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is, Chanel, Homeless
4. Petit Palais
오랑주리에서 나오니 무슨 큰 일을 한 것도 아니고 그림을 봤을 뿐인데 기력이 떨어집니다.
앙젤리나가 근처에 있으니 가봐야겠습니다.
지금의 샤넬 본점이자 샤넬 집이었던 깜봉가 31번지에서 앙젤리나까지는 500m 정도로 가깝기 때문에 샤넬이 자주 드나들었다고 해요.
영어로는 BOUTIQUES & TEA ROOMS이고 프랑스어로는 Salon de thé 인 그곳은 다과를 곁들인 찻집인 셈이죠.
튈르리 정원의 담장 문을 나가니 멀리서도 저기구나 하는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사람들이 줄을 서 있습니다.
부드러운 쇼콜라쇼와 밤 퓌레를 가득 얹은 몽블랑이나 밀푀유를 함께 먹으면 좋습니다.
앙젤리나 앞에 줄 선 사람들 올해로 120주년 앙젤리나 내부 몽블랑 구입
오스트리아의 제과업자 안톤 룸펠마이어는 프랑스 남부 코트다쥐르에 도착하여 여러 곳의 룸펠마이어 매장을 열었는데 한순간에 유명해졌습니다.
성공에 고무된 Rumpelmayer는 1903년 프랑스의 수도 파리로 진출했습니다.
"Angelina"는 그의 며느리 이름이라고 하네요.
실내에서 먹으려면 1시간은 기다려야 하겠더군요.
구매만 하는 쪽은 대기가 없어 그쪽으로 들어갔습니다.
올해로 120년이 되었다는 표시가 되어 있더군요.
몽블랑과 크루아상을 사 갖고 나왔습니다.
몽블랑
명품 패션의 아이콘이 된 샤넬(Gabrielle Bonheur Chanel 1883-1971, 프랑스)은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입니다.
프랑스 시골의 한 가난한 집에서 12남매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시고, 술과 유흥에 빠져 지내던 아버지는 그녀를 버렸지요.
보육원과 수도원을 전전하던 샤넬은 그곳을 빠져나와 파리로 향합니다.
몇 년간 카페 가수로 일했는데 그때 손님들이 붙여준 애칭이 코코입니다.
‘여성들도 편하고 예쁜 옷을 입을 수 없을까?’에 대해 고민을 하게 된 샤넬은 남자친구이던 발장 장교의 후원으로 1909년 모자가게를 개업하게 되었고 또 다른 남자 친구의 지원을 받아 도빌에 작은 여성복 매장을 열었는데 그것이 최초의 샤넬 부티크가 된 것입니다.
1915년에 샤넬은 메종 드 꾸뛰르(Maison de Couture)를 오픈했고 큰 성공을 거두게 되어 깜봉가로 옮기게 됩니다.
1920년대 말 샤넬은 깜봉가에 4개의 매장으로 확장하여 승승장구하던 샤넬은 약 4천 명의 노동자가 일하는 대기업으로 성장했어요.
그러나 1939년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샤넬 노동자파업이 일어나고 깜봉 31번가 부티크만을 남긴 채, 15년간 패션계를 떠났습니다.
소문만 무성하던 샤넬의 나치 독일 스파이 활동은 지하공작활동 비밀문서들이 공개되면서 증명되지요.
프랑스는 1940년에 독일군들에게 점령당했고 이때 샤넬은 독일군 장교와 애인관계로 지내면서 그의 보호를 받으며 나치의 스파이 활동을 한 겁니다.
1944년 프랑스가 독일에게서 해방되자 샤넬은 스위스의 로잔에서 10년간 망명생활을 했습니다.
1954년에 파리로 돌아온 샤넬은 복귀를 꾀했지요.
1955년 샤넬은 울 소재의 샤넬 슈트를 발표했고 '과거 50여 년간 큰 영향력을 가진 패션디자이너'의 자격으로 오스카 상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1971년, 파리의 리츠 호텔에서 "You see, this is how you die"라는 마지막 말을 남긴 채 88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녀의 유해는 나치 혐의로 프랑스에 묻히지 못하고, 스위스의 로잔에 매장되었습니다.
가브리엘 보뇌르 샤넬(사진 출처:구글)
전 세계의 여인들이 갖고 있어 하는 샤넬은 파리에만 20개, 2022년 기준 전 세계에 310개의 스토어를 갖고 있습니다.
아침 일찍 파리 시내를 걷다 보면 오픈런을 하려고 줄지어 있는 여성 고객들을 쉽게 볼 수 있지요.
수백만 원, 천만 원이 넘는 백과 슈트 등이 아무렇지도 않게 팔려 나가는 게 신기합니다.
