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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나무 Jun 29. 2023

버스요금은 1.5유로, 벌금은 55유로

18. Fiesole






남자들은 예쁜 여자를 좋아한다.

그러나 여자들이 좋아하는 예쁜 것은 수없이 많다.

이름이 예쁜 카페, 색깔이 예쁜 구두, 모양이 예쁜 케이크...


이름이 예뻐서 찾아간 마을 '피에솔레(Fisole)'는 예로부터 피렌체 상류층 사람들의 피난처였다.

수 세기 전에 지어진 빌라는 현재까지도 매우 비싼 주거지로 유명하며 토스카나 전체에서 가장 높은 소득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숙소와 가까운 포르타 로마나 성벽 앞의 버스 정류장 앞에서 11번 버스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날 역시 버스는 시간을 지키지 않았다.

조금 걸어야 하는 36번 버스를 탔다.

36번 종점에서 내려서 조금만 걸으면 피에솔레 까지 가는 7번 버스를 탈 수 있는 산타 마리아 노벨라역에 갈 수 있다.



포르타 로마나 성벽



어떤 정류장에서 남녀 두 사람이 마지막으로 버스에 올라탔다.

한눈에 직감할 수 있었다.


'그분이 오셨구나.'


내 예상대로 그들은 불시에 무임승차를 단속하는 검표원들이다.

이탈리아는 버스에 타는 즉시 티켓을 각인해야 한다.

노란 기계에 티켓을 집어넣으면 승차일과 시간이 찍히기 때문이다.



버스 내부에 있는 티켓 각인기



티켓이 없는 한 남자가 남자 검표원에게 적발되었다.

그는 순순히 신분증을 제시하고 벌금을 내기 위해 필요한 서식을 작성하는 모습이 보였다.

여성 검표원이 한 사람 한 사람 티켓 검사를 하고 있는데 뒤쪽에서 인도 사리를 입은 여인이 다급하게 검표원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그녀에게 자신의 티켓을 보이며 하소연을 시작했다.

그녀의 말인즉슨 자기가 티켓은 있으나 각인하는 것을 깜빡 잊었다는 것이다.

티켓이 있어도 각인을 하지 않으면 무임승차로 간주한다.

인도 여인은 열서너 살쯤 돼 보이는 딸을 불러 딸의 티켓을 보여주었다.

딸의 티켓에는 모녀가 승차한 시간이 찍혀 있었다.

하지만 검표원의 표정과 말은 단호했다.

인도 여인에게 여권을 달라고 하며 55유로 벌금은 현금이나 카드 중 무엇으로 할 거냐 물었다.

하지만 인도 여인 역시 끈질기게 해명을 늘어놓으며 두 사람의 신경전이 팽팽하게 이어졌다.

마침내 버스는 종점에 다다랐다.

검표원은 벌금을 내지 않으면 경찰에 인계할 수밖에 없다며 버스에서 내렸다.

인도 여인도 안타깝지만 그런 실랑이를 하게 될 검표원이란 직업 역시 만만치 않겠구나 싶었다.

누구의 편을 들 수도 없던 그 상황이 오래도록 잊히지 않았다.



이제 피에솔레로 가는 7번 버스를 타면 된다.

그러나 그 버스 역시 전광판에 안내된 시간표와는 무관하게 오지 않았다.

약 30분은 기다린 듯하다.

드디어 7번 버스가 도착했고 나처럼 피에솔레로 가는 승객들이 우르르 버스 앞으로 몰려갔다.

버스는 이미 만차였고 가까스로 손잡이를 잡고 섰다.


아침에 4장의 버스 티켓을 샀었다.

그곳에서 피에솔레까지는 약 25분이 소요된다.

그러나 7번 버스가 너무 늦게 오는 바람에 시간이 많이 지체된 상황이다.

피렌체 시내버스는 하차 시간 기준 90분 내에 환승이 가능하다.


'피에솔레에 도착하기 전에 90분이 지나면 어떡하지? 새 티켓으로 다시 각인할까?'


1.5유로 밖에 안 되는 티켓 한 장이 왜 그렇게 아까운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90분까지는 안 걸릴 거야 하며 운에 맡기기로 했다.

버스는 구불구불한 길을 한참 동안 올라갔다.

차창 밖으로 거대한 풍경화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있었다.

하지만 서있는 터라 몸이 이리저리 쏠려 멀미가 날 지경에 이르렀을 때 버스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횅하게 느껴질 정도로 넓은 광장 건너편으로 성당이 보였다.

한쪽에는 말을 탄 기마상도 보인다.

어느 쪽으로 갈까 두리번거리는 동안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져 어디론가 가버렸다.







집들이 보이는 한쪽 오르막길로 오르기 시작했다.

오가는 사람도, 그 흔한 기념품 샵도 없는 한적한 길이었다.

고지대라 아랫마을 경치를 바라보는 맛이 있었다.

하얀 뭉게구름이 몽실몽실 떠 있었다.

모네가 즐겨 그림을 그리던 프랑스의 르 아브르 해안가에서 보았던 구름이 생각났다.







군데군데 작은 그림들이 눈에 띄었다.

주변의 집이나 풍경들을 그려 놓았다.

그것들은 공통점이 있었다.

그림 위에 GAS라는 글씨가 펀칭되어 있다.

