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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나무 Dec 26. 2023

우연이 만든 사소한 행복

23. Sorbonne, Ecole des Beaux-Arts






그야말로 맥락 없이 파리 8대학으로 유학을 꿈꾸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어디서 들었는지 '파리는 대학 수업료가 공짜래'라는 말에 '정말? 그럼 파리로 유학을 가볼까?'

무슨 만화 주인공 멘트처럼 즉흥적으로 보이는 그런 생각을 했었지요.


대학 4학년 어느 날, 학교 식당에서 같이 밥을 먹던 친구(첼로 전공)가 묻더군요.


'너 순위고사 원서 접수했어?'

'아니, 그게 뭔데?'

'다들 그 시험 준비하느라 학원도 다니고 하는데 그걸 몰라? 합격하면 중고등학교 선생님 되는 거잖아.'

'그래? 무슨 시험을 보는데?'

'전공 이론, 전공 실기, 피아노 실기, 그리고 교육학'

'나는 교육학은 하나도 몰라. 만날 땡땡이쳤거든.'

'나도 그래서 교육학 배우러 학원 다니고 있어. 그런데 교육학 보다 전공 점수 비중이 높아. 너는 작곡 전공이니까 음악 이론도 빠삭하게 알고 피아노도 잘 치니까 한 번 해봐. 밑져야 본전이잖아.'

'그래? 원서 접수가 언제까진데?

'오늘 5시까지.'

'오늘 5시라고?'


"밑져야 본전"

아마 그 말에 혹했을 겁니다.

밥을 먹다 말고 공중전화로 달려갔지요.

아버지께 전화를 했습니다.

'아버지, 고등학교 생활기록부 사본, 신원 증명서...... 이 서류 모두 떼서 5시까지 교육청에 원서 접수해 주세요.'

갑자기 딸의 오더를 받으신 아버지는 그야말로 발등에 불이 떨어졌습니다.

참고로 우리 아버지는 원조 딸 바보.

딸이 한다면 뭐든 다 들어주시던 분이셨습니다.(내년이면 돌아가신 지 10년이 되네요)

준비해야 할 서류가 대 여섯 가지는 되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 말은 방문해야 할 곳이 그만큼 여러 곳이라는 뜻이지요.

그 얘기를 왜 이제서야 하느냐 라는 말씀 한 마디 하실 법도 한데 아버지는 그야말로 묻지도 따지지도 않으셨습니다.

'알았다.'

드디어 딸이 지시한 서류를 만들어 교육청으로 달려가셨을 때는 이미 5시가 넘었고 사정사정하여 겨우 접수를 하셨다고 하더군요.


그렇게 얼떨결에 순위고사(1991년부터 교원 임용고시로 바뀜)에 응시하고 운 좋게? 합격하였습니다.

친구의 추측은 맞았습니다.

전공 이론과 실기, 피아노는 내게는 너무 쉬웠지만 교육학은 거의 찍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내게 응시의 귀띔을 해준 친구는 아쉽게도 떨어지고 말았지요.

내게 응시할 것을 권하지 않아 내가 시험을 안 봤으면 그 친구가 붙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미안했습니다.

부모님은 딸이 선생님이 된 것을 가문의 영광처럼 좋아하셨습니다.

그렇게 졸업과 함께 발령을 받고 의도치도 않게 음악 교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타이틀은 38년 동안 계속되었지요.

타인의 눈에는 내가 교사라는 직업이 적성에 맞아 보일지 몰라도 실상 나 자신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파리에 오면 가끔 그 생각을 합니다.

그때 시험을 치르지 않고 파리 8 대학으로 유학을 갔다면 어떤 인생을 살았을까?

사실 나는 그때 당시 파리에서 지휘 공부를 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기도 전에 엉뚱한 진로가 정해진 것이죠.

아마도 그때 꿈이 마음속에 계속 자리하고 있었던 걸까요?

월급을 타자마자 구입한 건 카라얀이 지휘한 교향곡 전집 CD였습니다.

독일 그라모폰에서 발매한 그 CD전집은 당시 내 월급의 두 달치 금액이었지요.

