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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나무 Jun 11. 2023

나는 그림 속을 걷고 있어

3. Sicily, Erice




'여기까지 와서 거길 안 간다고?'

그런 이야기를 해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다.

여행을 여유 있고 편하게 즐기는 편이다.

우리 모두 그렇다.

하루 종일 숙소에서 뒹굴거리며 쉬어도

'바로 이게 내가 원하던 거지.' 라며 그 시간을 반긴다.


명소들을 빠짐없이 찾아다니기보다 달달한 디저트와 커피, 또는 젤라토를 먹으며 담소하는 시간을 더 사랑한다.

꼭! 반드시! 가 없는 여행 취향, 그래서 더 좋다.

경비가 조금 늘어나더라도 숙소는 넓고 편한 집으로 정하곤 한다.

예정했던 플랜은 말 그대로 플랜일 뿐, 상황에 따라 그때그때 맞게 움직이는 게 옳다고 생각한다.


황금빛 모자이크로 장식된 몬레알레 대성당은 패스, 대신 여유 있게 소박한 중세 마을 에리체에 다녀오기로 했다.

소금 광산이 있다는 트라파니도 패스하기로 했다.

대부분의 여행자들은 트라파니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에리체를 방문한다.

마을까지 올라가면 주차장이 있긴 하지만 넓지 않으므로 주차가 어려울 수 있단다.

그러므로 케이블카 주소를 내비게이션에 입력하고 출발했다.

유료도로를 달리던 중 잠깐 주유소에 들러 커피를 마시기로 했다.

그런데 주유소가 아니라 작은 리조트에 온 듯 정말 예쁘다.

그곳이 목적지라 해도 좋을 듯 한적한 야외 테라스에 앉아 커피도 마시고 사진을 찍으며 한참을 쉬었다.

그날 이후에도 줄곧 주유소에 들러 커피를 마실 때마다 그곳 같은 낭만을 기대했지만 그만한 곳은 없었다.



주유소의 Kaffehaus



에리체가 해발 750m의 정상에 있는 중세 마을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구절양장보다 더한 길을 한도 끝도 없이 올라간다.

작은 풀꽃 하나까지도 예쁜 소로는 끝나지 않을 듯 이어지고 어려운 드라이브지만 영화장면처럼 이어지고 있었다.

연속적으로 U턴하듯 구부러진 길을 곡예하듯 돌다 보니 내비게이션은 결국 작은 주차장으로 안내하는 것으로 임무를 마쳤다.


 

에리체로 올라가는 길의 내비게이션 지도



가까스로 빈자리를 찾았다.

그러나 주차가 가능할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비좁은 데다가 공간마저 비뚤었다.

이태리 차량은 대부분 소형이 많으므로 주차 간격이 좁은 이유도 있다.

셋은 내리고 운전자 J는 면허 시험을 보는 사람처럼 신중하게 이렇게 저렇게 나왔다 들어갔다를 반복하며 각을 재보아도 영 시원찮다.

때 마침 뒤편에 버스가 한대 주차를 했고 기사가 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실례지만 주차를 좀 도와주시겠어요?'


기사는 선뜻 그러겠다며 대신 주차를 대신해 주었다.

그리고는 그는 운전석으로 내리지 못하고 조수석으로 내려야 했다.

미안함과 고마움이 동시에 밀려왔다.

갖고 다니던 선물 하나를 꺼내 건네며 감사의 표시를 전했다.


'이건 한국 전통 자수로 만든 손거울입니다. 소소하지만 선물로 드리고 싶어요. 감사합니다.'


여행할 때마다 호스트들에게 줄 선물을 준비한다.

또한 이렇게 부득이하게 갑자기 도움을 받게 되는 경우를 대비하여 작은 선물들을 몇 개씩 갖고 다닌다.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기분 좋은 일이다.


주차기계에 주차 요금을 정산하고 비로소 발걸음을 떼며 주변을 살폈다.

'그런데 케이블카는 어디서 타는 거지?'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지만 우리는 이미 에리체 마을까지 자동차로 올라온 것이라는 것을 알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주차장을 벗어나자 에리체 안내 지도가 떡하니 서 있었던 것이다.


 



돌로 만들어진 아치형 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니 돌길과 함께 소박한 소로가 이어진다.

아직 오전이라 그런지 여행자가 북적이지 않았다.

적당히 낡고 바랜 벽과 한가로운 돌길, 꽃과 작은 장식들이 붙어있는 작은 상점들, 우리들의 취향들이 종합 선물처럼 즐비했다.


'이거지'

'여기 너무 맘에 든다'


몸이 이리 쏠리고 저리 쏠리며 구절양장을 올라오던 기억은 어느새 지워지고 모두 눈들이 반짝였다.

아무리 멋지고 아름다운 장소이더라도 사람이 많고 시끄러우면 갑자기 에너지를 모두 뺏기는 느낌이 든다.

밀려드는 무기력함으로 인해 어서 빨리 그곳을 벗어날 궁리를 하게 된다.

그런 요소들로 볼 때 에리체는 아주 높은 점수를 줄만한 곳이었다.

18도 정도의 쾌적한 온도와 청명한 하늘, 예쁜 구름, 오래된 간판, 문에 붙은 꽃그림 세라믹 이름표 등, 시속 1km로 걸어도 좋을 그런 곳이다.  

