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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나무 Jun 22. 2023

숙박비 280유로, 환불해 드리겠습니다.

11. Rome




full to full은 렌터카 업체 대부분의 규칙이다.

차를 반납하기 전에 연료를 가득 채워야 한다.


'공항 도착 하기 전 30Km쯤에 주유소가 있으면 좋겠네'

'있을 거야, 아마 누군가 주유건을 들고 기다리고 있을 걸?


정말 그랬다.

팔레르모 공항이 36km 남아있는 지점에서 주유소를 발견했다.

더구나 셀프 주유가 아니라 급유를 해주는 직원이 있었다.

해외에서 셀프가 아닌 주유소는 처음이다.

누군가 주유건을 들고 기다릴 거라는 말이 그대로 들어맞은 거다.

'말하는 대로'의 법칙이 이어지고 있었다.




바다 옆의 팔레르모 공항



로마 치우미치노 공항에 도착하여 미리 예약해 둔 밴을 타고 숙소로 향했다.

바티칸 시국까지 350m, 옥타비아노 지하철 역까지 100m인 그곳은 19세기에는 궁전이었다는데 어마어마한 중정을 가진 장방형 건축이었다.

건물의 외부는 보수 중이라 천막과 쇠 막대들로 고정을 시켜놓은 상태였다.


다음 날 아침, 샤워를 마친 J가 약간 심각하면서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방에서 나왔다.


'여기 좀 와봐? 좀 이상해, 그런데 내가 그런 것 같지는 않아.'


J의 방에 딸린 욕실로 따라가 보니 샤워 부스 밖에 겹겹이 올려놓은 타월이 이미 흥건하게 젖어 있다.

유럽은 거의 샤워부스나 욕조를 제외한 욕실 바닥은 물 빠짐 시설이 없는 건식이다.

자세히 보니 타일 벽을 타고 물이 흘러내리는 상황이고 샤워 부스 위 천장도 젖어 있다.

위층에서 물이 새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당연히 친구가 그렇게 만들어 놓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친구의 말이 우스웠지만 웃을 일이 아니라 많이 심각해 보였다.



원래 욕실 상태




일단 위층 주민에게 샤워를 멈춰달라는 말을 전하는 게 급선무라 여겨졌다.

LJ와 나는 5층으로 올라갔다.

초인종을 누르고 문을 두드려도 기척이 없다.

'샤워하느라 안 들리나?'

하는 순간 방금 잠에서 깬듯 머리카락이 부스스한 얼굴의 남자가 옷도 제대로 챙겨 입지 못하고 문을 열었다.


'우리는 4층에 묵고 있는 여행자인데요. 우리 방의 욕실에 물이 새고 있어요. 욕실 물을 잠시 잠가주시겠어요?'

'우리는 욕실을 사용하지 않았어요. 방금 깼거든요.'

'어머나 그래요?, 그렇다면 미안합니다.'


다시 숙소로 내려와 보니 아까보다 더 심각했다.

욕실 천장의 등에서도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다.

자칫하면 방까지 물이 들어올 것 같았다.

급한 대로 전등 밑엔 가장 큰 냄비를 받쳐놓고 감전의 우려가 있으니 전등을 껐다.

그리고 현재 상황을 호스트에게 알렸다.

급박함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사진도 첨부했다.


호스트에게 현재 상황을 알리기 했지만 한시가 급했다.

1층의 메인 도어를 열고 들어오면 관리실처럼 보이는 작은 사무실이 있었는데 그곳에 아저씨 한 분이 계셨던 게 기억났다.

거기로 가서 도움을 청해보자고 생각했다.


'우리 좀 도와주시겠어요? 욕실에서 물이 새고 있어요.'


연세가 지긋하신 관리인은 중문의 열쇠가 없다는 거로 이해하신 듯 문을 열어주셨다.

영어를 모른단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물이 새고 있는 욕실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제야 이해를 하신 관리 아저씨는 내게 따라오라며 앞장을 서셨다.

옆 동의 어딘가로 들어가니 공사 중인 건물을 감독하는 사무실로 보이는 곳으로 안내했다.

그중 관리자로 보이는 사람에게 얘기를 하니 함께 가보자고 한다.

위층은 이미 우리가 가봤고 물을 쓰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전했다.

사태의 심각성을 캐치한 그는 숙소의 호스트의 전화번호를 물었다.

그는 호스트인 파올라와 통화를 하고 난 후 잠시 기다리라며 수도를 차단했다.

수도를 차단했다는 것은 씻을 수도, 먹을 수도, 화장실을 쓸 수도 없다는 얘기다.

갑자기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호스트에게 답이 왔다.

우선 불편을 끼쳐서 미안하다.

배관공을 불러서 욕실 천장을 뜯어봐야 알 수 있다고 한다.

스베틀라나가 바로 방문하여 어질러진 집안 청소를 도와주고 새 타월도 준비해 줄 거다.


하지만 그 사달이 언제 마무리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로마에 도착하자마자 이게 무슨 일인가?

우리에게 늘 행운을 주었던 요정과 천사는 시칠리아에서 따라오지 못한 것인가?

라는 이야기를 나누던 중 파올라의 여동생인 엘리자베스와 집의 청소를 도맡고 있는 스베틀라나가 왔다.

그리고 공사 감독 아저씨는 다른 배관공을 데리고 왔다.