그리고 끊임없이 오케스트라 공연을 보러 다녔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면 새벽까지 리뷰를 쓰고 다음 날 클래식 잡지사에 원고를 보내곤 했지요.

그렇게 모은 클래식 음악 CD와 DVD가 수 천장이었습니다.




카라얀 CD 수입 전집(1984년 구입)




하고 싶었던 공부에 대한 아쉬움이랄까?

그래서 찾아간 곳이 소르본 대학입니다.

한 달 동안 파리의 구석구석 다녀본 결과 제일 맘에 들었던 곳은 차분하고 정돈된 골목들이 있는 6구입니다.

다시 기회가 온다면 6구에 있는 숙소에 있어봐야겠다는 생각까지 들었으니까요.




핼러윈데이가 다가오는 꽃집의 호박




소르본 대학으로 가는 길에 커다란 성당이 있어 잠시 들어갔습니다.

공교롭게도 그곳은 우디 앨런의 영화 <미드 나잇 인 파리>의 한 장면을 촬영한 곳이더군요.

파리로 여행을 온 길(Gil)은  홀로 산책을 나왔다가 길을 잃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는 여자친구와 함께 머물고 있는 호텔인 브리스톨로 어떻게 돌아가야 하는지 전혀 알지 못하지요.     

밤은 깊어 주변에는 사람도 거의 없고 가까스로 만난 행인은 영어를 하지 못했습니다.

지친 그가 계단에 앉았을 때 머리 위의 종탑에서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기 시작합니다.     

그는 고개를 들어 본인이 교회 앞에 앉아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좁은 비포장도로에 화려한 빈티지 자동차가 다가오더니 그의 앞에 멈춰 서지요.     

승객 중 한 명이 내려서 영어로 말합니다.   

'우리와 함께 파티에 가시지요. 자, 타세요.'




길이 앉아있는 곳이 생 에티앵 뒤 몽 성당 오른 쪽 계단
영화 미드 나잇 인 파리




그곳은 생 에티앵 뒤 몽((Saint-Étienne-du-Mont)입니다.

무릇 든 성당이 그렇습니다.

어디든 다르지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교회의 아름다움과 조화에 매료되어 말문이 막혔습니다.

은은한 조명과 색유리, 조각된 나무와 돌 자수로 이루어진 내부에 저절로 발이 멈춰졌지요.

어떻게 돌을 천처럼 가공하고 끌과 망치 대신 바늘과 실을 사용하는 것처럼 수를 놓을 수 있었는지 늘 경이롭습니다.

흰색 새틴 리본처럼 완벽한 대칭으로 감싸고 있는 기둥, 공기에서는 향 냄새가 나고, 태양은 기둥에 부드러운 소용돌이를 그리고 있었습니다.     




역사 문화재 생 에티엥 뒤 몽 표지판



생각은 멈추고 마음이 한없이 편안해집니다.

그때 깨달았습니다.


'만족이라는 게 별 게 아니구나.'


내가 바라던 여행은 바로 그런 사소함에서 느끼는 행복이었습니다.

하루 종일 말 한마디 안 하고 지나가는 날이 허다했지만 나쁘지 않았지요.

그럼 된 겁니다.

더 바랄 게 없으니까요.



생 에티앵 뒤 몽에서 팡테옹이 보입니다.

프랑스 역사에 이름을 남긴 역대 영웅과 위인들이 묻혀 있는 곳이지요.

단체 여행자들이 줄을 늘어서 있습니다.

팡테옹은 전에 방문했었고 오늘의 목적지는 소르본 대학이니 그냥 지나갑니다.

파리의 대학은 우리나라처럼 하나의 캠퍼스로 통일된 게 아니고 여기저기 흩어져 있어요.

도서관에 들어가려고 기다리는 학생들이 앉거나 서서 책을 보고 있더군요.

도서관 벽에는 유명 인사가 된 역대 졸업생들의 이름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소르본 누보 도서관
도서관 벽에 새겨진 위인의 이름
파리 판테옹
파리 법과 대학



건물을 쭉 따라가니 드디어 소르본이라는 이름이 보입니다.

듣던 대로 문 앞에는 제복을 입은 분들이 학생증을 검사하고 있었어요.

