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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나무 Nov 26. 2023

나도 혼자 산다, 파리

2. 빠히가 163






- 이곳에 가려고 하는데요. 요금이 얼마인가요?

파리 샤를 드골 공항에서 출발하는 택시 요금은 센 강을 기준으로 정찰제입니다.

강을 건너지 않으면 55유로, 강을 건너면 62유로지요.

확실히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물어보았습니다.


- 미터기 요금대로 받아요.


'어이쿠 물어보길 잘했군, 까딱하면 바가지 쓸 뻔!'


- 그래요? 정찰제로 55유로 아닌가요?

- 이 주소는 파리가 아니라 정찰제 요금을 받을 수 없어요.

파리 경계와 아주 가깝지만 파리는 아니에요. 미터기로 약 50유로쯤 나올 거예요.


원칙대로 말했을 뿐인데 순간적으로 그를 의심한 게 미안했습니다.


- 그렇군요. 요즘도 여행자들이 많은가요?

- 럭비 월드컵 경기 때문에 사람들이 많아요. 다행히 지난주에 파리 패션위크는 끝나서 이번 주는 좀 한가하네요.


주소지에 도착한 나는 호스트에게 도착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1분도 되지 않아 프레드를 만났지요.

동네 아저씨처럼 수더분한 인상에 친절한 사람이었어요.


일단 터치 키로 두 개의 문을 열고 건물로 들어가 복도를 가로지르니 밖으로 나가는 문이 보입니다.

그 문을 열고 나가면 삼각형 모양의 안뜰이 있고 또 다른 건물이 나타나더군요.

그 건물의 또 다른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면 왼쪽에 문이 하나 있는데 그곳이 내가 한 달 동안 묵게 될 집입니다.

무려 다섯 개의 문을 통과하고 나서야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현대식으로 꾸며진 주방은 넓고 심플했습니다.

방 역시 사진으로 본 것과 다름이 없었고 막연히 옷장이려니 생각했던 곳은 욕실이었습니다.

에어비앤비를 이용하기 시작한 지 9년,

그동안 74개 도시의 집을 이용했습니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아름다운 곳들이 많습니다.

위치도 좋아 여행하는 동안 탁월한 선택이라는 말을 많이도 들었지요.

그러나 이번 숙소는 탁월한 위치도 아름답지도 않습니다.

그걸 알면서도 선택한 이유는 오직 한 가지, 여행 경비를 줄이기 위함이었지요.

파리 한 달 여행을 선택하게 된 것 또한 숙박비 때문입니다.

에어비앤비는 장기숙박일 경우 할인이 많이 되는 장점이 있으니까요.

욕실이나 주방을 셰어 하는 숙소는 배제하고 집 전체를 단독으로 쓰는 곳을 이용합니다.

혼자 하는 여행이니 만큼 숙박비의 비중은 무시할 수 없었거든요.

중심가에서 그나마 저렴한 곳은 하녀들이 사용했던 엘리베이터 없는 6층 다락방, 또는 소파 베드가 놓여있는 스튜디오 형식의 원룸, 주방이 아예 없거나 초소형의 집도 월 300~400만 원이고요.

맘에 드는 숙소는 적어도 3배쯤의 숙박비가 들어가니까요.

그럴 바엔 좀 떨어져 있어도 교통이 좋고 0층인 데다가 주방도 넉넉하여 선택했지요.

참고로 이 숙소는 31박에 약 210만 원입니다.







주방과 침실 창엔 전동 볼레(volet)가 설치되어 있더군요.

볼레는 햇빛을 차단하거나 추위를 막아주는 덧창을 말합니다.

예전에는 나무로 만들어진 여닫이 볼레가 많았지만 요즘은 알루미늄 소재로 만든 전동 볼레를 많이 사용하는 추세예요.

얇은 커튼이 드리워져 있지만 0층이라 오가는 사람들이 들여다 보일 수 있어 거의 내려놓고 지내게 되더군요.

다리미와 교체할 침대 시트 위치까지 알려준 프레드가 돌아가고 부식재료를 사러 나갔지요.




volet(볼레)



프랑프리, 까르푸, 카지노 등 이름 있는 마트를 비롯하여 작은 슈퍼 마켓까지 아주 많은 상점들이 있었습니다.

빵집이 예닐곱 개, 고깃집 서너 개, 우체국, 병원, 안경점, 맥도널드, 유기농 채소 가게, 약국, 이발소 등이 가까이 있어 생활하는데 불편함이 전혀 없어 보입니다.

서민들이 사는 동네라 파리 중심가처럼 오래된 건물이나 화려한 카페는 찾아볼 수 없는 게 아쉽지만 짐작했던 바입니다.


