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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나무 Jun 23. 2023

'10년만 젊었어도...' 그게 오늘이다.

12. Orvieto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간이 빠르게 지나간다고 말하곤 한다.


'내가 10년만 젊었어도...'


80대인 엄마도, 70대인 지인도, 30대인 아들조차도 말이다.

이 말은 모든 나이가 괜찮다는 뜻이기도 하다.

더불어 소용없는 말이기도 하다.


10년 후에 '내가 10년만 젊었어도...'라고 말할 거라면

그 10년 젊은 날이 바로 오늘이다.

오늘이 제일 젊다.


직장 생활을 할 때는 시간을 쪼개서 썼다.

어쩌다 아무것도 안 하고 흘려보내는 시간이 생기면 큰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초조했었다.

퇴직을 하고 나니 달라졌다.

그냥 하루종일 빈둥거려도 아깝지 않다.

죄책감도 들지 않는다.

자고 나면 또 새로운 24시간이 생기고,

1년이 지나면 또 다른 한 해가 주어진다.

그리 생각하면 아까울 것도 없다.

어쩌면 시간은 흘러가는 게 아닌지도 모른다는 생각,

시간이 흘러가서 다행이다라는 생각들을 하게 되는 이유는

시간이 만들어낸 풍경 때문이다.

오래된 돌길, 세월이 아니면 만들 수 없는 오래된 색깔,

그것들을 보면서 시간이 흘러가는 게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오르비에토는 로마 테르미니역에서 기차로 한 시간쯤 걸린다.

테르미니역은 수도답게 플랫폼이 많다.

24번 플랫폼까지 한 공간에 모두 있다.

est가 붙은 플랫폼은 좀 떨어져 있어서 한참 걸어야 한다.

촉박하게 역에 도착했는데 플랫폼이 est로 배정되면 기차를 놓칠 수도 있다.

특이한 것은 모든 플랫폼이 계단을 거치지 않아도 된다는 거다.

즉 어디를 가든 올라가고 내려갈 일이 없으니 기차를 편하게 탈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오르비에토 역에 도착하면 푸니쿨라를 타고 올라간 후 버스로 갈아타고 두오모 근처까지 오르게 된다.

날씨가 살짝 흐릿하다.



로마 테르미니역
오르비에토 역 정면에 있는 푸니쿨라 승차장




푸니쿨라에서 내린 다음 버스로 바꿔 탄다.


이탈리아에서 가장 큰 두오모는 밀라노에 있다.

무려 500년이 걸렸다고 한다.

두 번째로 큰 두오모가 바로 오르비에토에 있다.

역시나 이곳의 건축기간도 무려 300년이 걸렸다.


오르비에토의 두오모는 전면과 옆면이 사뭇 다르다.

전면의 파사드는 화려하지만 품위가 있다.

유럽의 어느 성당을 보든 경이로운 것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지만 빼놓을 수 없는 게 돌의 조각이다.

마치 레이스처럼 조각을 하지 않나, 바느질을 하듯, 수를 놓듯 돌조각을 정교하게 쪼개고 붙인 게 보고 또 봐도 믿기지 않는다.

그런 것을 볼 때마다 1700년대에 태어난 나폴레옹이 '불가능은 없다'라고 한 것은 말이 괜히 나온 말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오르비에토 두오모
체험학습 온 학생들
두오모 티켓
두오모 전면 파사드
아플리케하듯 조각해 놓은 컬러 대리석
두오모의 옆면은 줄무늬로 만들어져 있다.


내부의 스테인드 글라스가 독특하다.

컬러풀한 전통적인 스테인드 글라스와 브라운 컬러의 현대적인 스테인드 글라스가 믹스되어 있는데 이질감이 들지 않고 좀 더 차분하게 느껴져서 오히려 좋았다.

파손된 것을 보수하면서 그렇게 만든 것인지 원래부터 그런 것인지는 알아내지 못했다.

작년 10월의 스페인 여행 때에도 이와 비슷한 브라운 컬러의 스테인드 글라스를 본 적이 있다.

기록을 해놓지 않아 기억이 안 난다.

늦었지만 스페인 소도시 한 달 여행기도 쓰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오래된 성당 내부에 그려진 그림들은 대부분 프레스코화이다.

