 레스토랑으로 운영하는 배가 아닐까 추측했습니다.
생 말로가 북에서 온 켈트족 출신인 해적들의 본거지임을 보여주는 일종의 상징 같은 것이지요.
생 말로 항에 정박되어 있는 해적선 생 말로 올드 타운 전경
'생 말로에 가면 썰물 때 걸어서 들어갈 수 있는 작은 섬이 있어.
거기서 바라보는 올드 타운 모습이 꽤 볼만하니까 물때가 맞으면 꼭 한 번 가보길...'
나만큼 여행을 좋아하는 R의 귀띔이 있었습니다.
아침을 먹고 느지막이 집을 나섰지요.
그날은 일단 성벽을 걷고 썰물 시간이 언제인지 알아본 후 다음 날 가보기로 했습니다.
성벽 아래의 항구 쪽, 그러니까 생 뱅상 문 주변에 관광안내소와 주차장들이 몰려있습니다.
하지만 M이 검색한 결과 성벽 내부로 들어가 좀 더 위쪽에 있는 주차장을 이용하는 게 좋겠다고 했지요.
친구의 생각은 탁월했습니다.
2km나 되는 성벽길을 걸어야 하는데 만일 뱅상 문 주변에 주차를 했다면 꽤 올라가야 하는 언덕길이어서 성벽을 걷기도 전에 지쳤을 테니까요.
성 안으로 들어가는 뱅상 문 Vincent gate 생 뱅상 성당
어딘가를 가리키며 서있는 동상이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로베르 수르쿠프(Robert Surcouf, 1773 ~ 1827)
1789년~1801년, 그리고 1807년~1808년까지 인도양에서 활동한 프랑스 해적의 우두머리였더군요.
당시 해적들은 프랑스 정부의 공인을 얻어 영국, 미국, 포르투갈 상인들의 배를 털어 부를 축적하고 일부를 정부의 세금으로 냈다고 합니다.
영국군에 그에게 '당신은 돈을 위해 싸우지만 우리는 명예를 위해 싸운다.'라고 하자
수르쿠프는 '나는 모두를 위해 싸운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사실 그는 해적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지만 아군을 위한 해적질이었기에 나라에서 훈장까지 받았다고 합니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당시 시대적인 조류가 어떠했는지도 모르거니와 단순히 개인의 욕심을 위해 해적질을 한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을 파고들어 알고 싶은 생각이 없음이 솔직한 마음입니다.
로베르 수르쿠프(Robert Surcouf)
요새를 막기 위해 쓰였던 대포 옆에는 위풍당당한 남자의 동상이 있습니다.
캐나다 대륙을 처음 발견하고 <캐나다>라는 이름을 붙여준 자크 카르티에(Jacques-Cartier 1491-1557)라는 탐험가입니다.
혹시 명품 시계로 유명한 그 카르티에? 하고 찾아봤더니 시계의 장인은 '루이 프랑수아 까르띠에'라는 이름의 다른 사람이더군요.
1535년, 왕의 지원을 받은 탐험가 자크 카르티에는 오늘날 캐나다의 퀘벡, 스타다코나 마을에서 도착하였습니다.
그는 원주민 추장과 함께 세인트 로렌스 강을 따라 탐험에 나섰고 그곳의 지명을 물어보았는데, 카르티에의 말을 이해 못 했던 추장은 '마을'이라는 뜻의 카나타(Kanata)라고 대답하였다지요.
그러나 자크 카르티에는 그것을 지명으로 알아들어 오늘날의 캐나다(Canada)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합니다.
캐나다의 퀘벡 지역이 지금까지 프랑스어를 쓰고 있는 이유를 비로소 알게 되었네요.
자크 카르티에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의 성벽길은 수를 놓은 듯 모여 있는 주황색 지붕들을 보는 맛이 쏠쏠했었지요.
영국의 요크와 포르투갈의 오비두스의 작은 성벽도 아기자기 예뻤던 기억이 있습니다.
생 말로 본 세쿠르 해변의 넘실대는 바다 위에는 크레파스처럼 빨갛고 노란 카약을 타는 사람들이 길게 무리를 지어 노를 젓고 있었습니다.
바라보기만 해도 즐겁더군요.
카약을 즐기는 사람들 쁘띠 베
건너편에 작은 섬 하나가 보였지요.
좀 더 걷다 보니 저 멀리 또 하나의 섬이 보이고 아슬아슬하게 이어지는 모래 길을 따라 그쪽으로 건너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하나 둘 보이더군요.
서서히 물이 빠지고 있던 거였습니다.
몇 시간에 물이 빠지고 들어오는지에 대한 상식이나 정보가 없던 우리는 갑자기 마음이 급해졌습니다.
'저기 사람들이 건너 가네, 우리 저기부터 다녀오는 게 어때?'
'좋아, 그럽시다.'
갑자기 마음이 급합니다.
썰물이 시작되고 길이 열려 쁘띠 베로 걸어가는 사람들 쁘띠 베
바닷물이 빠지면서 드러난 갯벌의 좁은 길을 따라 섬을 향해 걷습니다.
