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전나무 Jun 19. 2023

체팔루 파라디소

10. Cepalu




어느새 검은 산양들은 친구가 되었다.

그들을 바라보고 방울 소리를 듣는 게 전부지만 묘한 위로와 힐링이 되곤 했다.

잠에서 깨면 발코니로 나가 그들의 위치를 찾아보곤 했다.

비가 내리면 어디에서 비를 피하는지 염려도 했다.


마지막으로 머물 곳은 체팔루,

팔레르모에서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는 곳이라 많은 사람들은 당일치기로 다녀가는 곳이다.

영화 시네마 천국의 촬영지로 알려졌기도 하며 작은 해변 도시이다.

타오르미나에서의 체크 아웃과 체팔루의 체크인 시간 중간에 텀이 많아 메시나를 들렸다가기로 했다.


메시나로 향하는 도로 역시 해변 도로로 이어졌다.

터널이 많았다.

짧게는 300m에서 길게는 2km가 넘는 터널까지...

터널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산이 많다는 뜻이기도 한다.


이탈리아 본토인 살레르노에서 페리에 기차를 싣고 메시나 해협을 건너면 메시나에 도착한다.

꼭 가봐야 하는 명소는 아니지만 가는 길이니 들렸다.

주차장을 찾아가는 중에 길거리에 무료로 주차할 수 있는 공간이 비어있는 걸 발견했다.

흰색 선이 그려진 곳은 무료이다.

그날이 일요일이인 이유도 있으리라 짐작했다.

또한 도로변의 유료 주차장은 휴일에는 대부분 무료이다.

주차를 마친 후 시민들에게 물어보니 역시나 무료라는 대답을 해주었다.

하지만 ZTL구역인가에 대한 질문에도 무료라는 대답만 거듭했다.

몇 사람에 같은 질문을 했지만 대답은 똑같았고 그들 말을 따르기로 했다.


길을 건너니 메시나 대성당이 보였다.

성당 앞 광장에는 혹시 작은 카네이션 화분을 담아놓은 작은 바구니들이 가득했다.

혹시 '어머니 날?' 하며 포스터를 보았더니 그 짐작이 맞았다.

 


메시나 대성당
카네이션을 판매하는 광장
모녀의 사진이 붙어있는 어머니 날 포스터



어머니 날의 포스터에는 모녀로 보이는 사진 아래 문구가 있었다.

"여성에게 영향을 미치는 종양 연구에 힘을 보태주세요."



메시나 대성당의 내부 컬러는 차분하고 단아했다.

우리나라 사찰의 단청을 연상시키는 나무 서까래가 아름다웠다.

친구들은 자연스레 여기저기 흩어져 의자에 앉았다.

기도는 간절함에서 시작된다.

종교가 없거나 종교가 달라도 뭔가를 기도할 수 있다.

그곳이 어느 곳이든 상관없지 않은가?

잠시 앉아있을 뿐인데 마음이 차분해지고 편하다.

친구들도 비슷한 기분이었을 거라 여겼다.

파이프 오르간 앞에 연주자가 앉았다.

그리고 작은 소리로 연주를 시작했다.


오르간이 보이는 맨 앞자리로 재빠르게 이동했다.

곁에 앉은 LJ가 내 팔을 잡으며 '너무 좋아~'한다.

갑자기 오르간의 음량이 커지면서 성가가 시작되었다.

직감적으로 알았다.

미사가 시작된 것이다.

신부님이 향을 흔들며 입장하신다.

성당의 차분한 분위기에 취해서 미사를 위해 사람들이 모여들던 것을 알아채지 못했던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나긴 했지만 맨 앞에 서 있던 터라 난감했다.

누가 되지 않게 그 자리를 빠져나가려면 입당송이 끝나는 시간이 좋을 듯했다.

성가가 끝나고 사람들이 자리에 앉는 순간 빠르고 조용히 그곳을 빠져나왔다.



  

   




성당을 나오니 그 많던 카네이션이 거의 다 팔려나가고 조금 남았다.

성당 옆에 종탑이 있어 계단의 숫자를 물어보니 108개란다.

별 어려움 없이 올라가니 메시나의 전경이 훤히 내려다 보였다.


그곳에도 천문시계가 있어 층마다 사자, 원숭이 같은 조형물이 보였다.

12시에는 그것들이 나와서 돌아가는 퍼포먼스가 이루어진단다.

광장 근처의 레스토랑에서 음식을 주문하고 시간을 기다렸다.

LJ와 내가 영상을 찍으러 천문시계 앞으로 갔다.

어느덧 광장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모여 고개를 쳐들고 천문시계에서 사물들이 나오기만 기다렸다.

마침내 12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맨 꼭대기의 사자가 어흥하는 소리와 함께 모습을 드러내더니 꼬리를 상하로 몇 번 끄덕인다.

3분쯤 지나니 닭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약 5분 동안 동영상을 찍다가 도중에 포기했다.

그럴만한 가치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레스토랑으로 돌아갔더니 마침 식사가 서빙되고 있었다.

유럽의 많은 도시에서 천문시계를 봤지만 가장 답답하고 볼거리도 없는 곳이 아니었나 싶다.