심지어 쇼핑을 목적으로 파리를 찾는 젊은이들 심심찮습니다.
여자 친구에게 샤넬을 사주려고 본인의 장기를 매매하는 청년이 있다는 말도 있더군요.
삶의 방식은 누구나 다르지만 어떤 게 옳은 건지 모르겠습니다.
샤넬 앞에는 늘 줄 지어 서 있다.
쁘띠 팔레(petit Palais)는 직역하면 작은 궁전입니다.
큰 궁전이라는 이름의 그랑 팔레(Grand Palais), 그리고 알렉상드르 3세 다리와 마주 보고 있는데요.
원래 1900년 파리 만국 박람회를 위해 세워진 궁전이지만 현재는 파리 시립 미술관으로 사용합니다.
파리에는 시립 미술관과 시립 박물관이 꽤 여러 곳인데 모두 무료입니다.
짧은 여행 기간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놓치는 곳이지만 소장품들이 꽤 쏠쏠합니다.
쁘띠팔레 그라운드 층은 주로 조각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나는 조각보다는 그림을 선호하므로 언제나처럼 쓱 하니 둘러보는데 밖으로 나가는 문이 보입니다.
멋진 가든이 나타났어요.
책 한 권 들고 가서 하루 종일 있어도 좋을 곳입니다.
정원의 연못에 설치된 검은 오닉스 사이로 하얀 연기가 간헐적으로 뿜어 나오더군요.
일종의 설치 미술 같았습니다.
의자에 앉아 나무와 새와 물 위를 마블링하는 하얀 연기를 바라보았지요.
그야말로 무위의 공간이었습니다.
쁘띠 팔레 그랑 팔레 쁘띠 팔레 입구 쁘띠 팔레 그라운드 홀 쁘띠 팔레 그라운드 홀 쁘띠 팔레 가든 쁘띠 발레 가든 쁘띠 팔레 가든 천장 쁘띠 팔레 원형 가든
그림을 보다 보면 소설 한 대목을 보듯 그 속에 담긴 스토리를 상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린 이가 누군지 제목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데도 말이죠.
초췌하고 지친 어머니가 아기를 안은 채 퀭한 눈으로 앉아있습니다.
시선은 그저 허공에 떠 있을 뿐 무엇을 바라보는 건 아닙니다.
빈 젖을 빨다가 잠이 든 아기와 엄마 등에 기대 잠이 든 아이는 아마도 딸인 듯싶습니다.
아기의 오빠 둘은 어머니 곁에서 기대어 잠이 들었어요.
실밥이 너덜거리는 옷과 담요, 그리고 그들의 오른쪽에는 살림살이의 전부로 보이는 그릇 몇 개가 정물처럼 놓여있습니다.
누더기가 된 바지와 얇은 담요로 몸을 감싸고 앉아있는 아이가 정면을 노려봅니다.
그의 눈에 슬픔을 넘어선 분노와 반항이 보이지 않은가요?
아이가 기대고 앉아있는 벽에는 아이러니하게도 대축제를 알리는 포스터가 붙어 있습니다.
추측한 대로 그림의 제목 <Sans asile>은 노숙자입니다.
Sans asile <Fernand Peles, 1883> 쁘띠 팔레
걷다 보면 심심찮게 보이는 이들, 노숙자.
메트로는 물론이고 공원 벤치, 심지어 비 내리는 길거리에 맨 몸으로 누워 자는 모습도 볼 수 있었어요.
마음이 아팠습니다.
좀 낫다 하는 사람들은 길거리에 허름한 텐트를 치고 지내기도 하고요.
메트로를 환승하다 보면 늘 같은 자리에서 자고 있는 노숙자를 볼 수 있는데요.
어느 날은 바게트 하나가, 또 어떤 날은 사과 한 알, 콜라가 놓여 있을 때도 있더군요.
누군가 놓고 간 거죠.
우연히 들여다보게 된 텐트 안에서 위 그림처럼 어린아이들이 옹기종기 들어앉아 있는 모습을 본 적도 있습니다.
오가며 늘 먹거리를 건네주는 사람인지 지나던 아저씨가 텐트 안으로 뭔가를 전해주고 웃는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정겹기도 하면서 낯설었지요.
파리의 노숙인구는 2022년 기준 65,111명,
2024 파리 올림픽 준비로 그들의 거처 마련이 큰 문제로 거론되고 있다고 합니다.
파리의 노숙자들
교실에 아이들이 있습니다.
한 아이가 눈물을 훔치며 서 있고 그 옆에는 여자 아이 둘이 귓속말을 하며 웃고 있습니다.
귓속말은 일종의 비밀을 전하는 일이기에 언제나 흥미진진하고 스릴이 있습니다.
중심에 앉은 두 아이의 옷은 화면을 밝게 빛나게 만들고 있지요.