프레스코화는 소석회(수산화칼슘, 백색 분말)에 모래를 섞은 모르타르를 벽면에 바른 다음 그 수분이 마르기 전에 채색하여 완성하는 회화이다.  

벽화화법 중 대표적인 것으로 기원전부터 로마인에 의해 그려져 왔다는데 이 또한 상상하기 어렵다.

쉽게 생각하면 점토 같은 것을 벽에 바르고 그게 마르기 전에 그림을 그려야 하니 화가의 정확한 터치와 속도가 뒤따라야 가능한 일이니까 말이다.

벽화는 주로 성서를 내용으로 그려진다. 그때마다 그에 대해 아는 바가 없어 아쉬움이 크다.

그림을 살펴보다가 아는 얼굴을 발견하여 반가웠다.

단테 알레기에리였다.(1265~1321)




단테 알리기에리




성당에 들어가면 유심히 살펴보는 것 중에 하나가 파이프 오르간이다.


유럽 대부분의 지역에서 수 세기에 걸쳐 가톨릭에서 사용된 성가는 그레고리안 찬트이다.

그레고리오 성가라고도 일컬어지는 이 노래는 현재에도 가톨릭 교회에서 불려지고 있으며, 오늘날 남아 있는 노래 가운데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그레고리우스 1세(540-604)가 로마 교황이었을 당시 불려지던 것을 간추린 것으로서 특별한 악보에 의해 적혔다.

그레고리오 성가는 극단적으로 엄격하고 금욕적이다.

반주가 없고 음성에만 의존했다.

선율은 오직 하나이며 합창대는 제창만 허락될 뿐이었다.


그러므로 중세까지 교회음악은 아예 기악이 없거나 있어도 극소수였다.

오르간이 교회 음악에 많이 사용되게 된 것도 거의 르네상스 이후부터이다.

르네상스 시대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교회음악은 아카펠라(무반주 성악)로 작곡되었다.


9세기경 교육을 목적으로 수도원에 설치되기 시작한 오르간은 점차 여러 성당에 퍼져나갔다.

14세기경부터 오르간은 교회의 거룩한 악기로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이후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오르간을 교회의 전통악기로 지정하면서 공식적인 교회의 전례악기가 되었고

지금은 빼놓을 수 없는 악기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파이프 오르간의 발건반(손 건반과 마찬가지로 검은건반도 있다)



두오모에서 나와 작은 골목을 걷기 시작했다.

흐린 날씨와 오래된 돌벽과 빛바랜 지붕들의 어울림이 운치를 더하여 차분하다.


작고 허름해 보이는 음식점이 보였다.

예쁜 장식이나 화려한 치장 하나 없이 소박한 그곳이 맘에 들었다.

안으로 들어가 보지 않아서 그저 작은 빵집이려니 여기고 간식으로 커피와 빵을 먹을 요량으로 앉았다.

그야말로 길거리에 놓인 작은 테이블과 의자 몇 개다.

야외 테이블은 보통 1인당 2유로~5유로의 자릿세를 받는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밖이 좋다.


메뉴를 보니 음식점이다.

투스카니 주는 발사믹이 유명하고 움브리아 지방인 오르비에토와 페루자 지방인 아씨시는 트러플(송로버섯)이 유명하다.

'l'oste del re'라는 이름의 그곳은 대대로 가족들이 운영하는 음식점이었다.    

카프레제와 브루스케타, 그리고 살라미 플레터와 파스타를 주문했다.


우선 음식의 비주얼이 투박했다.

흔히 볼 수 있는 초록색 바질이나 하얀 치즈, 빨간 토마토 같은 컬러가 없다.

음식의 맛 역시 눈으로 보이는 것처럼 담백하다.

멋을 내지 않은 맛이랄까?

칼국수 면발처럼 두툼한 파스타는 생면으로 만들어 식감이 부드럽다.

버섯과 트러플의 심플한 조합이 담백하면서 풍미가 있었다.

쉽게 말하면 조미료로 치장하지 않은 할머니의 손맛 같은 깊이가 있다.


살라미 플레터는 쫄깃한 소시지부터 약간 쿰쿰한 향이 느껴지는 것까지 각각의 다채로운 컬러를 뽐냈다.

우연히 선택한 길거리 식탁에서 만난 소박한 식사가 최고의 파스타가 될 줄은 몰랐다.