윤슬이 어찌나 예쁜지 그 모습을 바라보느라 가다 서고를 반복했습니다.
생 말로 해변에는 독특한 풍경이 있습니다.
그곳은 세계적으로 조수간만의 차가 크기로 손꼽히는 곳인데 밀물과 썰물 때 해수면의 높이가 무려 13미터 정도나 된다니 쉽게 상상이 되지 않습니다.
그곳의 주민들은 그곳을 침략하려고 하는 적들과 싸움과 동시에 파도와의 싸움에서도 이겨내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벽을 파도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해안선을 따라 참나무 기둥을 깊숙이 심었지요.
나무 기둥들을 방파제로 삼아 파도의 세기를 약화시키도록 말입니다.
그 개수가 무려 3천여 개라고 합니다.
놀랍게도 나무 기둥을 고정해 만든 이 방파제는 17세기부터 현재까지 요새를 지키는 든든한 수호신의 역할을 계속해오고 있는 겁니다.
쁘띠 베에서 바라본 생 말로 성
내가 생말로에 가보고 싶었던 이유가 바로 그 참나무 기둥에 부딪히는 파도의 사진을 보고 나서였습니다.
파도와 파도 사이의 시간을 파랑이라고 합니다.
파랑이 길수록 다음 파도는 더욱 거세어지는 거죠.
바람이 없어 거센 파랑은 경험하지 못한 아쉬움은 있습니다.
하지만 오랜 세월 파도와 싸워온 참나무 기둥을 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했습니다.
작은 섬에는 나시오날이라는 이름의 작은 요새가 있는데 문이 닫혀 있더군요.
안내문을 보니 6월부터 9월까지 개방한다고 쓰여있는데 그날은 5월 30일이라 아쉽게도 내부를 볼 수는 없었지요.
섬에서 바라보는 올드 타운의 성채와 성벽은 과연 웅장하고 아름다웠습니다.
생각보다 규모가 무척 크고 견고해 보입니다.
해안선을 따라 펼쳐진 금빛 모래와 파란 하늘을 그대로 끌어안은 바다, 그리고 갯벌에 남아있는 바닷물의 조화가 환상적입니다.
비좁은 바위틈에 앉아 바다를 한참 바라보았습니다.
나시오날 요새
지붕 위, 성벽 위에 노랗게 물들어 있는 것은 새들의 배설물이 쌓여 산화된 것이 아닐까 추측
섬에서 빠져나와 다시 왔던 길을 되짚어가는데 섬 하나가 또 보이는 겁니다.
조금 전 분명히 바닷물이 넘실대던 곳은 완전히 물이 빠지고 그곳 또한 사람들이 건너가고 있는 모습이 보였지요.
그랑 베(Grand Bé), 쁘띠 베(Petit Bé)는 생말로 성벽 기슭의 란스 하구에 위치한 두 개의 무인 섬을 일컫는 이름입니다.
Bé라는 용어는 두 개의 인접한 섬을 뜻하는데 우리가 방금 들어갔던 섬이 쁘띠 베(Petit Bé)였지요.
그랑 베(Grand Bé)도 가보기로 했습니다.
멀리서 보아도 그랑 베라는 이름처럼 섬이 제법 커 보이더군요.
방금 전까지 바다를 빨갛고 노랗게 수놓던 카약들이 제 할 일을 다하고 편한 자세로 누워 쉬고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시동이 한 번에 제대로 걸린 경운기처럼 거침없이 바다를 건너 섬으로 올라갔습니다.
아마도 강렬한 태양을 빨리 피하고 싶은 마음에 발걸음이 빨라졌을 겁니다.
뒤돌아 보니 따라오던 두 친구는 사람들 무리에서 누가 누군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멀어졌더군요.
이윽고 섬의 꼭대기에 올랐습니다.
멀리 정박 중인 크루즈와 화이트와 블랙의 요트들이 점점이 떠있는 섬엔 바람 소리, 새소리만 들립니다.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자연스레 섬을 한 바퀴 돌게 되더군요.
썰물 때 그랑 베로 걸어가는 사람들
그랑 베에서 바라본 생 말로 성과 성벽
섬을 반 바퀴쯤 돌았을 때 커다란 돌 십자가가 보였습니다.
1828년 어느 날, 그는 생 말로 시장에게 그곳에 자신의 무덤을 만들 수 있도록 허가해달라는 요청을 했다고 합니다.
'내가 죽으면 이곳에 묻어주시오.'
'바람 소리와 파도 소리, 그 외엔 아무 소리도 듣고 싶지 않습니다.'
죽기 전부터 묘지를 점찍어 놓고 허가 요청을 했던 그 사람은 샤토 브리앙( François-René de Chateaubriand, 1768-1848)입니다.
그로부터 10년 후, 그의 요청이 받아들여졌고 무덤이 될 자리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또다시 10년 후인 1848년, 샤토브리앙은 본인이 원하던 그곳에 묻혔습니다.
그렇게 공을 들여 원대로 묻혔건만 2차 대전 당시 대대적인 폭격을 받아 작가의 무덤은 박살이 났습니다.
1948년, 프랑스 정부는 샤토브리앙 서거 100주년을 맞이하여 작가의 무덤을 복원했습니다.