엘리자베스는 거듭 사과를 하면서 이 문제가 빠른 시간에 해결되지 않으면 다른 숙소를 구해서 옮겨주겠다는 말도 했다.

하지만 근처에는 이만한 크기의 에어비앤비가 많지 않고 게다가 거의 만실이라 쉽지 않을 거라는 말을 했다.

그건 이미 우리가 그래야만 할 수밖에 없으리라 예상한 일이라 놀랍지도 않았다.


다행히도 문제는 바로 해결되었다.

욕실 천장을 뜯어보니 수도 배관이 낡아서 물이 샌 거고  배관은 바로 교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순식간에 수리가 끝났다.

스베틀라나가 룸과 욕실을 청소하고 타월까지 세팅하는 일만 기다리면 되는 일이었다.

그 모든 게 두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사실 그날은 정해진 일정이 딱히 없었다.

다음날과 다다음 날, 근교 소도시인 오르비에또와 아씨시를 갈 예정이고

느지막이 광장에 나가볼까 하는 중이었다.

다들 로마는 몇 번씩 왔었기에 가볼 만한 명소는 대부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를 해결하러 한 걸음에 도와주러 온 엘리자베스도, 그런 조치를 취한 파올라도 모두 고마웠다.

물론 당연히 해줘야 하는 일이긴 한다.

만일 그렇지 못했다면 숙소를 옮기는 번거로움을 겪어야 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자면 그날 하루는 고스란히 날려버릴 판이다.

엘리자베스에게 파올라 몫까지 두 개의 손거울을 주며 감사의 말을 전했다.

그리고 스베틀라나에게도 작은 손거울을 주었다.

그들은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컴플레인을 걸 정도로 불편한 일이 벌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선물까지 전하는 우리들의 마음이 감동적이었나 보다.

다행인 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만일 그날 일정이 숙소를 일찍  나와 소도시로 떠았더라면 저녁 무렵 집에 돌아왔을 때 물이 새는 것을 알았을 테고 문제는 심각했을 것이다.

그런 걸 생각하면 참으로 다행이고 감사한 일이라 여기기로 했다.

 

나보나 광장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데 파올라에게 메시지가 왔다.


'불편을 드려서 죄송합니다. 배관공이 빠르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서 기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물까지 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신들은 너무 친절하세요. 불편함을 끼치게 한 것에 대한 보답으로 하루치 숙박료 280유로를 환불해 드리겠습니다. 로마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시길 바랍니다.'


사실 우리끼리 '숙박료의 일부를 돌려주면 좋겠네'라는 이야기를 나누긴 했다.

그게 바로 현실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나보나 광장에서 식사를 하고 유쾌한 웨이터가 있는 카페에서 달달한 디저트와 에스프레소 더블을 마셨다.



나보나 광장의 넵튠 분수
에스프레소와 더블 에스프레소
나보나 광장의 카페 ai tre tartufi의 유쾌한 웨이터
나보나 광장의 4대 강 분수
나보나광장의 셀럽 행사
나보나 광장의 갈매기와 드론




트레비 분수, 판테온, 스페인 광장까지 여유롭게 걸었다.

평소에도 로마는 여행자로 넘쳐나는 곳이다.

코로나로 3년 동안 발이 묶였던 사람들이 여행이 시작되니 그야말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사람이 많다.

특히 단체 여행자들이 많아 더 북적이고 복잡했다.


'환불도 받았으니 오늘은 저녁도 외식합시다.'


차이니스 레스토랑에서 거하게 저녁까지 먹었지만 환불받은 280유로를 다 쓰지 못했다.


시라쿠사에서는 변기가 막히고 로마에서는 욕실 천장에서 물이 새는 불편을 겪었지만 전화위복 같은 해프닝으로 기억에 남았다.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버린 셈이다.

아니 우리에겐 여행 요정과 천사가 있음이 분명하다.



시티냐지오 성당
베니치아 광장
트레비 분수
스페인 광장


   

저녁 늦게 산 피에트로 광장으로 산책을 나섰다.

조명을 받은 광장은 아름다웠다/

우리 말고도 드문드문 사람들이 있었다.



바티칸 시국 산 피에트로 광장
바티칸 시국의 용병



광장 한쪽에 'Women's cry'라는 제목의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세계 여성들이 갖고 있는 숨겨진 고통의 외침을 프레임에 담은 작품들이다.

8명의 국제 사진작가들이 찍은 26개의 사진이 걸려있었다.

아마존의 심장부에서 북동 브라질의 빈민가까지, 우크라이나 국경을 가로지르고 그리스 섬에서 아나톨리아의 고지, 인도와 방글라데시의 시골 등 다양한 나라의 사진이었다.

사진은 그것들이 각각 묘사된 장소와 상황의 다양성 속에서 인간의 고통뿐만 아니라 힘과 탄력이 풍부하게 잘 나타나 있었다.

그 전시회에 있는 사진들에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백과사전 프라텔리투티에 실려있는 몇 가지 문구와 함께 설명이 되어 있었다.


슬픔과 아름다움, 그리고 삶의 고뇌가 온전히 전해지는 살아있는 작품들이었다.

강렬하게 시선을 잡아끄는 사진들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우리는 그 속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유난히 길게 느껴지던 로마의 하루가 끝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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