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고향, 빈치
19. Vinci
망설이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뭔가 끌리는 게 있으면 해봐야 하고 가보고 싶은 곳이 있으면 가봐야 한다.
여행지에서는 특히 그렇다.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주 피렌체 빈치 코뮌에 있는 작은 마을인 안치아노(Anchiano)
571년 전(1452년), 그가 태어난 집을 찾아 나섰다.
'Birth place of Leonardo da vinci'
자신의 이력을 포도송이처럼 주렁주렁 늘어놓은 프로필을 종종 보게 된다.
그러나 읽어보면 그럴싸한 타이틀도 없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모두가 인정하는 타이틀을 여러 개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중에 최고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일 것이다.
화가, 조각가, 발명가, 건축가, 과학자, 음악가, 공학자, 문학가, 해부학자, 지질학자, 천문학자, 식물학자, 역사가, 지리학자, 도시계획가, 집필가, 기술자, 요리사, 수학자, 의사
'모나리자'
문명과 단절된 생활을 살아가는 소수민을 제외하고 그 그림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그 한 가지만으로도 그의 존재는 이미 충분하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그가 태어난 집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이유를 모르겠다.
조상님 무덤도 찾아가지 않는 내가 그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갔다는 게 어찌 보면 우스운 일이다.
물 한병, 복숭아 두 개, 사탕 몇 개를 배낭에 챙겨 집을 나섰다.
빈치(Vinci)는 피렌체 중심에서 직선거리 약 25km 떨어진 산골 마을이다.
피렌체에서 엠폴리까지 기차를 타고 가서 엠폴리에서 빈치까지 로컬 버스,
그리고 빈치 마을에 내린 다음 그의 생가까지 2.3km를 걸어가야 한다.
마을은 전형적인 시골 마을로 소박했다.
곳곳에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관련된 그림이나 장식들이 눈길을 끌었다.
다빈치 박물관의 티켓 오피스 앞에 몇몇 사람들이 줄을 서있었다.
하지만 그의 생가에 다녀오는 일이 우선이었던 나는 그곳을 과감히 지나쳤다.
현재에도 포도밭과 올리브 과수원들이 많았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혼외자로 태어났다.
그의 풀 네임은 'Lionardo di ser Piero da Vinci',
'빈치에서 태어난 피에로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흔히 부르는 이름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빈치 마을의 레오나르도'라는 뜻이다.
빈치 마을에 가보고 그 이름의 뜻을 저절로 알게 되었다.
또한 레오나르도는 스페인어로 '용감한 사자'라는 뜻이며
이 이름은 수 세기 동안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최고 석학인 레오나르도 다 빈치 외의 라틴 문화권 밖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부친의 나이 23살로 모친과 결혼 전이었다.
그의 아버지 피에로 다빈치는 법률가들을 배출한 지주 가문 출신이다.
직업은 공증인이었고 어머니 카타리나는 가난한 집안의 딸이었다.
그의 생모는 사회적 신분이 낮았고 지참금을 낼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한 집안 출신이었기에 아들을 낳았음에도 불구하고 결혼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다빈치를 낳은 뒤 8개월 후 아버지는 16살짜리 처녀 알비에라와 결혼하였다.
생모 또한 수도원의 도기 가마공과 결혼하여 신혼살림을 차렸다.
다빈치는 태어나서 생모와 함께 살았지만 아버지와 계모 사이에서 자식을 얻지 못하자 본가에 들어가게 되었다.
하지만 실제로 레오나르도를 양육한 이는 조부모와 숙부였다.
아버지가 지역 공증인과 동업을 하게 되면서 집을 자주 비우고 피렌체로 나가는 일이 잦았다.
그러던 중 계모는 자식을 낳지 못한 채 사망했다.
그의 아버지는 피렌체의 부유한 상인의 딸과 재혼했으나 새로운 계모 역시 아이 없이 사망했다.