흰 레이스 카라에 흰 스타킹을 신은 소녀와 비단으로 만든 리본을 머리에 맨 소녀는 레이스로 만든 속치마가 보이네요.
서서 울고 있는 아이의 옷은 어둡고 낡았습니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 소녀에게 자꾸 눈길이 갑니다.
옆에 앉은 친구가 유일하게 마음으로나마 챙기네요.
뒷열에 앉은 두 소녀는 다정하게 책을 보고 발치에는 가죽끈으로 묶은 책보따리도 보입니다.
선생님은 창가에서 무심하게 서있습니다.
이 그림에서 나는 누구일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En retenue < Auguste Trupheme,1888 > 쁘띠 팔레
예나 지금이나 세계 어디를 가도 가장 활기차고 사람 냄새가 가득한 건 시장이 아닐까 합니다.
18세기나 19세기의 영화나 그림에서 두드러지게 느낄 수 있는 건 옷감과 생활 용품의 재료입니다.
그때는 합성 섬유가 없었지요.
당연히 옷감은 면이나 모, 실크, 린넨, 가죽이 소재인지라 좀 더 우아하고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이 느껴집니다.
플라스틱이 없으니 그림 속에는 나무로 만든 바구니가 전부입니다.
그러므로 그림도 한층 부드럽고 자연스럽습니다.
늙은 호박, 양파, 배추 등의 식재료는 변함없고요.
배부르고 등 따시면 족했던 저 시절도 좋았겠다 싶습니다.
Les Halles <Leon Lhermitte, 1895 > 쁘띠 팔레
쁘띠 팔레스에는 모네의 인상, 렘브란트, 피사로의 그림들도 있는데요.
몇 년 전 본 영화 에피 그레이(Effie Grey)가 생각나는 그림이 보였습니다.
바로 존 윌리엄 워터 하우스(John William Waterhouse 1849-1917, 영국)예요.
그의 그림은 존 에버렛 밀레이(John Everett Millais 1829~1896, 영국)와 분위기가 비슷한데요.
그 이유는 두 사람 모두 라파엘 전파 화가이기 때문입니다.
라파엘 전파(Pre-Raphaelites)는 말 그대로 라파엘로 이전으로 돌아가자는 뜻이에요.
말하자면 라파엘로와 미켈란젤로 스타일을 무조건 모방하는 기존 화풍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뜻에서 만들어진 겁니다.
1848년 로열아카데미 출신의 젊은 화가 존 에버렛 밀레이, 단테 게이브리얼 로제티, 윌리엄 홀맨 헌트가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자연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도덕적이면서 성스러운 주제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라파엘 전파의 선두주자인 존 에버렛 밀레이(1829~1896, 영국)는 영국 고전과 성경에서 영감을 얻은 그림을 발표했는데 '오필리아'가 대표적이지요.
맞습니다. 햄릿의 그 오필리아예요.
끔찍한 죽음이지만 너무나 황홀하고 아름답게 그려진 그림이라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는 강렬함이 있습니다.
당시 언론은 형편없는 작품이라며 혹평을 퍼부었지만 존 러스킨만이 유일하게 그를 옹호했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밀레이와 러스킨은 가까워지게 되어 러스킨 부부와 밀레이는 스코틀랜드로 함께 여행을 떠나게 되었어요.
러스킨의 부인 에피의 요양은 위한 여행이었습니다.
그곳에서 밀레이는 에피의 초상화를 그리게 되지요.
그리고 밀레이는 에피의 불행과 러스킨의 냉혈한 같은 성격을 알게 됩니다.
러스킨은 첫날밤 에피의 나신을 본 후 아무 말도 없이 방을 나가버린 후 결혼 생활 6년 동안 한 번도 잠자리를 하지 않았던 겁니다.
자신이 상상하던 여성의 몸과 달라 역겨워했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그가 죽을 때까지 말하지 않았기에 아무도 알 수가 없다고 합니다.
밀레이와 에피는 서로 사랑을 느끼게 되고, 에피는 결혼 무효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당시 결혼 무효소송은 에피가 처음이었는데요.
법원에서 에피의 신체를 의학적으로 검사한 결과 에피가 여전히 처녀라는 게 밝혀졌고 그녀는 소송에서 승소하게 되어 러스킨과의 불행한 결혼생활을 끝낼 수 있었어요.
그 후 에피는 밀레이와 결혼을 해서 8명의 아이를 낳고 오래오래 잘 살았다고 합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 에피 그레이, 한 번쯤 볼만한 영화입니다.
오필리아 <존 에버렛 밀레이> 런던 테이트 브리튼 오필리아 <존 윌리엄 워터 하우스> 개인 소장 La mia <워터 하우스> 쁘띠 팔레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네덜란드 화가 요하네스 페르메이르의 그림을 연상시키는 그림 앞에 섰습니다.
