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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나무 Nov 27. 2023

오랑주리 톺아보기

3. musee de l'orangerie






19세기 파리를 좋아합니다.

아니 19세기의 파리 예술 문화를 좋아한다는 표현이 적절하겠네요.

아마도 내게는 라보엠(La Bohème : 보헤미안풍의, 사회의 틀이나 규율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분방한)의 기질이 있지 않나 생각하지요.

푸치니는 1858년 이탈리아에서 태어났지만 그의 오페라 '라보엠'의 무대는 파리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모딜리아니 역시 1884년 이탈리아에서 태어났지만 파리에서 짧은 생을 마쳤습니다.

19세기 파리의 예술 문화를 엿보다 보면 뭔가 친숙하고 편함을 느끼지요.

전생(前生)이나 내생(來生)을 믿지 않지만 만일 존재한다면 아마도 나의 전생은 19세기 파리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번 여행 기간에 만난 곳곳의 특별전은 행운이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화가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는 점에서죠.


1. 오랑주리 미술관 - 화가와 그의 미술상(모딜리아니와 폴 기욤 회고전)

2. 오르세 미술관 - 반고흐 생애 마지막 70일, 오베르 쉬르 우아즈전

3. 퐁피두 센터 - 샤갈 특별전

4. 마르모탕 모네 미술관 - 베르트 모리조 특별전

5. 루이뷔통 재단 박물관 - 마크 로스코 특별전

6. 파리 시립 현대 미술관 - 니콜라 드 스탈 특별전

7. 앙리 가르티에 브레송 사진 재단 - 루스 올킨 특별전

8. 피카소 미술관 - 소피 칼(피카소 서거 50주년 기념 전시)


방금 전까지 비를 맞으며 오픈 시간을 기다리던 생각은 까마득하게 잊고 모딜리아니의 그림 속으로 들어갑니다.

열정적인 미술상 폴 기욤과 장 발터의 컬렉션을 선보이는 귀한 전시인데요.

장 발터와 폴 기욤 컬렉션은 186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148점의 작품을 모아 놓은 유럽에서 가장 멋진 그림 컬렉션 중 하나입니다.     

이 컬렉션은 주로 열정적인 젊은 프랑스 미술상인 폴 기욤이 부인과 함께 만들었어요.

폴 기욤은 1914년부터 1934년 사망할 때까지 인상주의부터 현대 미술, 아프리카와 대양주 미술 작품들까지 수백 점의 풍부한 그림들을 수집했지만 박물관 개관을 고려하던 중 사망했습니다.     


오랑주리에는 그가 생전에 모았던 컬렉션을 보여주는 그의 집을 미니어처로 만들어 놓은 작은 박스가 있습니다.

아주 작지만 너무나 정교하여 깜짝 놀라 정도였지요.

 


생전에 수집한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던 폴 귀욤의 집 내부 미니어처



폴 귀욤이 죽은 후, 미망인 도메니카(애칭)는 건축가 장 발터와 재혼하여 새로운 작품들을 수집하면서 컬렉션을 변화시켰습니다.

장 발터가 사망한 후 1950년 말, 프랑스 정부는 그들의 컬렉션을 기증받았습니다.

그녀는 컬렉션에 두 남편의 이름을 따 줄 것을 요청했고 Jean Walter and Paul Guillaume collection라는 이름으로 오랑주리 미술관에 전시되게 된 것이죠.     


그런데 폴 기욤과 장 발터는 둘 다 사망 원인이 석연치 않습니다.

일종의 의문사로 알려졌는데요.

도메니카는 의심스럽게 일찍 사망한 폴 기욤을 살해한 혐의로 기소되기도 했습니다.

두 번째 남편 장 발터 역시 1957년에 차에 치인 후 의심스러운 죽음을 맞이했는데 일부 사람들은 그 사고의 배후에는 그의 아내의 책임이 있다고 추측했습니다.