유럽의 마트와 식재료는 이제 어느 정도 아는 수준이니 별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치즈, 버터, 달걀, 올리브, 피클, 마말레이드 잼, 감자, 양파, 마늘, 올리브유, 발사믹, 샐러드용 채소, 키친타월, 화장지 등 미리 준비해 간 장바구니 두 개를 가득 채웠지요.

생수는 무거우니 집과 붙어있는 작은 구멍가게에서 샀습니다.




집에서 준비해 간 기본양념과 올리브 유, 발사믹

   



이 숙소의 장점은 메트로역까지 약 200m로 가깝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출발역이라 언제나 앉아서 다닐 수 있는 장점이 있어서 좋았지요.

메트로의 출발역인 메리 데 릴라(Mairie des Lilas)는 '릴라 시청'이라는 뜻, 택시 기사의 말대로 그곳은 파리가 아니었던 겁니다.

파리의 경계에서 약 500m 떨어진 곳이더군요.  

종착역은 샤틀레, 파리의 중심지고 5개의 메트로가 환승되는 곳이라 편리합니다.

11번 노선은 종착역까지 13개의 정류장 밖에 없는 짧은 노선이라 종착역까지 15분이면 충분합니다.

게다가 2분마다 출발하니 여간 편리한 게 아니었지요.



메트로 11번 노선도



아래 사진의 가운데 둥근 부분이 파리입니다.

깃발 표시는 제가 가고 싶은 곳을 저장해 놓은 곳이고 오른쪽 상단에 빨간 표시가 있는 곳이 제 숙소입니다.

파리 면적은 서울의 약 1/6이기 때문에 생각보다 크지 않습니다.

지도에서 보듯 센강 유역에 명소들이 빼곡하여 도보로 여행하기 좋은 장점을 갖고 있지요.




파리 지도, 숙소
메리 데 릴라(Mairie des Lilas) 릴라 시청



이번이 다섯 번째 파리여행입니다.

매번 그렇듯이 나의 여행은 예술 문화가 중심이고 올해도 다르지 않습니다.

음악회와 미술관, 그리고 작가들의 집을 찾아다닐 거니까요.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뮤지엄 패스 6일권(85유로)을 구입했습니다.

(2일권, 4일권, 6일권이 있으며 개시하는 날부터 카운트됨)

뮤지엄 패스로 무료입장할 수 있는 곳은 50곳이 넘기에 정보를 미리미리 알아보는 건 필수입니다.

미술관들은 각각 쉬는 날과 오픈 시간이 다르고 동선도 고려해야 하니까요.

꼼꼼하게 계획표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여행을 떠나기 한 두 달 전부터 하나 둘 예약을 했지요.

계획하고 예약하는 거 하나는 잘하니까요.




Paris Museum pass 6 days
뮤지엄 패스를 펼치면 갈 수 있는 곳의 정보가 보임



나의 뇌가 단순한 건지 생체 리듬이 적응을 잘하는 건지 어딜 가나 시차를 느끼지 않습니다.

14시간 비행으로 여독이 남아 있을 법도 하지만 일찌감치 일어나 아침을 든든히 챙겨 먹고 집을 나섰지요.

첫날이니만큼 무리하지 말자는 생각으로 비교적 규모가 작은 오랑주리 미술관을 첫 미술관으로 예약했더랬습니다.

나비고를 구입하기 위해 사진도 챙겼답니다.


매일 드나들게 될 메트로 계단을 처음으로 내려갑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조심스러워요.

나이는 못 속인다는 말이 맞나 봅니다.

파리지앵들은 신발 바닥에 바퀴라도 붙어있는 양 미끄러지듯 내려가는데 나는 한 발짝 한 발짝 조심이 됩니다.

내가 바로 할머니라는 게 여실하게 드러나는 대목이에요.

평지를 걷거나 계단을 올라가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은데 내려가는 건 좀 겁이 나더군요.

혼자 하는 여행이라 각별히 더 조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미끄러져 엉덩방아라도 찧게 되면 큰 일이니까요.



메트로 개찰구 앞에 있는 오피스에서 나비고 데쿠베르트 패스 1개월권을 구입했어요.

나비고 데쿠베르트는 메트로, 트램, 버스, RER, 트랑 쥘리앙(기차), 녹실리앙(심야 버스)등을 기간 동안 무제한 이용할 수 있는 패스입니다.

단 1개월권은 사용일 기준이 매월 1일에서 말일까지이고 1주일권은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사용해야 하는 시스템입니다.

그러므로 1주일권은 목요일에 구입하면 4일만 사용할 수 있고

1개월권은 월초에 구매하는 게 이익이죠.

나비고 패스를 구매한 날은 12일이었지만 일단 한 달 권(89.1유로, 보증금 5유로 포함)을 구매했습니다.

나비고 데쿠베르트는 본인의 이름을 적고 사진을 붙이므로 타인에게 양도하지 못하지만 필요할 때마다 충전이 가능합니다.(10년 유효)


- 10월은 이미 11일이 지났는데 괜찮아요?