몇 년 전, 오직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네덜란드 1665년>를 보겠다는 일념으로 네덜란드 헤이그에 있는 마우리츠 하위스 미술관에 갔었지요.
구도와 색감, 그리고 여인의 옷차림, 거울에 비친 여인의 얼굴 등 분위기가 너무 비슷했거든요.
그러나 그의 작품은 60여 점 밖에 없기에 아주 큰 미술관에서도 1~2점 밖에 볼까 말까 하는 화가입니다.
작가 이름을 보니 요하네스가 아닙니다.
그런데 그림의 제목이 <네덜란드 집의 방>, 화가 피터 얀센스(Pieter Janssens)가 1668년 네덜란드 델프트에서 그린 그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요하네스 페르메이르와 같은 시대, 같은 도시에서 활동한 화가였던 겁니다.
물론 요하네스가 그린 델프트 풍경도 유명합니다.
처음 보는 화가의 그림에서 오랜만에 만난 친구처럼 반가움이 몽글몽글했던 건 무슨 이유일까요.
네덜란드에 갔을 때 델프트에 들르지 않은 게 내내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조만간 네덜란드에 다시 가게 될지도 모르겠네요.
Room in a Dutch house < Pieter Janssens >
현대 미술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제프 쿤스(Jeff Koons)'라는 이름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그의 이름은 몰라도 어디선가 사진으로라도 그의 작품을 보았을 수도 있고요.
나는 1년 전 이맘때쯤 스페인 빌바오의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그의 작품을 처음 보았습니다.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에 있는 제프 쿤스의 튤립
세계 유명 미술관들의 필수 소장품 작가이자 현존 작가 중 가장 비싼 작품가를 기록하는 스타기도 하지요.
그의 작품 '튤립 꽃다발(Bouquet of Tulips)’이 쁘띠 팔레에 세워졌습니다.
제프 쿤스는 “2015, 2016년의 파리 테러로 숨진 희생자들을 위로하고, 실의에 빠진 시민들에게 희망을 선물하고 싶다”며 높이 12m의 조형물을 기증하겠다고 제안했습니다.
당시 파리 시장과 프랑스 주재 미국대사 등이 참석한 가운데 튤립 부케의 시안을 공개했는데요.
노랑 빨강 파랑 등 열한 송이의 튤립을 꽃다발처럼 움켜 쥔 모양이 뉴욕에 있는 ‘자유의 여신상’을 패러디한 것이라고 합니다.
언뜻 보면 가벼운 소재처럼 보이나 실은 육중한 스테인리스 스틸과 브론즈로 무게는 35t에 달한다고 합니다.
물론 그는 창의적 아이디어만 기부할 뿐 제작비는 미국과 프랑스의 기업인들이 300만 유로(약 40억 원)를 절반씩 부담해서 완성되었지요.
그런데 문제는 파리 시민들의 반대입니다.
원래 팔레 드 도쿄 광장에 설치하려고 했지만 에펠탑을 조망하기에 제격인 관광명소이자, 시민과 관광객들이 끝없이 몰려드는 팔레 드 도쿄에 지극히 미국적이고, 경망스러워 보이는 팝아트를 설치하는 것이 탐탁지 않다는 의견이 모아진 것이죠.
마치 에펠탑 건축 당시 파리의 아름다운 경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반대를 했던 것과 비슷한 것입니다.
제프 쿤스의 요란하고 거대한 작품은 테러 희생자를 기린다는 취지와 어울리지 않으며 희생자 유족들은 화려한 색채의 대형 조형물보다는 희생자들을 진심으로 어루만지고 헌정하는 부드럽고 진지한 예술작품을 원한다는 서명을 하며 반대를 이어갔습니다.
완성된 작품은 설치되지 못한 채 10개월이 지나고 나서야 우여곡절 끝에 쁘띠 팔레 정원에 설치하게 된 것이죠.
이 또한 세월이 흐르면 포토존으로 거듭나겠지만 그날은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쁘띠 팔레 정원에 설치된 제프쿤스의 튤립 부케
센 강에서 가장 화려한 알렉상드르 3세 다리를 건너봅니다.
180cm는 족히 넘어 보이는 모델들이 블랙 의상을 입고 촬영을 하고 있네요.
이제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 서점에 들렀다가 생 샤펠로 갈 예정입니다.
3편을 썼는데도 아직 여행의 첫날이 지나지 않은 걸 보니 사족이 많은 게지요.
다언수궁 불여수중(多言數窮 不如守中)이라 하신 노자 말씀을 새기며 반성합니다.
알렉상드르 3세 다리 나폴레옹의 관이 있는 군사박물관 앵발리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