소박하고 좁은 테이블에 앉아 커다란 자동차가 지나가면 의자를 당겨 앉아야 했다.

그러나 유명한 레스토랑이 주는 값과 분위기에서 받는 부담도 없고 편하고 즐거운 식사를 할 수 있어 좋은 기억으로 남았다.



 



살라미 플레터
트러플 버섯 파스타



작은 도시가 주는 편안함이 있다.

한가롭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인데 요즘은 어딜 가나 사람이 많아 즐거움이 전과 같지 않다.

오래된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작은 골목은 사랑스럽다.

걸어도 걸어도 질리지 않는다.

좁은 골목이 주는 포근함이 있다.

창틀에 놓아둔 화분 하나, 창문으로 보이는 하얀 레이스 커튼, 그 모두에는 따뜻한 사랑이 담겨 있다.

작고 오래된 것들의 아름다움을 찾아다니는 것만큼 즐거운 일도 없다.

뜯겨나간 벽, 부서진 기와, 이끼가 낀 돌계단, 그 근사한 색깔은 오직 시간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걸작이다.



  






1900년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에서 볼법한 의상을 입은 노부부가 걸어오고 있었다.

화장을 곱게 한 부인은 계절에 어울리리 않는 모피 숄을 둘렀다.

그런데 그 모습이 어색하거나 이상해 보이지 않았다.

그냥 그 거리에 썩 어울리는 거다.

천천히 발을 맞춰 걷는 모습이 평화로워 보는 이들을 흐뭇하게 만들었다.








앙증맞은 빨간 클래식카 한대가 골목에 서있다.

사진을 찍었다.

나는 '클래식(Classic)'이 좋다.

다른 식으로 표현하자면 유행을 따르는 것을 싫어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자주 쓰는 말이지만 그 뜻을 모르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보통 '클래식' 하면 고전, 즉 흔히들 바흐, 베토벤, 슈베르트, 쇼팽 같은 '클래식 음악'을 연상한다.

클래식은 '유행을 타지 않는 최고의'라는 뜻을 갖고 있다.

엄밀하게 따지면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이 활동한 시대가 클래식이다.

고전파라고 불리던 그 시대는 음악의 형식을 중요시하게 여겨 그 틀에 맞춰 작곡하던 시대이다.


찰스 3세의 대관식 사진을 길거리에 붙은 벽보를 통해 보았다.

세자로 책정된 지 65년 만에 왕이 된 찰스 3세와 그의 부인 카밀라 부부를 보며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들보다 지금 이렇게 자유롭게 골목길을 걸어 다닐 수 있는 내가 더 행복하지 않을까?'




흑백 사진은 느낌이 사뭇 다르다.
찰스 3세의 대관식 사진



로마로 돌아을 때는 기차 시간이 맞지 않아 중간에 오르떼(Orte)에서 환승을 했다.

로마 테르미니역에 도착하여 역사 밖으로 나왔는데 아침과는 영 다른 풍경이다.


'테르미니 역이 무척 크구나, 우리가 아침에 도착한 곳과는 다른 방향인가 봐'


그런데 아무리 봐도 낯설다.

테르미니역이 아닌 게 분명했다.


'여기는 로마 티부르티나역(Tiburtina)이네. 저기 글씨가 쓰여있어.'


그러니까 로마 테르미니로 가기 바로 전 역, 주로 고속열차들만 정차하는 신역사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한 정거장 미리 내린 셈이다.

그곳에서 숙소까지는 거리가 멀어 우버를 검색하니 약 40유로 정도 예상되었다.

메트로는 테르미니 역에서 한 번만 갈아타면 옥타비아역에 도착한다.

1인당 1.5유로니 6유로면 갈 수 있으니 메트로를 타기로 했다.

몇 년 전에 리투아니아를 여행할 때에도 기차를 잘못 내렸다가 허겁지겁 다시 탄 적이 있었다.

그때 이야기를 하며 하하 호호 메트로로 향했다.



로마 티부르티나 역


메트로역에서 나오니 저 멀리 숙소 건물이 보였다.

때 마침 중국 레스토랑을 지나가게 되었다.


'숙소 환불금도 남았는데 오늘 저녁은 딤섬 어때?'

'좋~~~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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