그곳은 마치 마법의 성으로 들어가는 문 같이 느껴졌지요.

선입견이겠지만 내 눈에는 그 학생들은 하나같이 참해 보였습니다.

작은 도로 건너편에서 멀뚱멀뚱 그들을 바라보다가 부근의 소르본 광장 벤치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간단한 샌드위치로 점심을 먹는 학생들이 심심찮게 보이더군요.

낙엽이 수북하게 떨어져 있어요.

애써 비질하지 않은 그 자연스러운 풍경이 좋아 보였지요.

보온병에 넣어간 커피를 꺼내 마시며 작은 광장의 따사로운 햇살을 즐겼습니다.


건너편에 서점이 있는데 무려 100년이 넘은 곳이었어요.

서점의 이니셜이 프린트된 에코백이 4.5유로,

어쩌면 소르본 학생들이 들고 다닐 것만 같은 그 천가방을 하나 사야 하는 맘이 들었지만 과감히 패스했습니다.

그냥 그곳에 앉아있는 게 좋았습니다.

책이라도 한 권 있었으면 좋았을 걸 하는 아쉬움을 갖고 한 동안 그곳을 떠나지 못했지요.




파리 대학
소르본 출입구
경비 아저씨가 째려보는 듯한 느낌?
표정이 맑은 학생들



소르본 출신의 위인들은 수없이 많습니다. 그중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 알만한 사람을 꼽아보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 (1225-1274), 빅토르 위고 (1802~1885), 오노레 드 발자크 (1799~1850), 시몬 드 보부아르 (1908~1986), 장 폴 사르트르(1905-1980), 교황 베네딕토 16세 (1927-2022), 롤랑 바르트 (1915~1980), 조지 뷰캐넌 (1506~1582), 피에르 퀴리 (1859~1906), 마리 스클로도프스카-퀴리(1867~1934),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 (1930-1994), 수잔 손태그 (1933~2004), 전 프랑스 대통령 프랑수아 미테랑, 디자이너 베라 왕 등입니다.   

  

1891년 폴란드 에서 건너와 소르본 대학의 과학부에 합류한 마리 퀴리는 소르본 대학의 교수가 된 최초의 여성이기도 했습니다.

마리 퀴리와 그녀의 남편 피에르 퀴리는 현대 소르본 대학교 과학 및 공학부 의 창립자로 간주되며 2021년 현재, 소르본의 동문과 교수들은 노벨상 33개, 필즈상 6개, 튜링상 1개를 수상했습니다.




소르본 광장
소르본 광장
100년이 넘은 서점




점심식사를 하러 근처의 레스토랑 폴리도르로 갔습니다.

예약 없이 갔지만 다행히 한 좌석이 비어 있어서 기다리지 않고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영화 <미드 나잇 인 파리>에서 주인공 길이 헤밍웨이와 함께 술을 마시는 장면을 촬영한 곳이죠.

그곳 역시 그 흔한 영화 포스터 한 장 걸려있지 않았습니다.

영화의 유명세를 이용한 마케팅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고 그야말로 오래된 동네 허름한 음식점의 모습이었지요.

그런 게 바로 파리의 매력입니다.

1845년에 오픈한 그곳은 실제로 헤밍웨이를 비롯하여 폴 발레리, 제임스 조이스, 앙드레 지드, 랭보들이 단골로 드나들었던 곳입니다.

요일 메뉴인 트러플 햄을 곁들인 오레키에테 파스타를 주문했는데 짭조름합니다.

하지만 문제없는 건 프랑스는 어디든 빵이 맛있기 때문입니다.

식전 빵을 조금씩 떼어 함께 먹으니 아주 맞춤이었지요.




레스토랑 폴리도르
빈 자리가 없이 꽉찬 손님들
폴리도르의 오래된 장식




이제 어디로 가볼까 하고 구글지도를 켜고 내 위치의 주변을 탐색해 보다가 눈에 들어오는 곳이 있었습니다.