이후에 아버지는 두 차례 더 재혼하였고 12명이나 되는 이복형제가 생겼다.
레오나르도는 이복형제들과는 사이가 원만하지 못했다.
1504년 아버지가 77세 나이로 사망했을 때 이복형제들이 합심하여 음모를 꾸미고, 그에게 아버지의 유산을 한 푼도 나눠주지 않았다.
또한 훗날 숙부 프란체스코가 사망한 후에는 상속문제를 두고 이복형제들과 민사소송을 치루기도 하였다.
당시 피렌체에서는 혼외자에 대한 차별이 심한 편은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 수준의 차별과 무시는 존재하였다.
게다가 귀족 가문의 혼외자가 아닌 경우에는 제대로 된 교육을 받거나 대학교에 진학할 수 없었다.
의사, 약사, 법률가, 행정 공무원도 될 수 없는 등 직업 선택의 폭도 제한적이었다.
부친이 속한 길드(조합)에서도 혼외자가 행정관리나 공증인이 되는 것을 원칙적으로 허용하지 않았다.
다빈치는 정식 학교에서 읽고 쓰기를 배우지 못했다.
스스로 이탈리아어를 배웠을 뿐 당대 귀족 자녀들처럼 지식인들이 쓰는 라틴어와 그리스어 등을 비롯한 여러 학문에 대한 정상적인 교육을 받지는 못했다.
다만 피렌체의 인문주의 학자들로부터 무시가 이어지자 마흔이 넘은 나이에 라틴어를 배웠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레오나르도는 1466년 열네 살 때, 가족과 함께 피렌체로 이주해 베로키오의 공방에 들어갔다.
베로키오는 그 당시 피렌체에서 가장 유명한 공방을 이끌던 실력 있는 예술가였다.
레오나르도는 그곳에서 20대 초반까지 미술 및 기술 공작 수업을 받았다.
제자의 재능을 알아본 베로키오는 레오나르도에게 그림을 맡기고, 자신은 조각에만 몰두할 정도로, 레오나르도를 제자가 아닌 화가로서 존중했다.
1516년 이후 프랑스에서 거주하며 활동하던 다빈치는 서서히 기력이 약해졌다.
1519년 4월 23일, 죽음을 직감한 듯 유언장을 작성하였다.
그는 사후 프랑스에 묻히길 희망했고 그의 연애상대였던 살라이와 하인이었던 바티스타에게 밀라노 공작에게 받은 포도밭을 반씩 나누어 상속한다고 썼다.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그는 제자이자 동반자였던 프란세스코 멜지(Francesco Melzi)에게 '모나리자' 등의 그림, 그리고 메모가 적힌 노트들을 비롯한 그의 유산을 상속하였다.
1519년 5월 2일 그의 나이 67세, 프랑스 클로 뤼세에 있는 자신의 저택에서 사망했다.
유해는 다빈치의 유언에 따라 생 플로랑탱 교회에 묻혔다.
그런데 프랑스혁명으로 혼란스럽던 시기인 1802년 교회 건물이 해체되면서 그곳에 있던 모든 묘지들이 파묘된 후 모두 훼손되어 버렸기 때문에 그의 유골은 현재 남아 있지 않다.
그리고 1570년 프란세스코 멜지의 사망으로 그가 평생 간직하고 있었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엄청난 양의 크로키와 그림이 세상에 드러나게 된 것이다.
계속 오르막인 도로를 벗어나니 좁은 흙길로 이어졌다.
커다란 올리브 나무밭과 포도밭, 농가 몇 채를 지나니 조붓한 산길이다.
그런데 그 길을 걷고 있는 사람은 오직 나 혼자 뿐이다.
'이 길이 맞나? 레오나르도의 생가를 찾아가는 사람이 이렇게 없다고?'
하는 의구심이 들 무렵 방향을 알려주는 이정표가 나타나고 레오나르도의 두상이 세워져 있기도 했다.