 

 


카를로스 3세
메시나 기차역 앞

  


체팔루는 호스트 대신 가브리엘이 관리를 한다고 하여 그와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5시쯤 도착할 거라 전했다.

그랬더니 도착하기 30분 전에 정확한 시간을 다시 알려달라고 했다.

메시나에서 체팔루까지는 유로도로를 통해서 이동하였다.

터널이 많은 지형 탓인지 좀처럼 간이매점을 갖추고 있는 휴게소가 없었다.

중간에 잠시 주정차할 넓은 공간이 있어 차를 멈추고 가브리엘이 말한 대로 30분 전에 메시지를 보냈다.


'가브리엘, 우리는 4시 40분쯤 도착할 거야.'


건물에 주차장을 있지만 차가 커서 불가능하니 집에서 5분 거리에 있는 유로 주차장을 소개해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러기지와 생수 등을 일단 내려야 하니 집 앞에 잠시 정차할 공간이 있으면 좋겠다 싶었다.


'일요일이라 분명히 집 앞 도로에 빈자리가 있을 거야.'


신기하게도 이번 여행은 언제부턴가 신기할 정도로 '말하는 대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체팔루 숙소의 정문 앞에 도착했을 때 넓은 주차 공간이 비어있었다.


4시 46분, 짐을 내린 후 집 앞에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그러나 가브리엘은 답이 없다.

5시 5분, '언제 올 거야?'

5시 11분, '운전 중이라 답을 못했다.'

5시 26분, '15분 안에 도착할 거다. 팔레르모에 교통 정체가 심해서 그렇다.'

그렇게 가브리엘은 약속한 시간보다 1시간 10분 늦게 집 앞에 나타났다.


2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앳된 얼굴의 가브리엘은 그렇게 늦게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흔한 'sorry'한 마디도 없었다.

작은 엘리베이터가 있었지만 러기지 하나 들어주지도 않았다.

도련님 스타일이다.


'우리는 도로변에 주차했다. 오늘이 일요일인데 이곳도 무료이냐? 24시간은 6유로라고 쓰여있는데 맞냐?'

라는 질문에

'주차 요금을 왜 나한테 물어봅니까? 나는 이곳 주차에 대해서 몰라요.'


라며 체크 아웃할 때 본인이 와서 집 체크를 하고 열쇠를 받아갈 거라는 말을 남기고는 떠나버렸다.

그게 끝이 아니다.

체팔루를 체크 아웃하는 날(즉 팔레르모 공항에서 자동차를 반납하고 로마행 비행기를 타야 하는 날)까지 가브리엘은 우리의 애간장을 태웠다.

그 얘기의 설명은 하지 않고 싶다.

시칠리아의 마지막 여정인 체팔루를 아름답게 마무리하고 싶기 때문이다.

 

아무튼 조금, 아니 많이 황당하고 기가 막혔지만 MZ세대라 그런가 보다 라며 이해하기로 했다.

두 개의 욕실 외에 별도로 큰 자쿠지가 있는 이 집은 최근에 리모델링을 했는지 최신 시스템을 뽐내는 고급 아파트였다.



체팔루 성당



시칠리아 여행을 하는 동안 촉촉하게 비가 내리는 날이 많았다.

대부분 우산 없이 웨더코트만 입어도 될 정도였다.

이동하는 날에는 비가 내리지 않아 그것도 감사하다.


체팔루는 조용하고 운치 있는 마을이다.

화려함과 세련됨보다는 빈티지에 가까운 공간들이 많았다.

골목들은 비 내리는 날 산책하기 참 좋았다.



시네마 천국에서 야외 영화를 상영했던 바닷가
시네마 천국에서 야외 영화를 상영했던 바닷가



지나고 보면 뭐 그리 깔깔거릴 일도 아닌 걸 갖고 많이도 웃었다.

지나고 보면 뭐 그리 기막히게 아름다울 것도 아닌 것에 숱하게 감동했다.

그건 아마도 온전하게 주어진 시간의 자유, 그 안에서 되찾은 순수가 아닌가 싶다.  


영화가 상영되었던 장면의 바닷가 벤치에 앉아 시네마 천국의 OST를 틀어놓고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온도와 적절한 바람, 잔잔한 바다, 엔니오 모리코네와 음악, 내 마음이 곧 네 마음인 친구들이 모두 그곳에 있었다.


바다를 마주 보는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커피를 마실 요량이었지만 피자와 와인을 주문했다.

파라솔의 골을 따라 빗물이 점점이 떨어진다.

사람들이 바다를 배경으로 걸어간다.

그 바라봄이 좋다.

와인이 좋아졌다.

시칠리아의 선물이다.

분에 넘치게 행복했다.

잊을 수 없는 추억의 문신들을 가슴에 새겼다.


추억과 그리움 중 어떤 게 더 무거울까?

추억과 그리움 중 어떤 게 더 높은 소리로 울릴까?

이런 의문을 가졌을 때가 있다.

이제 상관없다.

그때 즐거웠고

그날을 추억하는 지금이 뿌듯하고

1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나도 그리워할 테니 말이다.


우리는 그렇게 시칠리아 파라디소, 아니 체팔루 파라디소 안에 오래오래 머물러 있을 거다.



좌로부터 J, LJ, D
필자




 



매거진의 이전글 며칠 후, 화산이 폭발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