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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나무 Jun 10. 2023

카오스 같던 팔레르모

2. Sicily, Palermo




언젠가 친구가 말했다.

'네 여행기를 보면 복기하는 것 같아'

복기란 얼마나 지루한 일인가?

바둑돌이 지나갔던 길을 되짚어 다시 좇아가는 일이니까 말이다.

여행기를 쓰는 일은 기억하지 못할 시간을 위해 기록하는 의미가 가장 크다.

하지만 그 시간을 한번 더 불러들이는 일은 행복을 되풀이하는 일이다.

그리 여기니 복기라는 말이 아름다울 수 있는 거구나 싶었다.


파리에서 가이드 생활을 오래 했다는 어떤 유튜버의 얘기가 인상적이었다.

예정된 여행 스케줄이 끝나고 난 후 인솔했던 단체 여행자들에게

'이번 파리 여행에서 어디, 혹은 언제가 제일 좋으셨어요?'

그러면 대부분 약속이나 했듯

'에펠탑이요, 루브르 박물관이요.'가 아니라

'자유 시간에 노천카페에서 커피 한 잔 마시는 시간이 제일 신나고 행복했어요.'


그렇다.

시간의 자유가 그렇게 좋은 거다.


집을 떠나 여행지에 도착하기까지(유럽 기준)는 대부분 24시간이 넘게 걸린다.

인천에서 로마 레오나르도 다빈치 공항까지의 비행시간은 13시간.

오후 7시 30분에 로마에 도착하여 다시 이탈리아 항공으로 환승하여 팔레르모의 공항에 도착한 시각은 밤 11시 10분.

공항 이름은 팔코네 보르셀리노인데,

마피아에 맞서다가 살해당한 두 명의 판사 조반니 팔코네(Giovanni Falcone)와 파올로 보르셀리노(Paolo Borsellino)의 이름을 붙여 만들어졌다고 한다.

시칠리아스럽다.

숙소가 있는 시내까지는 밤 12시 넘게 버스와 기차가 다닌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만 믿고 있다가 자칫 어긋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염려,

할증 요금을 바가지 쓸 수도 있는 공항 택시도 걱정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므로 미리 호스트에게 부탁하여 밴을 예약해 두었다.


자정이 훌쩍 넘어 도착한 숙소는 층고가 높고 넓은 방이 3개, 욕실 3개, 안뜰과 연꽃이 피어있는 뒤뜰이 있는 아름다운 주택이었다.

무사히 도착했다는 안도감과 긴 비행에서 오는 피곤함이 함께 버무려져 새벽이 시작될 때쯤 잠에 들었다.


여행지에서 깨어나는 첫날 아침은 그냥 부자가 된 거 마냥 흐뭇하고 기분이 좋다.

여행 기간이 오롯이 남아있다는 생각 하나만으로 풍요로운 거다.

여행에 진심인 사람은 그 맘, 알 거라 믿는다.

 

보라색 자카란다꽃들이 무리 져 피어있는 집 앞 도로는 교통량은 많으나 그리 혼잡스럽지는 않아 보였다.

첫날, 제일 먼저 하는 일은 마트에 가는 일이다.

생수, 치즈, 살라미, 버터, 올리브, 요거트, 피클, 잼, 달걀, 샐러드용 채소, 올리브유, 발사믹, 빵 등 필요한 기본 먹거리를 구입하는 게 우선이다.

그러고 나서 렌터카를 픽업하러 공항으로 출발했다.

집 근처에서 버스를 타고 기차역으로 간 후 기차를 타고 공항까지 가기로 했다.


기차의 한쪽 팔은 바다를 껴안고 다른 한쪽 팔은 깎아지른 기암괴석들을 품고 달렸다.

거대한 암석들에는 신들의 눈물자국처럼 군데군데 죽죽 줄무늬가 그어져 있었다.

잠시 기차를 타고 갈 뿐인데 벌써 좋다.

유럽의 30개 나라를 다녀봤지만 처음 보는 풍경이다.

새로운 영상이 자꾸자꾸 다가오고 멀어진다.

섬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규모가 큰 돌산이 다채로운 컬러로 전시되어 있었다.


렌트를 예약한 곳은 Sicily by Car

각종 안내와 유의 사항을 듣고 사인을 한 후, 차 키를 받았다.

주차가 되어 있는 곳을 찾아가니 화이트 컬러의 9인승 밴츠가 서있다.