'에콜 데 보자르(L'école des Beaux-Arts)'

명실공히 파리를 미술의 수도로 만든 최고의 근대적 교육기관으로 무려 350년의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에드가 드가(Edgar De Gas, 1834~1917),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1840~1926), 오귀스트 르누아르(Pierre-Auguste Renoir, 1841~1919), 조르주 쇠라(Georges Pierre Seurat, 1859~1891), 외젠 들라크루아(Eugène Delacroix, 1798~1863),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Jean Auguste Dominique Ingres, 1780~1867), 카미유 피사로(Camille Pissarro) 등 미술사에 획을 그은 화가들이 이곳 동문들입니다.

로댕은 이곳에 세번 낙방한 후 다시는 응시하지 않았고 마티스는 재수로 입학하였으나 도중에 학교를 그만두었습니다.

또한 유명한 조종사이자 어린 왕자를 쓴 작가 생텍쥐페리도 그곳에서 건축을 공부했지요.


일단 학교에 입학하면 이탈리아 거장들의 작품 모사에서부터 시작해 엄청난 양의 데생을 해야 했고 실기뿐 아니라 어학, 철학, 미술사 등의 방대한 인문과 자연과학 커리큘럼을 통과해야 했습니다.

그런 혹독한 과정을 거친 뒤에라야 자기표현을, 그것도 아주 조심스럽게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마티스는 이 과정을 견디지 못한 게 아닐까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곳은 보통 사람들에게 출입이 허가된 곳이 아니라는 겁니다.

매년 6월에 열리는 오픈 데이나 특별 행사가 열릴 때에만 일반인들이 출입을 할 수 있지요.

들어가 볼 수는 없어도 담장 언저리라도 기웃거려보자는 생각에 그곳을 찾아 나섰습니다.


예상대로 철문이 굳게 닫혀있습니다.

창 살 안으로 스마트폰을 집어넣어 건물 사진을 두어 장 찍은 후 몇 발자국 걸어가니 쪽문이 보였지요.

그리고 경비 아저씨가 서 계셨습니다.


'혹시 지금 들어갈 수 있나요?'

'네~ 들어오세요.'


이게 무슨 일이람?

마치 그 학교 합격 소식을 받은 것만큼 반가운 대답이었습니다.

문 옆에 작은 포스터가 붙어 있었는데 미루어 짐작건대 무슨 워크숍 행사가 있는 듯했습니다.

마음속으로는 야호를 외치면서 겉으로는 담담한 척 차분한 어조로 '메르씨' 하고는 쇠창살 너머로 보았던 교정으로 들어섰습니다.





에콜 데 보자르 정문(왼쪽 흉상은 푸생, 오른쪽은 퓌제)
에콜 데 보자르 교정
본관 출입구




정면에 보이는 오래된 석조 건물은 이렇다 할 특징 없이 평범했습니다.

중앙에 있는 문으로 들어선 순간 입이 딱 벌어질 광경이 펼쳐졌지요.

상상도 못한 반전이었습니다.

게다가 그곳에 나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화가들이 공부를 했던 그곳 팔레 데 에뛰드(Palais des Etudes)의 유리 천장 아래의 공간은 그 순간 오롯이 나의 것이었지요.

우연이 만들어낸 최고의 순간이었습니다.

우아하고 심지어 거룩해 보이기까지 하는 아름다움은 이 학교가 지닌 전통의 무게인가 싶었지요.

꿈 속을 헤매듯 한참을 빙글빙글 돌다가 2층으로 올라갔습니다.




팔레 데 에뛰드(Palais des Etudes)




천장이나 벽도 모두 고풍스러운 그림으로 가득했지요.

복도 끝에 있는 문 앞에 글씨가 보였습니다.

프랑스어는 모르지만 여러 번 보아 알게 된 몇몇 단어들  하나인 비블리오텍(bibliothèque)은 도서관입니다.  

들어오긴 했지만 모든 게 조심스럽습니다.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고 어디까지 들어갈 수 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지요.

게다가 오가는 사람도 없으니 약간 긴장이 되었습니다.

도서관은 물론이고 다른 곳의 문도 열어볼 수는 없었습니다.

그곳은 관광지가 아닌 엄연한 남의 학교이기 때문이지요.




2층 복도
계단으로 올라가는 벽의 그림
2층에 올라왔을 때 누군가 들어왔다
도서관




1층에는 넓은 아트홀이 두 곳 있는데 공식적인 전시는 아니지만 학생들의 그림이 여기저기 걸려 있습니다.