때때로 산티아고 순례길을 알려주는 것과 같은 노란 화살표가 있어 안도하며 따라 걸었다.
2.3km는 나에게 부담스러운 거리가 아니다.
그러나 그 길이 산으로 이어지는 돌길일 거라는 것은 예상치 못했다.
체감 거리는 그보다 훨씬 길게 느껴졌다.
햇살은 뜨겁고 땀이 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길을 혼자서 한 걸음 한 걸음 묵묵히 걷고 있는 시간이 황홀했다.
길가에 지천으로 피어있는 꽃들은 지베르니 정원에 가꿔진 꽃들에 뒤지지 않았고 간간히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시간 그곳에 내가 있음에 만족하는 순간, 가슴이 벅차다.
여행은 결국 낯선 장소에 가있는 시간을 즐기는 것일 뿐이다.
그곳이 어디냐는 상관이 없다.
레오나르도가 태어난 집을 살펴보는 그 짧은 순간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곳을 찾아가는 이 시간이 더 중요하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생가로 가는 길에 마주친 풍경
레오나르도가 태어난 안치아노의 집이라는 뜻의 'Anchiano Casa Natale di Leonardo'라는 글씨가 보였다.
빈치 마을에 있는 레오나르도 박물관을 함께 볼 수 있는 콤보 티켓을 구입하였다.
그곳에는 검표원과 나, 둘 뿐이었다.
그가 태어난 건물 한 동과 영상을 보여주는 방 하나, 그리고 작은 방이 하나 있을 뿐,
집은 생각보다 작고 단순했다.
나무 서까래로 된 지붕 아래로 작은 테이블과 벽난로, 책 몇 권과 지도가 걸려 있었다.
그의 필체와 스케치 몇 점 등이 남아있고 가구나 집기 같은 게 없이 그저 휑했다.
그저 500년이 넘도록 그 자리를 지켜온 작은 집은 여전히 늠름해 보였다.
수백 년은 족히 되어 보이는 올리브 나무 아래에 한동안 앉아 있었다.
바람이 불었다.
그리고 몇몇의 여행자들이 입구로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빈치 마을로 돌아가가다 한 무리의 학생들을 만났다.
체험 학습을 하러 가는 모양이다.
마을에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박물관이 두 개 있다.
그곳에는 그가 발명한 각종 기구들이 전시되어 있다.
인체 해부에 사용된 방법과 사람의 근육 및 두개골에 대한 상세한 내용, 그림에 사용하는 안료를 만들기 위해 사용한 돌이나 재료들에 대한 자료들이 세세하게 진열되어 있다.
현재 사용해도 무관할 것 같은 도구들이 즐비했다.
그는 이미 15세기의 인간 AI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세상에 내놓은 기막힌 결과물들은 셀 수 없이 많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최후의 만찬'도 '모나리자'도 아닌 그가 남긴 말이다.
누구나 수긍하고 인정하지만 실천하기 어려운 게 명언이다.
나는 오늘 빈치 마을에 가서 레오나르도를 만났다.
그가 말했듯이...
1. 한 번 하늘을 날아본 사람은 언제나 하늘을 보면서 걷기 마련이다.
한 번 가봤던 곳이고, 다시 돌아가기를 갈망하기에...
2. 세상에는 세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보는 사람, 눈앞의 것을 보는 사람, 그리고 보지 않는 사람.
3. 가장 고귀한 즐거움은 이해의 기쁨이다.
4. 가능하다면 죽은 자도 웃도록 노력해야 한다.
5. 과학 없이 연습에 빠지는 사람들은 마치 배 안에 조타기나 나침반 없이 들어가는 선원과 같으며, 본인이 어디로 가는지 확실히 알 수 없는 사람들이다.
6. 성공한 사람들은 뒷짐 지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나는 오래전부터 생각해 왔다.
직접 바깥으로 나갈 때 무언가가 발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