2015년 크로아티아를 일주할 때 사용했던 자동차와 같은 사양이었다.

시칠리아를 일주하는 동안 발이 되어줄 자동차는 아름답고 당차 보였다.





우리의 주치의이며 언제나 웃음과 활력을 주는 J가 운전대를 잡았다.

친구는 든든하고 당찬 베스트 드라이버이다.

나는 프랑스에 이어 내비 읽어주는 역할을 맡아 조수석에 그리고 D와 LJ은 2열에 앉았다.

당연히 3열은 비었다.

원래 다섯 명이 예정되었던지라 9인승을 예약해 두었었다.

급작스런 사유로 한 친구가 함께 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 한 사람의 빈자리가 그토록 크게 느껴질 줄 몰랐다.

등신대라도 만들어서 태우고 다니고 싶다고 말했다.

맛있으면 맛있어서, 예쁘면 예뻐서, 숙소가 좋으면 또 그게 아까워서, 여행이 끝날 때까지 아쉬움은 늘 따라다녔다.  


공항을 빠져나오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그때는 몰랐다.

머지않아 혼돈의 카오스로 들어서게 될 거라는 것과 기차 타고 해안을 따라 룰루랄라 하던 때가 좋았다는 것을...


이태리 사람들은 다혈질이고 성질이 급하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다.     

게다가 섬사람들은 드세다는 말을 심심찮게들 한다.

그 두 가지가 맞물린 사람들 틈 바구니를 헤쳐나가자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도로에는 차선이 없다.

없는 게 아니라 거의 지워져서 보이지 않는 거다.

게다가 그곳은 마치 좌회전, 우회전 차량이 우선인 듯 직진 차량을 무시하고 들이미는 게 다반사.

초록불이라 직진하려고 출발했는데 건너편 차량은 회전으로 마구 들어온다.

유럽은 좌회전 신호가 따로 없는 곳이 많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긴 하다.

여기가 이태리인지 동남아인지 구분이 안될 정도로 많은 오토바이들이 사방에서 마구 들이 밀고 본다.

그러나 좁고 복잡한 도로에서 내비게이션과 신호등, 들이닥치는 별별 탈 것들(1인승, 2인승 미니 자동차) 사이를 J는 마치 항공모함의 키를 잡은 선장처럼 대담하게 잘도 헤치고 나아갔다.

마치 총알을 피하던 매트릭스의 주인공 같았다.


그렇게 온몸이 경직되듯 잔뜩 긴장하면서 어찌어찌 숙소에 도착했다.

호스트의 메시지에 의하면 작은 차는 두대까지, 큰 차는 너비가 180cm까지 안뜰에 주차가 가능하다고 했다.

하지만 우리의 차는 안뜰에 주차하기엔 사이즈가 너무 컸다.

철문 밖에 세워두어도 되지만 인도를 너무 침범하면 보행자들이 신고를 할 수 있으니 적당히 여유를 두어 달러는 당부도 있었다.

그러자니 차의 뒤꽁무니는 차도를 너무 많이 침범하여 주행에 차질이 있을 정도였다.


하는 수 없이 근처 유로 주차장으로 갔다.

캠핑카를 비롯해 많은 자동차들이 주차되어 있었다.

1시간에 2유로, 24시간에 25유로, 적지 않은 금액이지만 안전한 게 낫겠다 싶어 그곳에 주차를 했다.

그러나 영화 장면처럼 혼돈의 팔레르모를 달렸던 그날은 시작에 불과했다.

운전 경력이 30년이 넘지만 시칠리아는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에 나가자빠질 우리도 아니다.

영화처럼 흥미진진한 일들이 펼쳐질수록 우리들의 여행은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 같아질 수밖에 없었다.  


  

팔레르모 도심의 교통


원래 그날 오후 몬레알레에 있는 팔라티나 예배당에 갈 예정이었지만 일정을 바꾸기로 했다.

가볍게 올드 타운을 산책하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는 의견이 모아졌다,

책에서 본 한 장의 사진이 있는 장소도 찾아볼 겸 나섰다.

시칠리아의 수도인 팔레르모 구시가지는 걸어서 돌아보기에 그리 어렵지 않았다.


마시모 극장이 있는 쥐세프 베르디 광장에 도착했을 때 장례 행렬로 보이는 한 무리 사람들이 지나갔다.

이미 저녁 6시가 넘어선지라 마씨모 극장의 내부 투어는 할 수 없었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아쉬웠던 부분은 팔레르모 일정이 마씨모 극장의 공연 스케줄이 맞지 않았다는 점이다.