오래된 길과 그위를 버티고 서있는 집, 낡은 벽, 그리고 작은 풀꽃과 작은 나무문 위에 새겨진 필기체 알파벳, 그런 것들을 보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이유는 뭘까?

그 아늑함과 정겨움 들은 사사로운 욕심을 버리게 된다.


 

  


 







'사람들이 몰려들기 전에 이른 점심 식사를 하는 게 어떨까?'

'좋아'


'어머~'를 연발하며 골목길의 예쁨과 한적함에 취해 걷다가 식사할 곳을 찾아보기로 했다.

어른 몸통보다 더 큰 몸통을 가진 야자수와 커다란 베이지 파라솔이 펴진 테라스가 있는 레스토랑으로 정했다.

<Il Rifugio di Enea>

파라솔 위에는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의 그림자가 샹들리에처럼 흔들흔들 춤을 추고 테이블과 의자 사이엔 드문드문 햇살이 합석을 하고 있다.

그 순간의 시간과 그 순간의 그곳,

그게 행복이다.


주문한 음식은 영화 '아이엠 러브'에서 보았던 장면이 떠오를 정도로 비주얼이 예쁘다.

게다가 맛도 좋다.  



에리체 런치



흐뭇한 식사를 마치고 나오니 여행자들의 숫자가 부쩍 많아진 것이 보였다.

시칠리아는 침략에 대처하기 위해 대부분 산꼭대기에 마을을 만들어 살기 시작했다.

갓 태어난 아기, 아픈 사람, 노인, 가난한 사람 그 모두가 모여 마을을 일구고 터전을 마련하기까지 얼마나 힘든 세월을 지냈을까?

하지만 그들 나름대로 기쁨과 행복의 시간이 있었을 테고 오늘날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기까지 예쁘게 보존한 것이 감사했다.


'그림 같아'

아니 이 말은 부족했다.

'나는 지금 그림 속을 걷고 있어.'









에리체에는 고대에 비너스를 모시던 신전인 Castelo di Venere와 페폴리 성 Torretta Pepoli 두 성이 마주 보고 있다.  

Castel 방향 표지판이 있었지만 굳이 그곳을 찾아갈 마음은 없었다.

아래쪽을 내려다보다니 어느새 하얀 구름이 몰려와 있었다.



비너스 성과 페폴리 성


작은 성당을 발견했다.

'Chiesa madre'

무명으로 만든 치마저고리를 입은 처자처럼 꾸밈없는 소박함이 오히려 더 정감이 가는 작은 교회였다.

종탑에 오르니 아득하다.

구불구불 올라왔던 길과 트라파니가 내려다 보였다.

양 떼들이 점점이 풀을 뜯고 간간히 사이프러스도 보인다.

근심도 아픔도 슬픔도 없이 그저 아름다움만 가득할 것 같은 평화로운 풍경이 그곳에 있었다.

우리는 서로 말없이 풍경을 바라보았다.

어떤 생각을 했는지, 무엇을 바랐는지 알 수 없지만 그 잠깐의 시간에 작은 정화를 맛볼 수 있었다.









이번 여행은 4명이다 보니 둘이, 혹은 셋이 사진을 찍는 경우가 많다.

'여긴 꼭 넷이서 찍으면 좋겠어' 하는 곳에서는 주변인에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종종 부탁을 하곤 한다.

그런데 이번 여행은 이상했다.

주변에서 먼저 우리 넷의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나곤 했다.

에리체에서도 그랬다.

골목을 걸어 나오는데 맞은편 교차로에서 서 있던 한 여인이 대뜸 우리들의 사진을 찍어주고 싶다고 했다.

네 사람의 컬러가 아주 예쁘단다.

하물며 스마트폰이 아닌 목에 걸고 있는 내 카메라를 달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이 카메라를 사용할 수 있어요?'

'네.'


아주 잠깐 의심을 했다.

'혹시?'


그러나 카메라를 들고 도망가기엔 너무 험한 돌길이고 뜀박질을 잘할 것 같아 보이지도 않았다.

카메라를 건네주니 그녀는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촬영을 했다.

이어 스마트폰으로도 사진을 찍어준 후 감사의 인사로 마무리했다.

자신 있게 대답한 것과는 말리 결과물이 썩 훌륭한 건 아니지만 먼저 자청하여 사진을 찍어준 그 마음이 고마웠다.


나중에 마리아 할머니 집에서 전통 과자를 사자고 말을 해놓고 잊었다.

마리아 할머니 집은 에리체를 대표하는 디저트 가게로 유명하다.

그냥 무작정 아무 길이나 걸어 들어가고 싶고, 또 그게 좋아서 걷고 또 걷다 보니 마을을 내려온 것이다.

아직도 갈 곳은 많고 디저트 가게도 무궁무진하니 또 다른 곳에서도 맛있는 걸 살 수 있을 거라며 주차장으로 향했다.


왜 항상 돌아오는 길은 갈 때보다 빠르고 쉽게 느껴지는지 궁금하다.

똑같은 길을 되짚어 내려오는데 갈 때 보다 훨씬 수월하다.

꼬불거리기는 하지만 외길이니 내비게이션 읽어주는 일은 잠시 내려놓고 카메라 전원을 켰다.

그리고 이리 쏠리고 저리 쏠리는 자동차 안에서 숨을 참고 균형을 잡으며 셔터를 누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또 감사한 하루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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