자세히 보니 그림을 그린 사람의 사인과 년도 표시가 있는데 2013년, 2014년이 대부분이다.

폴란드의 브로츠와프에는 난쟁이들을 모티브로 한 작은 조각들이 도시 곳곳에 숨어 있다.

그것들을 찾아다녔을 때처럼 그림을 발견하는 맛이 쏠쏠했다.

심플하지만 동네 분위기를 예쁘게 잘 표현한 그림들이었다.










카페에서 그 그림에 대하여 물어봤다.

그림들이 그려진 것은 가스 미터기를 덮고 있는 철재 커버였다.  

웨이터는 신이 난 듯 가스 미터기 커버에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는 예술가에 대해 말해주었다.

그 그림을 그린 사람은 피렌체 라 나지오네 출신의 '프란체스코 로렌지니'

재즈 음악가이며 화가라고 한다.


그는 원래 한 조그만 섬에 살고 있었다고 한다.

어느 날, 집 밖에 있는 작은 금속 커버가 녹슨 것이 보기 싫어 그곳에 그 지역의 풍경을 그려 넣었다고 한다.

동네 사람들은 그 아이디어가 좋다 하며 저마다 그림을 그려달라는 요청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던 중 그가 피에솔레로 이사를 왔는데 그곳에서 자신의 집과 똑같은 가스 미터기 커버를 발견한 것이다.

그렇게 피에솔레에 있는 이 집 저 집의 가스 미터 커버 위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그 숫자가 70개가 넘는다고 한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금속으로 된 가스 미터 문을 찾기 시작했다. 

그림을 자세히 보니 열쇠 구멍이 있었다.

문의 테두리에는 초록색으로 칠을 해서 마치 액자 프레임처럼 보였던 것이다.

피에솔레에는 시선을 빼앗길 정도로 예쁜 초콜릿이나 장식품은 없다. 

그러나 어디서든 불쑥 나타날 수 있는 예상치 못한 아름다움과 가능성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림을 발견할 때마다 마치 보물을 발견한 듯 소소한 재미가 있었다.









가던 길을 되짚어 돌아와 반대편의 수도원이 있는 오르막으로 향했다.

수도원이 있는 언덕까지의 거리는 약 200m쯤 될까?

하지만 처음부터 경사가 무척 심하다.

두세 걸음 떼고 쉬어야 할 정도였다.

간간이 보이는 사람은 거의 대부분 등산 스틱을 양쪽으로 짚고 오르고 있다.

중간쯤 올라가다가 헉헉대며 쉬고 있는 내게 내려오던 한 여행자가 말했다.


'힘들게 올라가지 마세요. 수도원이 공사 중이라 닫혀있어서 들어갈 수가 없어요.'


그래도 이만큼이나 왔는데 그냥 뒤돌아서기가 마뜩잖았다.

한걸음 한걸음 올라갔다.

아주 오래된 듯한 수도원의 문은 굳게 닫혀 있고 풀만 무성하였다.

숨을 고르고 아랫마을을 내려다보았다.

사이프러스 나무들이 곧게 서 있는 집들이 미니어처처럼 보였다.

전경이 무척 아름다웠다.

그곳은 피렌체가 모두 내려다 보이는 전망대 같은 곳이었다.




  

수도원으로 올라가는 언덕
산 프란체스코 수도원






수도원에서 내려와 성당 뒤편에 있는 골목길로 걸어 들어갔다.

주변 경관이 수려한 곳에 레스토랑이 보였다.

식사를 할 생각으로 들어가는데 오른쪽에 티켓 오피스가 있다.

물어보니 티켓을 구매해야 한다는 것이다.

7유로를 내고 들어간 곳은 고대 에트루리아, 로마 시대와 관련한 유적지들과 유물들이 있는 고고학 박물관이 있었다.

고대 유물들을 전시한 박물관의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레스토랑의 전망은 훌륭했다.

수백 년 전에 세워진 세 개의 돌기둥 앞에 테이블이 비어있어 그곳에 앉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웨이트리스가 다가와 친절하게 말했다.


'손님이 오신 걸 모르고 있었어요. 혼자서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메뉴 보시고 알려주세요.'


그 말 한마디가 얼마나 따뜻했는지 그녀가 알까 싶은 마음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베이컨이 들어간 까르보나라는 염도가 강한 데다가 양이 너무 많았다.

식전빵을 파스타 소스에 찍어 먹고 스파게티는 반 이상 남았다.

웨이트리스가 염려스러운 듯 입에 맞지 않느냐고 물었다.

나는 맛있게 먹었고 배가 부르다는 핑계로 그녀를 안심시켰다.




Caffè Teatro Romano
고고학 박물관



로마 극장



 


피렌체로 돌아가기 위해 버스 정류장으로 갔다.

이번에도 와야 할 시간에 버스는 오지 않았다.

사람들의 숫자는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서서 가지 않으려면 버스의 정차 시점을 잘 맞춰야 한다는 일념으로 온 신경을 버스가 오는 방향으로 곤두세웠다.

다행히 좌석을 차지할 수 있었다.


이름이 예뻐 찾아간 '피에솔레,

가스 미터 커버에 그려진 예쁜 그림들을 발견하는 재미와 따뜻한 웨이트리스의 말 한마디가 정겨웠던 것만으로도 기억될만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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