마시모 극장은 나폴리 출신의 전설적인 테너 엔리코 카루소가 극장 개막 시즌부터 함께하여 말년까지 노래한 곳이기도 하다.

영화 대부 3편의 마지막 장면에 흐르던 마스카니의 오페라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간주곡을 흥얼거리며 거리를 걸었다.


마시모 극장 측면
마시모 극장 정면



한 가지 눈에 띄는 모습이 있었다.

카페나 레스토랑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주황색 음료를 마시고 있는 거다.

오렌지 주스도 아니고 처음 보는 컬러의 음료였다.

마치 어릴 때 길거리에서 팔던 냉차를 연상시키는 싸구려 음료 같은 색깔이었다.

유럽 사람들은 보편적으로 와인을 많이 마시는데 그곳은 달랐다.

거의 90% 이상의 사람들이 그 알 수 없는 주황색 색 음료를 마시고 있었다.

이름도 맛도 궁금했다.

그럴 땐 망설이지 말고 마셔보면 된다.


  

아페롤 스프리츠



그것은 시칠리아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사람들이 즐기는 아페롤 스프리츠라는 식전주이다.

일종의 칵테일이라 집집마다 맛의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 입맛에는 맞지 않았다.


시칠리아에는 다양한 전통 음식과 디저트들이 수없이 많다.

그중 팔레르모의 대표 음식은 아란치니.

라구소스와 모차렐라, 완두콩과 밥과 섞은 후에  빵가루를 입혀 튀긴 이탈리아 요리로 안에 넣는 재료에 따라 다양한 맛을 즐길 수 있다.

야구공처럼 제법 크다.

Ke Palle라는 전문점에서 세 가지 맛의 아란치니를 사서 먹어보았다.

역시 시금치와 모차렐라가 들어간 맛이 가장 맛있었고 다른 종류도 나쁘지 않았다.



아란치니 전문점
아란치니


드디어 책에서 보았던 사진이 있는 곳이 나타났다.

네 개의 모퉁이라는 뜻의 콰트로 칸티.

그 네 개의 역사 지구는 팔레르모 문화유산의 대부분을 갖고 있는 지역으로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의 조각과 건물들을 뒤로하고 발걸음을 옮기다 보니 프레토리아 분수의 환한 모습이 보였다.

처음 이 분수가 공개되었을 때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미사를 드리기 위해 광장을 오가는 시민들은 곳곳에 서 있는 님프 조각상들의 나신이 눈꼴사나울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치욕의 분수라고 불리기도 했지만 지금은 팔레르모의 랜드마크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책에서 본 콰트로 칸티의 사진
콰트로 칸티의 한쪽


프레토리아 분수



우연히 들어간 성당은 경이로울 만큼 아름답고 신비스러웠다.

촬영이 금지되어 있어 유튜브의 영상으로 대신한다.

그 이름은 Chiesa San Giuseppe dei Teatini

시공을 초월하여 세상에서 가장 큰 힘을 갖고 있는 것은 종교가 아닐까 생각된다.

불가사의할 정도로 크고 정교하며 어떻게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이어져오는 것을 보면 말이다.

어느 종교든 마찬가지이다.

가톨릭 교회는 말할 것도 없고 인도의 힌두교나 아시아의 불교도 마찬가지이다.

그냥 말문이 막히고 저절로 마음이 차분해진다.


 

Chiesa San Giuseppe dei Teatini (출처:Youtube)



시칠리아의 저녁기도(베르디)가 시작되는 시간일까?

어느덧 어둑어둑하다.

마시모 극장 광장에 정차되어 있는 택시를 타고 기사에게 숙소의 주소를 보여주었다.

렌트를 했지만 ztl구역인 올드 타운으로 차를 갖고 다닐 수 없기에 걷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했다.


'여기까지 25유로야'

'뭐라고? 너무 비싼데.'

'여긴 멀다고, 20유로 해줄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택시에서 내렸다.

그리고 우버를 불렀다.

5분도 되지 않아 반짝반짝 광이 나는 블랙 컬러의 벤츠가 우리 앞에 섰다.

요금은 14유로


'멀긴 뭐가 멀어, 3km로 안 되는 거리인데, 우리가 바본 줄 알아? 우린 벤츠 타고 간다~'


그렇게 유쾌 통쾌하게 팔레르모의 첫날이 지나갔다.


거리 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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