저기 걸린 그림들도 100년, 200년 후이 지나면 모네와 르누아르처럼 평가받을 수도 있겠지 하는 생각을 하니 소중하게 보였습니다.


본관을 나와 ㄴ자로 꺾어진 건물 입구로 들어가니 작은 정원이 있습니다.

마치 여름처럼 초록의 나뭇잎이 그대로인 나무 사이로 학생들이 담소를 나누고 있더군요.

남의 집에 들어간 불청객처럼 미안한 생각이 들어 한 바퀴 휘 돌아보고는 나왔습니다.




유리창으로 보이는 팔레 데 에뛰드(Palais des Etudes)
1층 회랑
중정



오래 머문 것도 아니요, 크고 웅장하거나 화려하고 기가 막히게 아름다웠던 것도 아닌데 기분 좋은 기억으로 남았습니다.


에콜 데 보자르를 나오니 길 건너편 호텔 벽에 두 개의 대리석 명판이 보였어요.

유럽은 길을 가다 보면 심심치 않게 명판을 볼 수 있습니다.

대부분은 '누가 언제 여기서 살았다.'라는 내용을 명시해 둔 게 대부분이라 눈여겨보는 편입니다.

그런 명판은 대부분 유명한 사람이어서 이름과 날짜는 읽을 수 있으니까요.

다가가서 읽어보니

하나는

'시인이자 극작가 오스카 와일드, 1900년 11월 30일 이곳에서 사망했습니다.'

또 하나는

'아르헨티나의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1899년에서 1986년까지 이곳에서 살았습니다.'

라고 쓰여있어요.




L'Hotel(왼쪽 상단에 오스카 와일드,오른 쪽 상단에 보르헤스 명판이 보인다)





오스카 와일드가 사망한 지 100년이 지난 후 이 호텔은 대대적으로 개조를 하고 벽지는 화려한 공작 디자인이 특징인 녹색과 금색 종이로 교체하여 5성 호텔이 되었지만 당시에는 싸구려 호텔이었습니다.

1800년대 후반 런던에서 초호화 파티의 중심에 서서 최고의 주가를 올리던 오스카 와일드,

그의 동성애가 알려지자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등을 돌렸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후 런던에서 쫓겨난 와일드는 파리 생 제르맹의 싸구려 호텔 <데 알자스>에 도착했지요.

그리고 1900년 11월 뇌수막염으로 사망하기 전까지 마지막 몇 달을 그곳의 16호 방에서 틀어박혀 보냈습니다.

보르헤스 역시 월세방 살듯 그 싸구려 호텔에서 살며 글을 썼다고 합니다.


 

생 제르망 거리에는 장 폴 사르트르와 시몬 드 보루아르가 자주 드나들던 카레 되 마고와 카페 드 플로르도 있습니다.

몇 년 전 몽파르나스에 있는 그들의 묘지를 방문하고 그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었지요.

차와 디저트는 호텔 만큼 비싸지만 여전히 사람들이 바글바글하더군요.




카페 레 되 마고
카페 드 플로르




카페에 가는 대신 디저트 가게 오 메흐비요 드 프레드(Aux Merveilleux de Fred)에 들러 달걀흰자에 거품을 내어 오븐에 구워 만든 머랭위에 가볍고 잘잘한 크림 부스러기로 감싸 만든 쁘띠 디저트 6가지 맛(다크 초콜릿, 화이트 초콜릿/스펙쿨루스, 커피, 프랄린, 캐러멜, 체리)을 샀습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디저트를 집는 순간 너무 부드러워 예쁜 모양이 부서져 내립니다.

입안에서 스르르 녹아내리는데 설탕은 울고 갈 만큼 달콤합니다.

잠시 꿈꾸었던 파리 유학의 아쉬움이 달콤한 머랭 페이스추리와 함께 녹아내렸지요.

대단할 것도 없이 사소한 여정이었지만 만족 지수가 높던 하루였습니다.

 



오 메흐비요 드 프레드(Aux Merveilleux de Fred)

 

화이트 초콜릿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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