오피스 맨이 물었습니다.


- 네, 괜찮습니다.


참고할 것은 나비고 패스는 현금이 아닌 카드로만 구매 가능합니다.

준비해 간 사진을 부착했지요.

든든한 교통권이 생겼으니 이제 어디든 문제없습니다.




 



오랑주리 미술관의 예약 시간인 첫 타임은 9시지만 콩코르드역에 내린 시각은 8시였어요.

파리의 가을은 어떤 모습일까?

지하철을 타고 왔으니 파리의 실체와 처음 마주하는 순간이라 약간의 흥분이 없지 않았습니다.

지상으로 올라와 마주친 콩코르드 광장은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요.

온갖 펜스와 현수막, 전광판들이 광장을 가득 메우고 있어 '오벨리스크'도 '강의 분수'도 '바다의 분수'도 잘 보이지 않더군요.

택시 기사가 말했던 럭비 월드컵을 알리는 글씨가 가득했습니다.

에펠탑이 건축되던 당시에 흉물스럽다고 반대했다던 시민들의 심정이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싶었어요.




4년마다 열리는 2023 프랑스 럭비 월드컵
콩코르드 광장의 빌리지 럭비



1987년을 시작으로 4년마다 개최하는 세계 최대의 국제 럭비대회이다.

줄여서 RWC라고 하며, 우승팀에게는 웹 엘리스 컵(Webb Ellis Cup)이라는 트로피가 수여된다.

럭비 월드컵은 한국에서는 인지도가 낮지만 단일 종목으로는 축구의 피파 월드컵 다음으로 많은 관중수를 유치하는 국제 스포츠 대회이며, 구기 종목에서 축구의 피파 월드컵, 하계 올림픽 다음으로 인기가 많은 '세계 3대 스포츠 이벤트'로 손꼽힐 정도이다.


2023년은 럭비 탄생 200주년이 되는 해에 열리는 열 번째 럭비 월드컵이다.

2017년 11월부터 남아공, 아일랜드와 경쟁하다가 프랑스가 개최지로 선정되었다.

이탈리아, 아르헨티나, 미국은 유치를 고려했으나 중도 철회했다.

2023년 9월 8일(개막전: 프랑스 vs 뉴질랜드)부터 10월 28일까지 무려 51일 간 총 48경기의 본선이 진행된다.

이는 기존 대회의 44~45일을 넘는 역대 최장 기간이다.

과거에는 기간을 1주 단축하기 위해 조별리그 꽤 많은 경기가 주중에 열렸다.

이번엔 선수들의 부담을 덜기 위해 최소 5일의 휴식을 보장하고 최대한 많은 경기를 주말에 배정하였다.

(출처 : 나무 위키)



잠시 튈르리 정원을 산책하다가 8시 30분쯤 오랑주리 미술관 앞으로 갔습니다.

시간 예약을 한 사람들의 줄과 예약 티켓이 없는 사람들의 줄이 나뉘어 있는데 몇몇 사람들이 서성거리고 있더군요.

그런데 빗방울이 하나 둘 떨어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일기예보를 체크하는 일은 여행자들의 기본 일과이기도 하지요.

그날 아침 시간별 예보를 보았을 때 10시쯤 약간의 비가 예보되어 있었습니다.

그 시간에는 미술관에 있을 테니 우산은 챙기지 않았지요.

혹시 몰라 지퍼백에 접어온 비옷을 꺼내 입었습니다.

나무 밑에 서 있으면 잘 느끼지 못할 정도였던 비는 어느새 좍좍 퍼붓고 있었지요.

오픈을 기다리며 줄을 선 20여 명의 사람들은 대부분 우산이 없었고 그대로 젖을 수밖에 없었지요.

아득하게만 느껴지던 10분이 지나서야 오랑주리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파리는 음식점과 백화점을 제외한 모든 명소에 들어가려면 소지품 검사를 거치게 됩니다.

검색대가 설치된 곳도 많고요.

백팩은 혹시 모를 작품 손상을 막기 위해 라커룸에 맡기거나 앞으로 착용하도록 권유합니다.

지퍼백에 넣어온 카메라를 꺼내고 비에 흠뻑 젖은 비옷은 착착 접어 지퍼백에 넣어 배낭에 넣어 라커룸에 맡겼습니다.


모네의 수련 방을 쓱 지나치고 지하층으로 먼저 내려갔지요.

누구보다 먼저 만나고 싶은 화가들이 그곳에 있으니까요.

발걸음이 빨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심장 박동이 박자를 잃고 뒤뚱거렸지요.

잦은 간격으로 조바꿈하는 음악을 듣고 있는 듯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를 만났습니다.



 


오랑주리 미술관 (2023.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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