그가 생전에 원했던 대로 바다를 바라보는 쪽은 울타리가 없도록 만들었더군요.
묘지 뒤의 돌담에 그 내용이 걸려 있었습니다.
'Un grand ecrivain Francais a voulu reposer ici pour n'y entendre que la mer et le vent.
passant. Respecte sa derniere volonte.'
'한 위대한 프랑스 작가는 바닷소리와 바람 소리만 듣기 위해 이곳에서 쉬고 싶어 했습니다.
그의 마지막 뜻을 존중합니다.'
샤토 브리앙 묘지 샤토브리앙의 묘지 앞 묘비 그랑 베의 위치와 면적에 대한 설명(좌), 샤토브리앙의 무덤이 만들어진 배경 설명(우)
샤토브리앙은 프랑스 작가, 정치가, 외교관, 프랑스 낭만주의 문학의 시작점으로 불 수 있는 인물입니다.
생 말로에서 태어난 그는 혼돈의 프랑스혁명 시기에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믿음을 저버릴 때에도 가톨릭의 믿음이 충실한 사람이었던 전통적인 브르타뉴의 귀족이었습니다.
빅토르 위고는 어릴 때부터 샤토 브리앙을 무척 존경했는데 그가 문학의 열정을 불태우던 열네 살 때 일기에 이렇게 썼다고 합니다.
'샤토브리앙처럼 되고 싶다. 그처럼 될 수 없다면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샤토 브리앙 호텔로 사용되는 샤토 브리앙 생가
샤또브리앙(Chateau briand)은 스테이크 요리 이름으로도 유명하데요.
소고기 안심에서도 가장 부드러운 정중앙 부위를 두툼하고 넓적하게 썰어 굽는데, 육즙이 새지 않도록 겉은 빠르게 바삭 굽고 속은 부드러운 식감을 유지하도록 덜 익혀 먹습니다.
이 요리는 샤또브리앙의 개인 요리사였던 몽미레이유(Montmireil)가 그의 주인을 위해 특별히 만들었던 스테이크여서 그의 이름이 붙여졌는데요.
당시 샤또브리앙은 두 사람만을 위한 요리로 만들어졌는데 그 이유는 소 한 마리에서 딱 두 사람이 먹을 정도의 분량만 나오기 때문이랍니다.
보통 프랑스 요리의 코스에서 먹을 수 있는데 가격이 비싼 편에 속하는 스테이크입니다.
샤토브리앙 스테이크
그랑 베를 한 바퀴 돌고 내려와 바닷가 성벽에 기대앉았습니다.
땀이 거의 식을 무렵 저 멀리 섬을 내려오고 있는 두 친구의 모습이 보이더군요.
바다에 잠겨서 보이지 않았던 바다 풀장도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숙소 거실 벽에 걸려 있던 사진에서 본 곳이 바로 거기에 있더군요.
썰물이 되면 드러나는 sea pool, 매력 있는 수영장입니다.
물에 잠긴 바다 풀
썰물 때의 바다 풀
셋 다, 너나 할 것 없이 기진맥진입니다.
가볍게 성벽만 돌아보기로 하고 나왔는데 얼떨결에 섬 두 곳을 다녀왔으니까 그럴 만도 하지요.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
'몸은 힘들었지만 좋았어'
그러면 된 거죠.
좋았으면 된 겁니다.
다음 날, 생말로의 샵들이 즐비한 거리로 나갔습니다.
비비드한 컬러의 기념품과 유니크한 디자인의 가방 등 매력적인 상품들이 많더군요.
뭘 사서 맛이 아니라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합니다.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는 빵집이 보였지요.
퀸 아망(Kouin Amann)이라는 이름의 브르타뉴 전통 디저트 빵은 경주의 황남빵, 천안 호두과자 같은 그 지역의 특산물입니다.
동그란 모양의 페이스추리는 먹기도 전에 이미 그 맛이 짐작되더군요.
결결이 버터가 듬뿍 들어가 다소 기름지고 달콤했습니다.
당 떨어졌을 때 조금 떼어먹으면 안성맞춤인 정도!
우리 입맛에 즐겨 먹을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생 말로 빵, 퀸 아망(Kouin Amann) 생 말로 퀸 아망 맛집
쿠바 여행을 할 때 아바나에 여러 날 있었지만 말레꼰 방파제를 넘나드는 파도를 한 번도 못 보았습니다.
생 말로에서도 닷새를 있었지만 역시나 몰아치는 파도는 못 만났습니다.
하지만 샤토 브리앙과 자크 카르티에, 그리고 3천 개의 참나무 기둥을 만난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입니다.
폴 발레리의 해변의 묘지는 못 갔어도 그보다 선배인 샤또브리앙의 해변의 묘지를 다녀왔으니 만족합니다.
'개성 있는 작가는 어느 누구도 모방하지 않는 작가가 아니라,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작가이다.'
'내 이름이 영원히 기억된다면 난 충분히 글을 쓴 것이고, 내 이름이 영원히 기억되지 않는다면 글을 너무 많이 쓴 것이다. - 샤토브리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