당시 문화부 장관이던 앙드레 말로(André Malraux)는 도메니카의 모든 예술품 컬렉션을 국가에 유증 한다고 약속하면 처벌도 감옥도 없다는 거래를 제안했을 것이고 그 제안을 받아들인 결과 그 컬렉션이 오랑주리에 오게 되었다는 말이 전해진다고 하네요.


인상파 작품은 르누아르 25점, 세잔 15점, 고갱 1점, 모네 1점, 시슬리 1점,

20세기 작품으로 피카소 12점, 마티스 10점, 모딜리아니 5점, 마리 로랑생 7점, 앙리 루소 9점, 드랭 31점, 위트릴로 10점 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랑주리는 모네의 대형 그림인 수련 연작과 발터와 기욤 컬렉션으로 규모는 작으나 실속 있는 작품들로 인기를 끌고 있는 미술관입니다.


모딜리아니가 가난했던 시절, 자신의 그림을 구매해 준 고마운 폴 귀욤의 초상화를 4점 그렸다고 하는데 그중 3점이 걸려 있었습니다.

모딜리아니가 일찍 죽었기 때문에 장 발터의 초상화는 없습니다.

또한 드랭이 그린 폴 귀욤의 부인 초상과 마리 로랑생이 그린 초상의 느낌은 사뭇 다르나 도메니카는 매우 미인이었더군요.




미술관에 전시된 폴 귀욤 사진
폴 귀욤의 초상 <모딜리아니>
폴 귀욤의 초상 <모딜리아니>
폴 귀욤의 초상 <모딜리아니>
큰 모자를 쓴 폴 귀욤 부인의 초상 < 앙드레 드랭>
폴 귀욤 부인 <마리 로랑생>



모딜리아니(1884-1920, 이탈리아)는 그의 아내 잔 에뷔테른(1898-1920 프랑스)을 모델로 그린 그림이 많습니다.

그중 큰 모자를 쓴 잔은 누구나 한 번쯤 봤을법한 그림이지요.

유대인이며 마약을 하는 환쟁이라는 이유로 잔느의 부모는 두 사람의 결혼을 강력히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둘은 동거를 시작했고 1918년에 첫 딸을 낳았지요.

하지만 모딜리아니의 건강은 점차 나빠져 딸을 낳은 2년 후 1920년 자선 병원에서 결핵성 뇌막염으로 34세에 요절하였습니다.

당시 잔느는 둘째 아기 임신 8개월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모딜리아니가 죽은 다음 날, 5층 건물에서 스스로 뛰어내려 생을 마감했습니다.(23세)

잔느의 가족은 딸이 모딜리아니를 따라 죽은 것을 비난했으나 10년 후 페르 라세즈에 있는 모딜리아니의 옆에 묻어주었습니다.




큰 모자를 쓴 잔느 <모딜리아니> 개인 소장
호박 장식이 있는 조끼를 입은 아일랜드 미녀 <모딜리아니>
줄무늬 블라우스를 입은 어린 소녀 <모딜리아니>
앉아있는 갈색머리 소녀 <모딜리아니>
누드 <모딜리아니>
모딜리아니 전시실

  


앙리 마티스(1869-1954, 프랑스)의 그림 역시 빼놓을 수 없이 좋아하는 화가입니다.

상트 페티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 미술관에서 <붉은 방>과 <대화>를 처음 보았을 때의 충격을 잊지 못하지요.


대담한 색채와 강렬한 선으로 그려진 그의 그림은 거부감이 들지 않았습니다.

그림이 갖고 있는 원색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뒤바꾸는 계기가 되었지요.

그 후 여러 미술관에서 그의 작품들을 접했지만 에르미타주를 능가하는 곳은 없습니다.


니스에 있는 마티스 미술관에는 말년에 작업한 물감을 칠한 종이를 잘라 콜라주한 컷아웃 작품들을 제외하고 이렇다 할 그림이 없어 무척 실망했었습니다.


