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좍좍 퍼붓는 소나기는 아니다. 장대비도 아니다. 안개비나 는개도 아니고 굳이 실비도 아니다. 방 안에 앉아서 가만히 바라보면 저 혼자 마치 무엇을 생각하듯 추적추적 내리는 봄비, 그렇게 고요한 비가 적우(寂雨)다. 생각을 거침없이 경쾌하게 쓰는 한시(漢詩)의 시체(詩體)는 또 행(行)이다. 행은 '떠나다'이고 '길'과 '여행'의 의미를 나타내는 나그네의 글자다.
적우행(寂雨行)은 '글보' 김수남 선생님께서 지어주신 나의 '아호'입니다.
조용한 곳 좋아하고
비 좋아하고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뜻에서 지어주셨습니다.
쓸쓸함이 느껴지는 그 이름이 맘에 들었지요.
이번 여행 중에 글보 선생님께 이런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고삐 풀린 망아지 나그네처럼 쉼 없는 적우행의 눈방이 약여합니다.
모쪼록 오래오래 인생에 취하는 디오니소스 바쿠스가 되시라.'
여행은 나와 내가 만나는 시간입니다.
여행은 간절함의 힘에서 시작됩니다.
38년간 다니던 직장을 퇴직하면서 나와 약속을 했지요.
'1년에 두 번 여행하기(한 달씩)'
2022년 5월 6일 ~ 6월 5일 프랑스 소도시
2022년 10월 31일 ~ 12월 1일 스페인 소도시
2023년 5월 2일 ~ 6월 2일 시칠리아 및 이탈리아
2023년 10월 11일 ~ 11월 12일 파리(예정)
사진을 찍는 '순간'을 사랑합니다.
사진은 선택의 흔적입니다.
사진에는 나의 시선과 호흡이 함께 들어있습니다.
묵직한 바디를 잡는 그립감을 좋아하지요.
셔터를 누르는 순간 그것들은 내 것이 됩니다.
베니스의 핑크색 가로등 유리도, 검은색 곤돌라의 빨간 의자도
내가 의도한 사이즈의 틀에 갇히게 되지요.
만 장의 사진 중에 한 두장만 흡족해도 그만입니다.
시간에 대해 초연하고 담담합니다.
아쉬워한다고 더디 흐르지 않습니다.
하고 싶은 걸 합니다.
그러면 시간이 아깝지 않습니다.
인생은 논리나 이유가 없습니다.
맑은 날이 있으면 흐린 날이 있을 뿐입니다.
시칠리아 팔레르모에서 시작한 이번 여행은 베니스에서 끝났습니다.
당연히 아쉬움이 남지요.
하지만 때로는 모자라고 아쉬운 것이 외려 따스한 여백이 되기도 한답니다.
만족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하고 싶은 뭔가를 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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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남극에 가신다고 해도 걱정이 안 돼요, 항상 엄마를 응원합니다.' 하는 아들과 며느리,
혼자 식사 챙겨 먹기가 귀찮고 힘들 텐데도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재밌게 잘 다녀와' 하며 늘 따뜻한 말을 전하는 남편,
언제나 내편이 되어 응원과 칭찬을 아끼지 않는 친구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며 스물 여섯 편의 시칠리아 다이어리를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