에르미타주에는 붉은 방과 대화 외에도 댄스, 뮤직, 정물과 춤, 화가의 가족, 스페인풍 정물 세비아풍 정물, 내로라하는 그의 대표작을 무려 40점이나 있고 모스크바 푸슈킨 미술관에서 그의 그림이 상당하여 의아한 생각이 들었었지요.



red room < 마티스, 에르미타주 미술관>
The Conversation <마티스, 에르미타주 미술관>



러시아가 마티스의 그림을 많이 갖게 된 데는 사연이 있습니다.

마티스의 그림을 기증한 여인은 리디아 델렉토르스카야(Lydia Delectorskaya 1910-1998, 러시아)로 마티스의 가정부에서 모델, 예술의 동반자가 되었던 여인입니다.


소아과 의사의 외동딸로 태어난 리디아는 부모 모두 발진티푸스 와 콜레라로 사망하여 12세에 고아가 되었지요.

이모의 손에 자란 그녀는 1917년 러시아 혁명을 피해 중국 만주로 도망간 후 난민 신세가 되어 파리로 갑니다. 의사가 되고 싶어 파리의 소르본느 의과대학에 입학했으나 높은 학비로 인해 학교를 그만두고 니스로 향했지요.



1932년 스물두 살의 리디아는 니스에서 마티스의 비서로 일을 시작했지만 온갖 허드렛일도 마다하지 않는 가사 도우미, 스튜디오의 모델을 조직하고, 딜러, 갤러리를 상대하는 등 마티스의 수족이 되었습니다.

리디아는 처음에 마티스가 누구인지도 몰랐다고 합니다.

두 사람의 나이차는 40세, 그러나 병석에 있던 마티스의 부인은 남편과 리디아의 사이를 질투하며 두 사람 중 한 사람을 택하라는 말을 합니다.

1939년 마티스는 결국 부인과 이혼을 했지요.

70세쯤 암에 걸린 마티스는 건강이 쇠약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굴하지 않고 그는 새로운 새로운 예술적 시도인 컷아웃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조수들이 캔버스에 물감을 칠해 오면 그것을 가위로 오려서 붙이는 콜라주였습니다.


그녀는 진정 마티스의 분신 같은 여인이었습니다.

마티스가 1954년 84세에 심장마비로 니스에서 생을 마감한 후 리디아는 남은 생애 동안 혼자 살며 마티스의 유산을 다루는 데 전념했습니다.

마티스의 전문가로서 전시회를 조직했고 그의 삶과 일에 대한 자신의 경험을 담은 Apparent Ease (1998)와  Against Winds and Storms (1996), 두 권의 책을 썼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남긴 마티스의 작품 90여 점을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주 미술관과 모스크바 푸쉬킨 미술관에 기증했습니다.

88세로 세상을 떠난 그녀의 마지막 유언은 '앙리 마티스의 셔츠를 내 옆에 놓아주세요'라는 메모였습니다.



 Woman in a Purple Coat < 마티스>
 Young Woman in a Blue Blouse <마티스, 에르미타주 미술관>



오랑주리가 소장하고 있는 마티스의 작품은 비교적 부드러운 파스텔컬러의 작품들입니다.

마티스는 재즈를 좋아했습니다.

실제로 바이올린을 자주 연주하며 손가락을 풀었는데 집에 오케스트라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할 정도로 음악을 좋아했다고 해요.

그래선지 그의 작품에는 만돌린, 비올라, 기타 등 악기를 소재로 한 그림도 많은데요.

아마도 악기의 소리를 색채로 표현하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Le Boudoir < 마티스, 오랑주리>
Femme à la mandoline 만돌린을 든 여인  <마티스, 오랑주리>
Femmes de canape <마티스, 오랑주리>
붉은 바지를 입은 오달리스크 <마티스, 오랑주리>
그레이 바지를 입은 오달리스크 <마티스, 오랑주리>
세 자매의 초상화 < 마티스, 오랑주리>




그 외에 모네, 피사로, 시슬리, 세잔 등의 인상파 화가 그림 몇 점과 피카소, 르누아르, 앙리 루소, 위트릴로 등의 그림이 있는데요.

시슬리와 피사로에 대해서는 그들이 살던 마을을 소개할 때  다시 얘기하겠습니다.


오랑주리의 그림은 몇 번 보았던 터라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번 여행에서 새롭게 다가온 그림은 위트릴로였어요.

미술관이나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그림은 실제 전시되어 있는 작품 수보다 어마어마하게 많습니다.

예를 들어 루브르가 소장하고 있는 작품은 61만 점인데 그중 전시된 작품은 35,000점입니다.

그러므로 각각의 미술관이나 박물관의 그림이 외부로 출장 전시를 나가면 그동안 다른 작품이 걸려있기도 한 것이지요.

그래서인지 완전히 새로운 느낌으로 보이더군요.


위트릴로는 몽마르트르에서 세탁부이자 모델이며 화가였던 수잔 발라동의 아들입니다.

위트릴로는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태어났지요.

음악가 에릭 사티는 위트릴로의 친구였으며 그의 어머니 수잔 발라동은 사티가 유일하게 사랑한 여인이기도 했습니다.

그의 그림이 이토록 차분하고 서정적이었나? 하는 의구심과 함께 신선한 매력으로 다가왔어요.

맘에 드는 화가를 처음 알게 된 것처럼 기뻤지요.



모리스 위트릴로 <노트르담>
모리스 위트릴로 <노트르담>
모리스 위트릴로 <베를리오즈의 집, 1927>
모리스 위트릴로 <The Bernot House, 1924>
모리스 위트릴로 <Rue du Mont-Cenis,1914>
왼쪽부터 시슬리, 피사로, 모네가 각각 그린 파리 시골 풍경 (1872년)
피카소 <Femme au tambourin, 탬버린을 든 여인>
앙드레 드랭 <Arlequin à la Guitare, 1924>
앙리 루소 <La Carriole du Père Junier>
앙리 루소 < The wedding Party>
앙리 루소 < La noce>
앙리 루소 <Chair Factory at Alfortville>
앙리 루소 <Chair Factory at Alfortville>
르누아르 <Snowy Landscape>
르누아르 < Bouquet in a Chair>
르누아르 <Fleurs dans un vase>
르누아르 <정물>
모네 < 아르장튀르, 1875>
세잔 < Fruits, serviette et boîte à lait>



아는 만큼 보인다는 유홍준 씨의 말은 백 번 옳습니다.

19세기의 그림이 편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 시기에 활동했던 화가들과 생활을 조금이나마 알기 때문일 겁니다.

내 경우 성서와 신화의 내용을 모르니 화나 종교화를 보면 도무지 다가오지 않는 거죠.


어려운 게 또 있습니다.

피카소 이후의 근현대 화가들의 추상화, 초현실파 그림이 그렇습니다.

첫 문장에 끌려 책을 사듯, 음악도 첫 음에 노래를 잘하는지 못하는지 알 수 있듯 그림도 그렇습니다.

컬러가 맘에 들든, 사실적인 표현이든, 눈이 가는 그림을 자꾸 보게 되는 것이죠.

사람마다 입맛이 다르듯 예술에 대한 취향도 모두 다르기 마련입니다.

내 눈이 행복한 그림을 보면 가슴과 머리까지 정화가 되는 느낌이지요.


살다보면 그런 날 있습니다.

가슴 어딘가에 난 작은 구멍으로 바람이 숭숭 들어오거나

머리속은 억수 비가 쏟아지는데 눈에서는 눈물 한 방울 나지 않기도 하고요.

그날 나는 오랑주리 미술관에서 내 안 한 귀퉁이에 작은 꽃 한 송이가 피어나는 걸 알았습니다.

흐뭇했지요.

밖으로 나오니 어느덧 비는 그쳐 있더군요.

그 후로도 미술관 오픈런을 위해 발걸음을 옮기는 시간이면 벌써부터 마음부자가 되곤 했습니다.




오랑주리에서 보이는 튈르리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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